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시대 - 나쁜 습관은 어떻게 거대한 사업이 되었는가?
데이비드 T. 코트라이트 지음, 이시은 옮김 / 커넥팅(Connecting)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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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외 뇌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적응도를 높이려는 개체의 행동을 권장한다. 권장 방법은 뇌를 통해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인데 여기에 사용하는 호르몬이 도파민이다. 도파민은 인간이 식사나 섹스 같은 본연의 목적에 걸맞는 행동을 할 때 분비된다. 하지만 모든 결과에는 노력과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성적 매력이 있는 상대방을 보고 흥분하거나 접근한다고 해서 곧 번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먹을 것을 보고 군침을 흘려도 식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과 과정도 시간과 노력을 반드시 들여야만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에 인간의 뇌는 직접 목적 행동 외에도 관련 활동에도 도파민을 분비한다.

 그래서 인간은 직접 섹스가 아닌 자위행위나, 포르노 시청에도 도파민이 분비되며 식사가 아닌 먹을 것을 보거나 심지어 먹방을 봐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그나마 이런 관련 행동은 상황이 좋다. 문제는 적응도를 올리지 않는 자연계의 여러 식약에도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담배나 술, 마약 등이 그렇다. 

 하여튼 우리의 뇌는 동기 회로에서 도파민을 증가시키는 어떠한 행동도 계속 반복하려고 한다. 심지어 그에 따른 보상강도가 감소해도 그렇다. 그래서 욕구는 거기에서 얻게 되는 쾌락과 별도로 점점 강해지게 되며 그렇기에 인간은 도파민은 뿜게하는 여러 가지 것들에 중독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갈망은 오히려 쾌락 자체보다 더 절실하고 집요해진다. 

 중독은 약물과 세트(사용자의 성격과 특성, 의도), 세팅(약물을 복용하는 물리적 사회적 환경)의 조합이다. 책 '중독의 시대'는 이렇게 생존을 위한 부작용으로 뭔가에 중독되기 쉬운 인간의 중독의 역사를 잘 살피고 꼬집은 책이다. 현대는 어쩌면 새로운 중독의 시대인데 그것에 대한 지적도 강렬하다.


1. 고대의 중독

 인간의 역사는 어찌보면 오랜 확산과 최근의 수렴의 역사다.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5-6만년전 전 세계로 퍼졌다. 현생 인류는 수렵 채집자 무리가 이동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적, 생물학적 진화를 했다. 대대적 이동을 통해 쾌락을 제공하는 동식물에 대한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쾌락, 즉 중독의 역사의 시작이다.

 초기 인류는 꿀에 탐닉했다. 자연상태에서 당을 좋아하는 본능에 꿀만한 강력함은 없었다. 그래서 인류는 대부분의 지역으로 이주하며 꿀을 찾아다녔고 양봉벌을 이용하기도 했다. 다만 북미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지역의 추위로 인해 양봉벌을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그들이 대신 찾은 쾌락 물질은 사탕단풍나무 수액으로 메이플이다.

 쾌락의 초기 역사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자극하거나 분비를 모방하는 분자가 포함된 물질을 동식물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그 연관성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쾌락을 주고 고통을 진정시키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유도하는 식물은 더 가치있게 여겨졌고 재배되고 전파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쾌락 자원은 당시 지역적으로 편재했다.

 카카오는 아마존, 사탕수수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콜라 나무는 아프리카의 숲, 아편 양귀비는 유럽, 대마초는 중미, 차는 중국 남서부, 후추는 남아시아에만 있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만 소비되다 농업과 문명, 장거리 무역의 발전이 이뤄지고 나서야 전 세계로 전파된다. 

 다만 지역적 편재가 없었던 쾌락물질이 있었으니 알코울, 바로 술이다. 이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효묘균 세포들이 과일에 내려앉아 과당의 혐기성 발효를 일으키면 알코올이 생겨나며 술이된다. 오래된 과일에서 술맛이 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과일이나 효묘균은 전 세계 어디서나 있기에 재료의 차이가 있을 뿐 술은 지역적 편재 없이 초기부터 인류를 중독시킨다.


2. 농경과 대항해 시대의 중독 

 농경은 인간에게 고된 일이다. 초기 제국이 성립하며 지배층이 생겨났고 이들은 대다수 일반인이 생산한 잉여물을 착취한다. 농사가 고되었기에 술을 비롯한 여러 식약 물질은 농사꾼들에게 일종의 보상이 되었다. 그것으로 그들은 잠시나마 스트레스, 피로, 불안, 질병에 대한 불안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중독을 일으켰는데 통치자는 이걸 이용해 식약과 술을 적절히 제공하여 그들을 달래고 지속적인 생산을 추구하게 하였다. 

 쾌락 식물은 이처럼 유용하여 그 전파가 빨랐다. 농경과 가축 시대에는 유용한 식물과 동물의 인위적 선택으로 인해 무척이나 다양했던 세계의 풍경을 단조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쾌락 물질은 귀했기에 초기엔 엘리트들이 주로 독점했다. 하지만 생산이 늘고, 교역이 활성화 하며 서서히 일반계층에게도 퍼지게 되었다. 

