사기꾼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장인숙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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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재현하려는 발자크 소설의 소재 에 당연히 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왕정복고 후, 샤를 10세의 보수적 정치에 부르주아 계급은 반발하고 혁명(7월 혁명)을 일으켜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한다. 부르주아가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던 이 시기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노골적으로 부를 추구했다. 발자크 역시 돈을 위해 사업을 벌였지만 매번 실패해 빚 독촉에 시달렸다. 빚을 갚기 위해 그는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써야만 했다. 발자크의 희곡(희극)사기꾼의 시점은 1839년이다. 발자크 자신이 살았던 현재의 일부분을 무대에 그대로 옮겨 놓았고, 주인공이자 투기자인, 빚 때문에 거의 파산 직전에 몰린 메르카데 역시 발자크의 분신일 것이다.

 

거짓된 정보를 가득 퍼뜨려 저가 주식이 앞으로 엄청나게 오를 것이라고 해 투자자를 모으는 주식 투기자이자, 주가 조작자인 오귀스트 메르카데는 좋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빚더미에 놓여 있다. 메르카데는 16개월 넘게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 있는 가구들 모두 집주인인 브레디프에게 저당 잡혀 있고, 조만간 그 집에서 쫓겨 날 처지이다. 날마다 찾아오는 채권자들을 온갖 핑계를 대고 피하지만,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다시 거짓되고 허황된 말로 자신의 설계가 곧 성공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다.

 

[주인님의 금고 어디가 새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채워 넣어도 빈 물컵이 되니! 어느 날 쓰러져 계시다가, 그다음 날이 되면 벼락부자가 되어 깨어나시지, 주무실 때도 무섭게 일을 하신다니까, 숫자를 세고, 계산을 하고, 먹이가 될 만한 광고 문구를 작성하고, 항상 주주들을 모으시지, 그러나 주인님이 아무리 일을 벌여도 채권자들이 생겨나서 집에 왔다 갔다 하는 거야. -p.23]

 

지금 메르카데가 빚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인도로 간 동업자 고도가 돌아오는 것이고, 딸아이 쥘리를 부자에게 결혼시키는 것이다. 그리 예쁘지 않은 쥘리(그녀의 아버지마저 본판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탄한다.)는 가난한 회계사 미나르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상황을 알고는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려고 한다. 심지가 굳어 자존심이 세고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해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돈이 최고였던 그 시대에는 결혼도 거래였기에 쥘리는 사랑을 지킬 힘이 없다. 돈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메르카데 역시 사랑이 밥 먹여 줄 수 없고, ‘큐피드의 화살이 연금 쿠폰이라도 쏟아 보내 줄 줄 아냐며(p.55)’ 그들의 사랑을 철부지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치부한다.

 

희극, 특히 몰리에르 식 희극의 전개를 따른 발자크의 사기꾼은 서로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위기와 갈등을 빚다가 한 번에 해피엔딩으로 정리된다. 기다리던 고도가 돌아옴으로써 메르카데의 빚은 청산되고, 고도의 아들로 상속자가 된 미나르를 사위로 맞아들일 수 있다. 메르카데와 메르카데 부인은 시골로 가 허영을 벗어나 인내와 절약으로 사는 미덕을 실천하자고 다짐한다.

 

[거짓과 술책이 떠도는 이런 분위기, 남에게 과시할 필요 없는 이런 허영에서 벗어납시다. 빵만 있으면 되잖아요. 그거라도 즐겁게 먹어요. 손해 본 주주들을 비웃으며 먹는 진수성찬처럼 우리 목구멍에 걸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p.229]

 

책을 읽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책의 내용보다 나와 내 주변을 생각할 때가 더 많이 있다. 전형적 희극의 성격으로 전개되는 사기꾼의 소재가 자본주의의 속성에 관한 것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읽다가 계속 딴 생각을 했다. ‘돈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해 돈이 중요한 요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부모에게 서울 소재의 건물을 물려받았지만 주식과 선물로 그것을 탕진하고는 이혼하고 술과 원망만으로 사는 남편의 친한 친구, 부모에게 끊임없이 돈을 받아 생활했지만 부모가 연로하시자 한창 활동하실 때 돈을 더 많이 못 받아낸 것에 대해 후회하는 나의 지인! 딱히 물려받을 것이 없는 딸아이가 앞으로 혼자 힘으로 살아내야 할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많이 미안한 내 마음도 있었다.

 

이 책에는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계속 메르카데의 동업자인 고도의 이름이 나온다. 고도의 소식이 끊긴지 8년이 지났지만, 메르카데는 범선에 수많은 보물을 싣고 돌아오는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돌아와야 모든 고난이 없어지고 일이 해결된다. 고도는 메르카데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고도는 실제적으로 부를 가져다주는 사람이지만,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미래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에게 상징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확신으로 사람들은 돈을 투자, 또는 투기한다.

 

[세상 모든 사람은 고도를 갖고 있어, 가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p.70]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발자크의 사기꾼보다 훨씬 뒤에 출간(1952)되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연상되었다. 발자크는 뮈세의 중편소설, 크루아실(1839)에서 고도(Godeau)라는 성을 차용했는데(p.262)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베케트 희곡의 인물인 고도의 역할과 너무 비슷하다. 정작 베케트는 발자크의 사기꾼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고도라는 인물의 성격이 너무 닮아 이 단어의 출처가 궁금했었다.

 

 

정부는 올해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기로 해 의협과 갈등이 심하다. 정부가 이렇게 대책도 없이 많은 인원을 늘리기로 한 결정은 물론 의사가, 특히 지방에서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성형외과나 피부과 등 특정 과목에 지나치게 지원자가 쏠림으로 인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의사의 문제만은 아니다. 수요가 없는 곳에 공급이 있을 리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성된 온갖 불안과 과시욕으로 사람들이 성형외과나 피부과를 많이 찾는 것에 근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 가지 않으면 의사들이 몰리지 않을 것이다. 의사가 되어서도 보통 사람들보다 버는 돈이 그렇게 많지 않으면 학생들은 당연히 공대나 기초 과학 분야에 지원할 것이다.

 

메르카데는 자신의 부인에게 오늘날 온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돈이 차지하고, 가족은 없고 개인만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탐욕으로 단숨에 부자가 되려 하며 투기자와 주주는 똑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기심과 욕심으로 일확천금을 좇는 사람들이 주식 시장에 모이고 그것이 메르카데 자신을 살리고 있다고 말한다.(p.35,39)’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성형외과와 피부과에 득달같이 달려가니 의사들이 그곳으로 쏠린다. 노동으로 버는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쉽게 벌기 위해 사람들은 투기를 한다. 거기에 늘 사기꾼은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현혹되고 자신의 돈을 던진다.

 

재테크에 관심 없이 그냥 그럭저럭 게으르게 살아가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가진 나의 지인들이 한결같이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다 빛 좋은 개살구야~~” 빛 좋은 개살구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들의 말 속에는 자신이 가진 부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 같다또한 그들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의 부에 비해 자신들이 가진 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매주 로또 당첨자는 배출된다. 나에게는 절대 오지 않는 고도가 다른 사람에게는 온다. 처음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가 있는가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항상 운이 나쁜 사람이 인생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방법으로 일확천금만이 답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 살 것인지, 뭐가 정답인지 모른다. 그저 사기꾼에게 속지만 않기를 바랄뿐이다. 그래서 내 인생이나 당신 인생이 탕진되지 않기를.

 

[절대 투기를 없앨 수 없을 거야. 난 이 시대를 잘 알고 있어!사람들은 미래를 팔아, 불가능한 행운의 꿈을 복권으로 팔듯이. 그러니까 증권 시장 회합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날 도와주게, 거기서 그 꽉 막힌 속을 뚫어 보세! 이보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아주 어렵게 그걸 찾아내, 하지만 노리지 못하면 결코 찾지 못한다네.

-p.193~194]


지만지 출판사의 책은 여태껏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도서관에서는 보통 겉표지를 제거한 상태로(흰 색의 속표지) 대여해 준다. 올 봄에 친구가 발자크의 사기꾼을 선물해줬다. 처음으로 분홍색 겉표지가 있는 지만지 출판사의 책을 읽었다. 분홍색이 확실히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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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5-17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동네 도서관도 겉표지를 떼어버렸더군요? 지만지에서 아예 분홍으로 만들었음 어땠을까 싶어요. ‘저런거 아껴서 가격좀 낮춰주지‘ 하는 한숨과 아쉬움?ㅎㅎㅎ