 문명시대에 인간의 중독은 자연에만 의지하진 않았다. 인간은 특유의 지적 능력과 협동성, 도구제작능력을 활용해 쾌락을 주는 인공도구를 만들어 내었다. 바로 도박과 스포츠 경기, 내기 등이 그것이다. 한국과 중국에서 기원한 카드 게임은 교역로를 따라 서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다가 유럽에서 크게 성공했는데 여기엔 15세기 등장한 인쇄술이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알코올에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농축과 증류 기술 덕분이다. 농축과 증류는 술의 맛과 도수를 높여 보다 빠른 쾌락에 도달하게 하여 중독을 심화시켰다. 이는 알코올의 끓는 점과 어는 점이 다른 물질과 다르기 때문에 가능했다. 농축은 술이 얼며 생겨났는데 심한 한파에서 얼지 않는 부분에 알코올을 비롯한 나머지 물질이 응축되며 농축이 일어났다. 증류는 알코올이 물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에 순수한 알코올을 더 강하게 증기로 모을 수 있어 생겨났다.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에는 무역으로 인해 전 세계 동식물의 대규모 이식이 일어났다. 즉, 지역적 편재의 극복이 더욱 본격화 한 것이다. 또한 화폐경제가 도입되면서 식약의 가격이 저렴해지게 되었다. 사치품에 대한 가격이 하락하여 일반인도 소비할 만한 정도가 된 것이다. 


3. 산업 시대의 중독

 인류는 지난 1천년 간 쾌락을 발견, 발명, 개선, 교환했으나 진정한 대중 시장이 열린 것은 1660-1800년 사이다. 이후 과학과 산업이 더욱 발전하면서 쾌락의 속도도 같이 빨라지게 되었다. 쾌락 물질은 대개 사치품이었는데 이들의 가격이 비쌌던 것은 바로 운송비용 때문이었다. 하지만 산업시대는 운송수단이 획기적으로 발달하며 운송비가 낮아져 사치품의 가격이 낮아지게 된다.

 증기선의 발명으로 1830-1880년 대서양 횡단 운송 비용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1914년이 되면 1/4 까지 감소한다. 19세기 후반이면 증기선의 규모와 속도는 두 배가 되었으며 20세기가 되지 대서양횡단은 5일이 일반화하였다.  

 도박도 진일보 하였는데 산업화 시대 유럽에 등장한 카지노는 엄청난 중독거리였다. 이 시기 수학자들은 도박에 대한 통계적 지식을 생성하였고 이로 인해 승률 추정이 가능해졌다. 정부와 기업가들은 하우스 엣지(수수료 명목으로 하우스가 유리하도록 설정한 고객과 하우스의 승률차이)를 이용해 떼돈을 벌어 들였다. 카지노는 지역에 큰 돈이 되었기에 지역 통치자들은 카지노를 내주고 세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카지노가 귀족들의 재산을 탕진하고 문제가 발생하자 19세기 통일민족주의 국가들은 도박을 규제하고 불법화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조치는 작은 모나코 공국으로 카지노가 몰리게 하여 이 지역의 도박산업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카지노 리조트는 다양한 쾌락을 뒤섞어 대중고객에 제공한다. 도박과 술, 마약, 매춘, 관공, 식사, 음악 등이다. 

 카지노의 경우처럼 쾌락은 패키지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중독의 상승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퍼브와 살롱의 주인은 손님에게 담배를 제공하며 유흥거리로 무성영화를 틀었고 갈증을 유발하기 위해 소금에 절인 음식을 제공했다. 오늘날의 놀이공원은 환상과 놀이기구, 공연, 볼거리 , 음식을 같이 제공하며 영화는 스펙터클과 사운드 서사, 섹스를 같이 제공한다. 

 산업시대 원시적인 카카오는 쵸콜렛이르 진화하여 강력한 중독물질로 거듭난다. 카카오는 원래 쓴맛이 강했다. 아즈텍인들은 여기에 고추와 바닐라를 혼합해서 이를 해결했고 유럽인은 설탕과 계피, 향신료를 첨가했다. 하지만 결국 답은 설탕이었다. 1771-1819년 아마존의 카카오 생산량은 증대하여 유럽의 수입량도 같이 커진다. 

 카카오의 절반은 카카오 버터로 유럽인은 카카오를 녹여 음료로 먹었는데 이 경우 기름으로 둥둥떠서 보기 좋지 않고 역했다. 1886년 카카오에서 과도한 전분과 기름을 제거하는 기술이 생겨 코코아 에센스가 탄행한다. 캐드버리 형제가 이를 해냈는데 그들은 카카오 버터도 이용하여 식용 초콜릿을 생산했다. 코코아 가루와 설탕이 혼합되었는데 이것이 초기의 쵸콜릿이다.