정말 요즘 시대에도 대입해 볼 수 있는 내용같아요. 그리고 제 생각에도 의대정원만 늘린다고 해결되는게 아닌데 늘 고래싸움에 새우등만 터지는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4-05-17 15:37   좋아요 0 | URL
지만지의 책은 가격에 비해 내용도 그렇고 편집도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아 선뜻 구입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그래도 주석이나 해설이 좋았습니다.
발자크의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어요.
돈 없으면 삶을 지탱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잖아요.
뭔가 투기를 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받는 세상이 너무 싫어요^^

미미님!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아요.
한 번씩 소식 알려주세요~~
 
미들마치 - 완역본
조지 엘리엇 지음, 이가형 옮김 / 주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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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의 미들마치에서 펼쳐지는 결혼에 대한 속성은 지금의 나와 내 주변의 결혼을 생각하게 한다. 공감과 웃음과 씁쓸함이 있다. 하지만 2KG이 넘는 1416쪽의 이 책은 읽기에 불편하고 손목에 물리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냥 소장용으로 좋은데, 그런 이유로 개정판이 만들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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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5-15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자책의 장점이 그래서 ㅋㅋ 대신 전자책은 눈이 피곤해지는 단점이 ㅎㅎ 오늘 휴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4-05-15 19:07   좋아요 2 | URL
전자책의 장점이 많은데, 확실히 눈이 피로해지더라고요.
또한 전자책의 종류가 많아 자꾸 여기저기 기웃거려 걸쳐놓은 책이 많아요 ㅎㅎ

독서괭 2024-05-15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그래서 개정판은 분권으로 나온 거군요?? 읽느라 고생하셨네요!

페넬로페 2024-05-15 19:11   좋아요 1 | URL
네,
근데 개정판은 네 권으로 분권되어 나와 또 불편한 것 같더라고요.
지금 세일을 많이 하던데 합본과 분권 다 기획에서 실패한 것 같아요 ㅠㅠ

독서괭 2024-05-16 10:49   좋아요 1 | URL
민음사 2권으로 낸 게 좋은 선택일 것 같군요!

새파랑 2024-05-15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에서 새로 나와서 살까말까 고민중인데 음 그렇게 강추할만한 작품은 아닌가 봅니다~!!

페넬로페 2024-05-16 02:58   좋아요 0 | URL
내용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다만 합본인 이 책이 너무 불편해요.
민음사판도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두 권으로 만들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미 2024-05-17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제 ‘인생 네권‘에 이 책도 넣어야해요!ㅋㅋㅋㅋ 저 얇은 축약본으로 읽었었는데 그래도 너무너무 좋았던. 언젠가 제대로 완독해보고 싶어요. 페페님 벽돌책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페넬로페 2024-05-17 15:31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일단 읽기가 너무 불편해요.
그래서 급하게 휘리릭 읽었습니다.
얇은 책으로 다시 읽으며 정리해 보려고 해요^^
그때 리뷰 쓰려고요.
인생 네권, 매년 하면 좋겠습니다.
 
스타벅스 일기
권남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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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그래도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가 쓴 글이라...‘스타벅스‘라는 단어엔 경제, 사회, 다국적, 젠트리피케이션, 공정무역 등 엄청난 매커니즘이 존재한다. 이 책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저 출시된 음료의 이름과 가벼운 관찰만 있을 뿐. 세이렌이 이렇게도 무섭지 않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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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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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소설, 댓글부대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됐다는 소식을 듣고, 영화를 보러 갈 까 생각했지만 영화평이 별로 좋지 않아(단지 댓글 몇 개만으로 결정했다.) 그냥 소설을 읽었다. 몇 년 전에 방영되었던 tvN<요즘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의 패널로 출연한 장강명 씨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고, 인상이나 말하는 모습으로는 그가 어떤 소설을 쓰는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TV 뉴스와 신문을 보지 않기에 아침에 일어나면 N포털을 대강 훑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잠깐 살핀다. 내 성향과 같은 언론사를 거의 구독하지만 다른 쪽 두 개 정도는 본다. 양쪽은 일단 메인 뉴스가 완전 다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양분되고, 원하고 필요한 것들만 선택된다.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는 묘하게 두 쪽의 성향이 약간 흐릿해지는 느낌도 받았다. 댓글도 완벽히 갈라진다. 심지어 고혈압이나 당뇨에 좋은 생활 습관을 알려주는 기사에도 문재앙 탓이라는 댓글도 있다. 댓글 수위가 높은 것은 자동적으로 삭제되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댓글에 있는 원한, 미움, 오로지 자기 것만을 지키려는 것에 오싹해진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이고 팩트인지 알 수 없어 그저 숨죽이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만 최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랜만에 읽은 한국 남자 작가의 소설은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주었다. 전적으로 허구라는 작가의 말대로 이 글의 장르는 소설인데도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것처럼 읽혀졌다. 내용이 다양했고, 많은 것을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한 짜임새가 좋았다. 완전 내 개인적 바람이지만, 나는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는 작가가 좋다. 그것이 작가가 지녀야 할 약간의 의무라고도 생각한다. 이 소설이 그렇게 해주어 장강명 작가에게 고마웠다. 풀살롱, 단란주점, 텐프로가 있는 술집, 안마방같은 장소와 거기서 행해지는 일들이 많아 불편했지만 그것도 현실이고, 이 소설의 구성을 위해 필요했다는 것도 나중에 납득되었다.

 

인터넷의 사용범위가 좁은 나에게 이 책에 나오는 용어들이 어려웠다. 계속 신조어, 은어, 줄임말들을 검색하며 읽었다. 사람들의 소소한 댓글이 아닌 이 소설의 팀-알렙처럼 고작 3명이 숨어서 움직이거나, 회사의 형식을 갖춘, 규모가 큰 댓글부대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은 조직적이며 풍부한 상상력으로 대중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확실한 주체가 보이지는 않지만 대충은 알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이 결탁한 자들의 신념이나 심기에 맞춰 댓글부대는 움직였고 그들은 보통 여초사이트나 좌파를 와해시켰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커뮤니티가 있고, 그들 나름의 신념과 법칙을 가지고 활동을 하지만 약간의 방해공작과 심리전으로도 스스로 무너졌다. 대중들의 모임은 끈끈한 듯 보였지만 서로 헌신적이지 않았고, 개인은 약한 존재였다. 어떤 이슈에 불나방처럼 모여들며 자신들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계획적이고 조작된 댓글 하나로 쉽게 서로를 의심하고 비난했다.

 

댓글부대인 -알렙은 돈에 의해 움직인다. 처음엔 삼천만원, 그 다음엔 구천, 이억으로 몸값은 올라가고 이들 스스로 더 많은 충성을 갖다 바친다. 이 소설의 제목이 댓글부대이지만 사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다. 진짜는 돈과 정보를 통해 팀-알렙을, 대중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다. 그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우리 역시 실시간으로 감시받고 그들이 흘리는 것을 받아먹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나이를 떠나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인터넷의 세상에 푹 빠진 요즘,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어버린다. 이 소설 각 챕터의 제목인, ‘요제프 괴벨스의 어록’(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문장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작가는 말한다.)이 섬뜩하다.

 

[4: 피에 굶주리고 복수에 목마른 적에 맞서려면 무엇보다 한없는 증오를 활용해야 한다.

7: 대중에게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9: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알렙의 삼궁, 찻탓캇, 0110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관점으로 소외된 자에 가까운 젊은이들이다. 이 세 사람을 움직이는 이들은 그들에게 돈만을 주지는 않는다. 먼저 돈 맛을 알게 하고, 여자가 있는 곳으로 데려 가, 자신이 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을 지우게 하고 스스로 돈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마지막까지 이 세 사람은 나중에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충성하며 돈을 좇는다. 댓글로 사람을 죽게도 하지만 그들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요즘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있다. 19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의 풍속을 소설 속에 그대로 담은 발자크의 인간극을 이해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이나 그 당시 프랑스 역사에 대한 책을 읽는다. 하지만 사실 19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의미가 깊지만 어쩌면 나에게 발자크의 소설은 재미로 더 다가올 수도 있다. 발자크의 소설로 장강명의 댓글부대처럼 내 마음이 많이 무거워지지는 않는다. ‘댓글부대를 흥미롭게 단숨에 읽었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생각이 많아지고 우울하다. 이런 게 싫어 자꾸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소설로 도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소설은 제3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평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지금처럼 필요 없을 때가 있을까? 제발 흩어지고 침묵하면 좋겠다.

 

[그러다가 광우병 시위를 보면서 정신을 차렸지. 지금 사람들이 화가 아주 많이 나 있구나. 그걸 느꼈지. 얼른 희생양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될 타이밍인데도 정부에 있는 자들은 그런 간단한 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어.