 스위스의 다니엘 패터는 농축 우유와 쵸콜릿을 섞에 밀크 쵸콜릿을 만들었다. 그리고 스위스의 로돌프 린트는 콘칭 기법을 활용해 지속적인 롤러 분쇄와 코코아 버터 주입으로 코코아 결정과 설탕 결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부드럽게 녹는 쵸콜릿을 개발했다. 미국의 허쉬는 설탕과 코코아 분말, 코코아 버터를 첨가하여 유지방이 발효될 때 생기는 식욕을 돋구는 신맛의 밀크 쵸콜릿을 개발했다. 허쉬는 크게 성공해 1905년 100만달러 였던 매출이 1931년이면 3100만 달러에 이르게 된다. 이엔 대중이 쵸콜릿에 중독된 탓도 있으나 1차대전으로 인해 쵸콜릿이 전쟁 군수물자로 크게 사용된바도 있다. 허쉬는 쵸콜릿의 이미지를 변모했다. 순수한 놀이이자 건전한 음식, 로맨서와 결부시킨 것이다. 이 이미지는 아직까지 쵸콜릿 하면 떠오르는 것으로 파급력이 강하다. 


4. 도시화와 악덕

 산업화 시대 즈음 부터 서구권에서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도시화가 이뤄졌다. 산업화된 도시에는 이주자들이 밀려들었는데 이들이 바로 악덕업자의 표적이 되었다. 이들은 가장 낮은 계층의 사다리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비루한 일을 담당했다. 혼잡하고 불결한 도시에서 폭력에 노출되고 가난했으며 약탈당했고 소외되었다. 때문에 이런 스트레스와 가난으로 인해 악덕이 스며들기 쉬웠다. 술, 담배, 매춘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도시는 시골에서 온 노동자에게 강한 익명성을 부여했다. 소외로 인한 것인데 이로 인해 오히로 가난한 이주잘는 악덕에 손쉽게 빠져들 수 있었다. 익명성이 비난으로부터 숨겨주었기 때문이다. 도시가 커질수록 노동자가 많이 사는 지역일 수록 악덕은 성행했다. 

 교통, 통신, 산업화, 도시화의 혁명이 맞물리면서 악덕은 더욱 성행하고 접근하기 쉬워졌다. 과거 엘리트들은 농경사회에서 평민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를 위해 텔레트로픽 관습을 생성했다. 이는 의식을 조작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하는 것으로 정서적 당근과 채찍을 이용했다. 종교적 의식, 기념비적 건축물, 전차경주, 연극 공연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당근이 먹히지 않고 저항이 일어나면 권력자는 잔혹한 폭력과 살해를 저지른다. 이런 텔레트로픽 관습은 모든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정서적 충격과 경외감을 제공해 대중을 종속 상태로 유지했다. 

 반면 산업혁명 이후 도시화로 인해 오토트로픽이 등장한다. 이는 자신의 감정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일로 쾌락을 행하는 것이다. 오토트로픽 쾌락이 개인에게 자율권을 부여하게 되면서 이제 당국은 쾌락의 관리가 주요 관심사가 된다 

 대량중독을 가능하게 하는 5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익명성과 접근성, 가격적절성, 광고, 아노미다. 이들은 상당부분 산업화한 도시에서 가능하며 이뤄진다. 


5. 반악덕주의의 등장

 산업화와 도시화로 악덕은 광범위하게 이뤄지게 된다. 식약 작물들은 농장주와 상인에게 이익을 주었고, 운송업자 입장에서는 무게에 비해 매우 이윤이 높았고, 대중에겐 싼 가격에 에너지와 쾌락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에겐 꾸준하면서도 상당한 세금 수입원을 확보해주었다. 오늘날 까지도 정부가 악덕들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보이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전시엔 악덕에 대한 금지가 행해졌다. 1915년 러시아에서는 금주령. 1914년 프랑스에서는 압생트의 판매 금지, 1915년 영국은 맥주 공급을 줄였고 1916년 미국은 군사 구호소에서 헤로인을 금지했다. 1917년 미국은 성병 감염 우려로 기지촌의 홍등가를 폐쇄했고 같은 해 프랑스의 필리피 패랭은 프랑스 군사지역에서의 술 구입을 어렵게 제한했다. 

 빅토리아 시대 들어 각 지역은 혼란스럽기는 해도 악덕을 이해하는 방식과 악덕의 책임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의료 관계자들은 개인의 피해, 사회적 비용, 미래에 대한 위협 등 세 가지 노선을 강화했다. 의학계는 쾌락과 악덕, 중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입장이었다. 