-p.151, ‘남산 노인의 말

 

삼궁이 대답했다. 이철수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철수는 이 삼궁이라는 젊은이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가능하면 몇 년 더 살려두고 싶었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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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5-03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소설 앞 부분 읽다가 나가지 못하고 덮은 기억이 ㅎㅎ

페넬로페 2024-05-03 10:29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의 느낌이 뭔지 알겠어요.
저도 그랬어요.
저도 처음엔 제 취향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장강명 작가의 소설이니 한 번 읽어보자고 했는데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소설로 정보를 얻는다? ㅎㅎ

책읽는나무 2024-05-03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첫 장도 못 펴고 반납했었던 기억이...ㅋㅋㅋ

페넬로페 2024-05-03 20:41   좋아요 1 | URL
ㅋㅋ~~
이 책은 완독하기 힘든 책이군요~~
읽어내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여운이 남아요^^

그레이스 2024-05-05 0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산노인 ㅠㅠ
남산이라 함은 거기말인가요?

괴롭지만 읽고 알고 있는게 힘이 되겠죠?!

페넬로페 2024-05-05 10:05   좋아요 1 | URL
저 말이 섬뜩하죠~~
남산이 우리가 아는 거기는 아니지만 어떤 새로운 힘의 상징이 아닐까 생각되었어요^^
많이 비틀어진 곳~~

희선 2024-05-06 0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돈이면 뭐든 한다, 가 아니어야 할 텐데... 그런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를 일이군요 댓글이라는 게 누군가를 죽게 하기도 하고, 그런 건 안 하면 좋겠습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4-05-06 12:09   좋아요 1 | URL
네, 희선님의 바람대로 돌아가는 세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안타까워요^^
뉴스든 여론이든 요즘도 댓글부대의 활약이 있는 것 같고 알게 모르게 우리가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모모 2024-05-06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작가에요. 댓글부대도 읽었었구요.
페넬로페님 글에 십분 공감합니다

페넬로페 2024-05-07 09:04   좋아요 1 | URL
장강명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잘 표현한 것 같더라고요
다른 작품도 읽어 보고 싶어요.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Conan 2024-05-08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강명 작가의 글은 ‘표백‘을 시작으로 대부분 읽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을 잘 그리고 있는데 읽고나면 우울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세상이 쉽게 바뀔 것 같지도 않구요~
그리고 영화평이 좋지 않군요.
소설을 영화로 만들때 좀 잘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해리포터는 책도 영화도 참 좋았는데, 퇴마록은 참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페넬로페 2024-05-08 17:55   좋아요 1 | URL
이번에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그가 글을 쓰는 배경이나 소재를 대충 알겠더라고요.
들여다보면 힘들고 우리의 현실이 비관적으로 느껴져 자꾸 외면하게 됩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웬만하면 소설이 영화화 되었을 때 잘 보지 않으려고 해요.
매번 실망하게 되더라고요.
근데 장강명 작가의 글이 영화 감독에게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동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미 2024-05-17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에 손석구가 출연했길래 친구랑 충동적으로 봤는데 재밌었어요! 아마 기대를 안하고 봐서 그런걸 수도 있고 워낙 손석구 연기가 매끄러워 그럴 수도 있겠어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라니 궁금합니다. >.<

페넬로페 2024-05-17 15:28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그럼 영화 한 번 봐야겠어요.
사람들이 영화 보면서 조금 헷갈린다고 했는데 원작을 보면 그럴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영화는 내용을 다 살리지를 못하잖아요!
영화에도 야한 장면이 나오나요?
책에는 좀 그런 내용이 많아요.
남자들은 도대체 왜 그런 걸 그리 좋아하는지~~
 
과테말라 안티구아 파노라마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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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역습으로 겨우 4월에 덥다는 걸 느낀다. 과테말라 안티구아 파노라마를 진하게 내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마시면 봄에 맞는 여름을 잠깐 잊게 해준다. 따뜻한 커피를 선호한다면 연하게 내려 입안에 남아있는 향과 가벼운 산미를 음미하며 창밖을 바라보라. 그래도 아직은 봄이고 꽃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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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4-30 2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의 리뷰를 보고 오늘이 4월 말일임을 깨달았습니다 😊

페넬로페 2024-04-30 20:37   좋아요 3 | URL
커피 스탬프 2개, 중요합니다 ㅎㅎ
물론 그것 때문에 집에 커피가 넘칩니다~~

은오 2024-05-01 17: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커피평 제일 아름답게 쓰시는 분...♥️

페넬로페 2024-05-01 18:48   좋아요 1 | URL
제가 알라딘의 공유, 원빈?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