 의학계는 중독성 물질에 일찍 노출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특히 빈곤층이 그러했다. 이들은 가난, 도취, 중독의 상호작용으로 그 계급에서의 탈피가 더욱 어려워졌다.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뇌에서 구조적 차이가 나타났는데 특히, 행동을 통제하는 영역인 전두엽 피질에서 차이가 컸다. 이는 나이가 들어 정신질환과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기 쉽고 즉각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미래의 보상을 쉽게 포기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모든 조건은 위험한 행동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수 세대에 걸쳐 빈곤, 무력감, 가정불화 같은 규제 받지 않은 악덕이 일상화된 문화나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위험한 행동을 할 확률이 높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청소년기의 약물 사용은 더욱 심각한 행동과 인지손상을 불러왔다. 약물 남용이나 폭식 등 어떤 강박적인 행동이나 집착의 수준에 이르면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일자리를 얻기 힘들었으며 낙인이 찍혔다. 이는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해 중독 행동을 더욱 강화해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이에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유해하고 습관적인 쾌락의 악영향을 제한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악덕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주장하는 운동이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이들은 도시화와 악덕의 연계성을 눈치채고 도시 환경의 개선을 주장하기도 했다. 더구나 한창 산업화 중인 국가에서는 문맹률이 획기적으로 떨어져 도시민의 비루한 삶과 중독의 폐해를 언급하는 소설들이 발간되어 높은 경계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860-1960년 사이 국민 국가는 집중적으로 국가를 건설했다. 여기엔 건강한 인구가 필수 요소였기에 이 국가들은 내부 정비와 위생 개혁을 단행한다. 위생 개혁은 선순환 구조를 불러왔다. 인구가 건강할 수록 마약성 진통제와 알코올의 항균작용에 덜 의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악덕이 기술, 통신, 교통 발달로 날개를 달았던 반악덕 운동도 이를 적극 이용해 캠페인을 전개한다. 

 악덕은 역설적이게도 공급이 부족해지면 날개를 달았다. 악덕의 공급 부족은 대개 규제, 징벌적 세금, 금지법 등 이 시기 국가가 단행한 조치로 인함이 많았다. 이는 하나 같이 실패했는데 공급부족으로 더 큰 이윤을 누리게 된 악덕 업자들이 사업을 불법화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금지조치는 악덕 제품의 가격을 급격히 높여 도시 노동자의 악덕 소비를 감소시키긴 했다. 하지만 악덕의 가격 상승은 불법 거래상을 증가시키고 그들은 법외에서 영업하며 부정부패하고 폭력화한다. 가난한 사람은 악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 높은 가격을 부담해야 해 더욱 가난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부족한 의지도 반악덕 주의를 방해했다. 국민 국가는 충분히 상업적 악덕이 초래하는 사회적 결과나 건강 문제를 인지하고 이를 해결한 힘과 통제 방안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악덕은 언급한 것으로 상당히 꾸준하고 거대하며 손쉬운 정부 재원을 마련해준다. 이에 대한 갈등은 정부로 하여금 악덕에 대한 양가적 태도를 견지하게 만든다. 


6. 악덕의 시대

 일련의 반악덕행동주의는 결국 실패한다. 여기엔 국가의 모호한 태도, 자유의지론자들의 등장, 그리고 전쟁의 역할이 컸다. 1910년만 해도 유럽의 웬만한 길거리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며 낚아채는 일이 쉽게 일어났다. 하지만 1950년의 유럽 길거리는 다르다. 상당수의 남성이 흡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2차 대전의 여파다. 전쟁으로 인해 징집된 남성 군인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들에겐 이를 위안해줄 여러 중독성 쾌락 물질이 허용되었는데 담배나 술, 매춘, 마약등이 그것이다. 전시 중 담배는 아예 보급품화 하였으며 작전중이 아니라면 술이 허용되었고, 군대는 병사들을 위해 매춘을 적극 관리하고 허용했다. 또한 전투중 두려움과 공포플 이겨낼 수 있기에 공공연히 마약도 눈감았다. 

 이런 악덕을 경험한 이들이 전후에 사회로 풀어져 일반 사회도 과거라면 비판했을 악덕에 상당히 둔감하게 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도 여기에 한 몫을 한다. 20세기의 기업들은 상품화와 매출 증대의 길을 가기 위해 악덕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것의 대표적 방법이 광고이다. 쵸콜릿의 경우처럼 완전히 긍정적이고 가정 친화적인 이미지를 시도하기도 하고 그것이 어려우면 반대의 일을 했다. 복권의 경우 거액의 상금을 판매금액의 일부를 교육과 노인 복지에 사용하면서 그것을 정당화 했다. 술이나 판매하는 기업조차 책임감 있는 음주 캠페인과 자선 프로그램을 내세웠다. 

 이처럼 다국적 유통업체와 마케팅 회사들은 심각한 습관화와 위험과 해악이 따르는 다양한 제품을 돌러싸고 전략적 공모로 제품의 사용을 만류하는 위장된 설득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자신들의 제품의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꾸준히 중독성을 강화했다. 

 담배업계는 1960년대 들어 흡연의 폐해가 부각되기 시작하자 흡연자가 사망하거나 금연에 성공한 사람들을 대신할 새로운 흡연자를 모집하기 위해 일련의 캠페인을 벌여 청소년의 중독을 조장했다. 이들은 담배의 마취와 진정효과를 위해 멘톨을 첨가했고, 맛을 돋을 수 있고 니코틴의 쾌감을 강조하기 위해 암모니아를 첨가했다. 서구권에서 담배에 대한 제한과 부정적 인식이 강화되자 이들은 무역자유화와 해외투자 기회를 통해 담배에 대한 통제력이 약한 개발도상국 저소득층과 중산층시장으로 진출한다. 

 담배 산업은 현재 첨단 기술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전자 담배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가연성 담배의 해악을 피하기 위함도 있지만 끝없는 향과 맛을 첨가할 수 있어 중독성이 더 강하다. 담배업계는 생각보다 많은 기술과 자본을 요하고 있어 진입 장벽이 높다. 담배업계는 그래서 위기 속에도 안정적 수요와 넓은 세계 시장, 높은 마진율로 아직까지 고공행진하고 있다. 

 해악은 식품업계에도 만연하다. 이들인 만든 식품은 설탕, 지방, 소금 덩어리로 사람에게 강한 쾌감을 제공하나 건강에 해롭고 강박적 과식을 불러 일으킨다. 강박적 과식은 심장 질환과 13가지 이상의 악성 종양을 유발하며 비만율을 높인다. 1980-2015년 사이 비만율은 세계 73개국에서 무려 2배나 늘어났다. 음식중독은 놀랍게도 태아에도 영향을 미친다. 동물의 경우 어미가 임신 중에 고지방을 섭취하면 새끼는 도파민과 오피오이도 유전자 발현이 변화하여 입맛에 맞는 음식만 선호하게 된다. 사람의 경우 지방과 당분이 많은 식단을 먹은 비만 여성의 자녀는 인슐린 저항성이 생기고 비만과 ADHD발현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개인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식품 업계는 싼 가격에 형편없는 음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일부 가난한 계층들은 몸에 좋은 식품을 제공하는 상점이 없는 식품 사막지역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것을 선호하는 인간의 입맛은 당연히 선천적이다. 여기에 어머니의 식습관이 더해지면 아이는 설탕이 든 제품에 일찌감지 노출되어 중독된다. 여기에 지방은 맛있는 식감을 추가하여 설탕의 맛을 보강하고, 거꾸로 설탕은 지방의 느끼함을 감춰준다. 소금은 제품의 단맛을 높이고 쓴 맛 같은 바람직하지 않은 맛을 잡아준다. 천연 방부제인 이 나트륨 덩어리는 모든 스낵 부스러기에 들러붙어 부자연스러운 모양으로 만들어지지만 최대한의 폭발적 맛을 선사한다. 

 식품광고는 무자비한 음식 포르노에 가깝다. 포르노와 음식 광고 역시 뇌의 같은 부분을 자극한다. 광고주들은 화려한 시각 외에도 청각 효과로 효과를 강화한다. 최근 음식 중독은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소위 먹방은 방송인에게 수백만의 팔로워와 좋아요 및 수천 달러의 수익을 선사했다. 


7. 디지털 중독

 20세기 말 인터넷이 등장했다. 초기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인터넷은 독점과 과점, 부의 쏠림을 낳았다. 통신기술에 민감한 악덕업자들도 인터넷에 올라탔다. 현재의 인터넷은 광범위한 중독거리를 자랑하는데 디지털 포르노, 온라인 도박, 비디오 및 RPG 게임, 성인용 판타지 채팅방, 온라인 쇼핑몰, SNS, 웹서핑등이 그렇다. 인터넷 이전 쾌락, 중독, 악덕의 역사는 결국 시간과 공간의 확장의 역사였다고 볼수 있다. 쾌락을 주는 악덕을 팔아 중독 시키기 위해 수많은 식약과 행위들이 무역과 교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인터넷의 등장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 크게 줄었다. 악덕이 그야말로 날개를 펼 수있는 최적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악덕 양상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의 연결성과 이동성은 전혀 새로운 충동 행동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의 발달로 도박, 향정신성 약물, 매춘, 포르노를 비롯한 오래된 악덕과 중독이 다시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나쁜 습관과 새로운 배출구들은 소비자들이 기기나 앱에서 보내는 시간, 소비하는 데이터, 그리고 관련 기업의 매출을 극대화하게 설계되었다.

 게임 개발자들은 어린 게이머를 연구하고 그들의 마우스 클릭을 분석하여 게임 시간을 연장하고 아이템 구매를 촉발하며 강화 계획을 고안한다. 어떤 게임은 한정된 시간만 보상을 제공하여 그 시간동안 게임에 몰입하게 만들기도 한다. 

 디지털에 심각하게 중독된 사람들은 하루 9-11시간 SNS를 사용한다. 다른 중독처럼 디지털 중독도 정적강화와 부적강화를 사용하는데 좋아요와 리트윗 메시지, 인기 순위등이 정적 강화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 같은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 부적강화에 해당한다. 

 2007년 스마트폰과 테블릿이 등장하면서 모바일 시대가 열린다. 디지털 중독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2015년 미국의 10대 소녀의 92%가 매일 온라인에 접속했으며 이중 24%는 거의 항시 접속했다. 10년 전이니 지금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스마트 폰은 기분을 돋우는 앱으로 가득찬 휴대용 자판기에 가깝다. 이는 소비자의 자율성이라는 양의 탈을 쓰고 실제로는 늑대처럼 사용자를 중독에 빠뜨리고 본인들은 이득을 얻는 구조다.

 식품공학자처럼 SNS와 비디오 게임 개발자들은 쾌락의 전통적 기술을 응용한다. 우선 사용자가 즉시 도달할 수 있는 수준보다 약간 높고 강력한 목표를 제공한다. 또한 예측 불가능하나 자극적 피드백을 주고,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숙달된다는 감각을 주며, 서서히 더 어려워지는 과제나 레벨을 제공하고, 해소가 필요한 긴장감을 주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과 연결된다는 사회적 연결을 준다. 

 스마트폰 중독의 주된 위험은 개인적 대화, 수면, 운전, 공부, 사색, 운동, 일 등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활동에 대해 주의가 끊임없이 분산된다는 점이다. 이래서는 친밀감, 건강, 안전, 지식, 창의성, 전문성 등 사회적으로 필요한 덕목을 몰입하여 얻기가 불가능하다. 이용자는 결국 돈과 시간, 현실에서의 성취와 만족감을 상실하고 전자기기로 인해 인내심 감소 등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8.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 까

 저자는 책에서 언급한 쾌락을 제공하는 악덕을 팔아 사용자를 중독에 이르게 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변연계 자본주의라 칭한다. 변연계 자본주의란 소비자들에게 강렬한 뇌 보상을 주어 파괴적인 습관을 만드는 대부분의 내구성 없는 상품과 서비스의 설계, 생산, 마케팅, 전 세계적 보급에 해당한다. 여기서 자유로운 현대 기업의 거의 없을 거란 생각이다. 

 그들의 목표가 이윤 추구인 만큼 기업은 꾸준하고 구입해주는 소비자를 원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독시키는 것이 필수다. 현대 국가는 자본과 결탁해 이런 일련의 것들이 환경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심각한 경우 개인의 삶을 파멸시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국가 경제 성장과 세수에 대한 유혹으로 인해 이를 묵과한다.

 물론 이를 막기 위해 기업이나 정부는 중독을 방지하는 캠페인이나 예산을 사용하여 이미지 세탁 및 폐해를 막는 척을 한다. 하지만 모든 돈과 이문은 기업과 엘리트가 얻어가고 그로 인한 부정적 효과인 공동체의 파괴, 환경 파괴, 개인의 파멸을 모두 사용자의 몫이다. 하지만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중독은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다. 유전적으로 따지면 그러한 행위와 초기 환경을 제공한 부모와 기업의 몫이며, 이를 용인한 사회와 기업의 책임, 그 폐해를 충분히 교육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중독의 폐해를 모두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일 발달하고 과학 기술이 발달하며 쾌락을 제공하는 악덕 제품은 더욱 강력해지고 심지어 맞춤형으로까지 진화할 것이다. 그런 반면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의 상실과 양극화, 인지적 편향은 개인을 더욱 소외시키고 고립시켜 더욱 쾌락 물질에 의존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 것이다. 도시화는 더욱 강화될 것인데 이는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중독을 강화한다.

 저자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보는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손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독도 세계적 과제라고 본다. 한 나라와 정부가 소비자와 환경에 좋은 제품을 생산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선택할까. 전체가 나서야 할 문제고 어렵다고 본다. 또한 사람들에겐 위안 역시 필요하다. 20세기 초반 무조건적 금지가 오히려 악덕을 키웠다는 역사적 증거도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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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4-05-14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독 분야가 꽤 세금이 짭짤하기에 정부가 손을 써 중독 시장을 방지할지 의문입니다. ^^
 
지리를 알면 보이는 것들 - 공간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가
정은혜 지음 / 보누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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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고교 때 가장 좋아한 과목은 지리였다. 난 남자치곤 무척 공간 감각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면허증도 힘들게 땄고 장소도 웬만히 가선 길을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지금도 지도를 잘 보지 못하고, 스마트폰으로 네비를 켜고도 도보로 찾는 건 무척 힘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리가 좋았고 심지어 잘하기까지 했다. 

 그건 지리가 단순 자연이나 공간에 대한 것 보다는 인문적인 내용을 많이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내가 좋아했던 부분도 이런 부분이었다. 공간이나 위치와 관련하여 그것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부분에 재미를 느꼈던 것 같고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 본 책은 '지리를 알면 보이는 것들'은 지리학에 대한 여러 학문적 동향과 여러 개념을 잘 정리해서 모처럼 지리 공부를 기본으로 돌아가 충실히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책을 쉽게 잘 썼다.

 지리학은 크게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나뉜다. 자연지리를 지형학, 생물지리, 해양지리. 지질학, 기후학, 토양에 대한 것이다. 인문 지리는 도시지리, 문화지리, 관광지리, 사회지리, 경제지리 등 공간조직 인간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즉, 인간이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공간의 형태를 연구하는 것이다. 

 공간은 물리적 실체나 틀을 의미하며 대개 광범위한 규모를 의미한다. 지역은 동질적 공간 단위를 의미하며, 장소는 어느 한 지점으로 의미가 부여된 구체적인 공간이다. 장소가 모이면 그것이 지역이 되며 지역이 모여 공간을 이루는 형식이다. 장소는 자연환경적 요소와 인문학적 요소 간의 상관관계에 따라 만들어지고 항상 역동적으로 진화한다. 

 장소는 지역 주민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장소는 주변의 물질적 복지와 삶의 가치, 생활 양식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장소는 문화적 또는 감정적 상징의 공간이며 장소는 변화와 혁신, 저항과 갈등이 표출되는 공간이다. 

 인간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우연적 요소들을 그들 자신의 필요해 의해 하나의 체계적인 상호 연관된 요소들로 변형시킴으로써 지역의 특성을 만들어 간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 특정 지역은 다른 지역과 구분될 수 있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게 되며, 이 지역적 특성은 결국 그 지역 주민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게 된다. 결국 장소는 공간의 자화상이며 그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참모습이 왜곡없이 가장 솔직하게 반영된다. 

 지리에는 세계 시스템 개념이 있다. 이는 경제적인 것으로 세계 시스템이란 정치 경제적으로 경쟁 관계이거나 상호보완적인 연관성이 나타나는 상호의존적 구조를 말한다. 이 시스템하에서 세계는 중심지역, 주변지역, 준주변지역으로 구성된다. 핵심지역은 교역을 주도하고 첨단기술을 통제 보유하며,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 서유럽, 북미, 일본이며 식민주의로 정체경제적으로 주변 지역을 착취하며 성장했다. 주변지역은 종속적이고 불리한 교역, 낙후된 기술, 낮은 생산성을 보이며 아프리카와 중남미 지역이다. 준주변지역은 핵심지역과 주변지역의 중간 성격으로 개발도상국이 여기 해당한다. 

 핵심지역의 내부적인 발전은 주변 지역이 제공하는 식량과 원료로 가능하다. 핵심지역에서 생산하는 공산품의 시장으로 주변지역이 이용된다. 주변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생산성에 상대적 우위가 있는 물품만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전락한다. 식민지 산업경제체제는 핵심지역에 종속된다. 실제 사하라 이남 55개국 중 48개 국가가 국가 수입의 절반을 차, 코코아, 커피 3개의 작물에 의존한다. 

 주변 지역은 핵심지역에 의해 3가지로 분류되는데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상업작물 위주의 물품을 생산하는 지역, 아프리카 자체의 지역 시장을 대상으로 물품을 생산하는 지역, 자급자족적 생산체제를 통해 노동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주변 지역은 제국주의와 식민정책으로 자본과 교통, 운송, 경영, 뉴스, 통신, 언어, 종교, 과학, 건축, 도시계획 등의 거의 전 분야를 핵심지역에 크게 의존한다. 그리고 핵심지역이 식민과정 혹은 그 이후에 여러 과정을 통해 주변지역에 건설한 항구, 철도 등은 식민지의 내부적 재구조화에 영향을 준다. 

 주변 지역은 식민지에서 1960년대 대부분 독립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경제적으로 핵심지역에 종속되어 있다. 여기엔 거대 기업들에 의한 신식민주의가 작동한다. 초국적 기업은 90%이상이 핵심지역에 본사가 있다. 이들은 부정적 역할이 많다. 우선 국민정부의 동의없이 상품, 서비스, 자본을 이동시켜 국민국가의 힘을 약화시킨다. 둘째, 자체내부시장의 힘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교란해 자유시장경제를 파괴한다. 셋째, 개발도상국의 환경을 파괴한다. 넷째, 강한 힘으로 주변 지역의 경제상황과 법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경한다. 

 경관은 인간과 자연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으로 도출된 독특하고 실체적인 결과물이다. 경관은 자연 경관과 문화경관이 있다. 문화경관은 인간의 여러 문화요소가 매개체인 자연과 융화되어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문화경관은 다섯 가지가 있다. 

1. 일상 경관

 인간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경관으로 골목길이나, 시장, 대학가등 일상의 공간이다.

2. 상징적 경관

 특정 경관을 직접 창출하거나 재정적으로 후원한 사람들이 일반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나 신념을 내재한 경관이다. 특정 양식으로 건축한 탑이나 건출물, 동상 등이다. 

3. 힘의 경관

 무력과 자본, 종교적 권위를 내포한 경관이다. 

4. 절망의 경관

 인간의 절망적 감정이 담긴 경관이다. 슬럼가나 판자촌, 노숙자가 머무는 곳이다.

5. 버려진 경관

 자포자기, 학대, 자본의 철수, 파괴, 폭력의 장소다. 시골의 버려진 집, 폐교 등이다. 


 경관의 텍스트화는 경관이 마치 텍스트처럼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 쓰이고 읽힌다는 견해다. 경관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 경관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미가 있으며 경관에 새겨진 의미를 소비하는 독자가 존재한다. 

 영역성은 일반적으로 개인이나 사회 특정 집단이 특정한 장소나 공간적 영역에 지속적인 집착을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역성을 지닌다. 영역은 우리에게 안정감, 안전함, 정체성 등의 의미를 주기 때문에 각자는 영역에 강한 집착을 갖는다. 반면 근접학에서는 영역성은 본능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공간에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도시는 인간이 수렵채집 경제에서 농경으로 변화하며 잉여생산물의 발생으로 생겨났다. 초시 세계제국은 도시를 이뤘으며 산업화 이후 도시의 발전은 본격화했다. 2050년에는 세계 인구가 94억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64억이 도시에 살 것으로 예상된다.

 도시는 특유의 생활방식을 갖는다. 우선 사회구조의 변화다. 인구의 집중과 분산, 인구 구성의 변화, 인구 이동 및 유통의 증대, 토지 이동의 변화 교회화, 계층 및 계급 구조의 유동화와 균질화, 기관 및 시설의 집중과 분산, 가족형태의 변화다. 다음은 생활 구조의 변화다. 집단 참가의 다양화, 근린관계의 희박화와 일면화, 가족관계의 단순화와 개인화, 생활기능의 점진적 제도화다. 마지막은 의식 구조의 변화로 도시적 성격의 형성으로 개인주의, 세계주의, 표준 주의가 생겨난다. 시민의식이 형성되고, 개인이 해체되며, 정신 장애와 자살, 비행, 변화의 다발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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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어스 -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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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대 독일 히틀러의 나치는 정권을 합법적으로 획득했다. 이 정치적 결과의 여파는 2차 세계대전이다.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 군인과 민간인 수천 만이 죽었다. 그리고 그 중 전쟁 당사자도 아닌 유럽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은 무려 수백 만이 학살 당했다. 우린 대개 이것을 독일인이 자행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유대인의 학살에는 상당 부분 현지인의 적극적 협력이 있었다. 책 '블랙 어스'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 같은 입체적인 분석이 담긴 책이다. 우선 히틀러에 대해 언급한다.


1. 히틀러의 세계관

 히틀러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인간은 동물의 하나로 자연의 풍요를 차지하려는 투쟁에서 차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차지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본성에 반하는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겐 약자인 다른 이들의 생존을 허용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범죄다. 그는 낙원을 창조의 조화가 아니라 인류의 투쟁으로 생각했고 이는 기독교적 열명을 생물학의 리얼리즘과 결합한 것이다. 

 그는 인간 종족이 생물종과 비슷하다 생각했고, 여전히 하등종족에서 고등종족들이 진화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등종족과 고등종족이 교배가 가능하지만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었고, 종족투쟁으로 유사종족이 짝을 이루고 다른 열등 종족은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칙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국가나 민족도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우수한 종족이 자연 투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히틀러에게 2차대전은 독일 국가의 승리라기보다는 우수한 종족이 자연법칙을 통과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는 만약 독일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독일 민족이 약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런 왜곡된 투쟁적 자연관을 가진 히틀러에게 유대인은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였다. 히틀러에게 인간의 원죄는 정신과 영혼의 범죄가 아니라 다른 인간 종족을 투쟁의 대상이 아닌 협력하는 동료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지구와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의 목적은 자연 투쟁이 아닌 인간의 질서로 도치시키는 초자연적 관념을 생성해 냈는데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그런 일련의 것들이었다. 

 히틀러에게 윤리학 같은 것은 그 자체가 오류이며 유일한 도덕이라 할 만한 것을 자연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종족에 대해 충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비종족적인 것은 모두 유대적인 것이 되며 보편 관념은 유대인의 지배도구가 된다. 이 보편 관념은 비유대인의 정신에 침투하는데 이것은 그 종족 공동체의 정신을 약하게 만들어 유대인을 이롭게 할 뿐이었다. 

 이런 유대인의 왜곡으로 인해 강자가 약자를 굶겨 죽이는 적자생존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오히려 최적자가 희생되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유대인이 존재하는 한 독일인 같은 강자들은 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차 대전 때 독일이 패배한 것도 세상의 전체구조에서 유대인에 의해 어떤 부분이 왜곡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만약 1차대전 개전 초기 독일이 효과적으로 유대인을 제거했다면 독일은 패배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독일의 지배를 위한 투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열등한 종족을 굶겨 죽여 그들의 땅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이다. 강자로써 독일인은 다른 열등종족을 지배해야 하며 그들을 유대인에게서도 해방시켜야 한다. 즉, 해당지역을 점령하고, 그 지역의 유대인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히틀러의 정책은 식민주의이면서도 반식민주의의 모순을 띄게 된다. 

 히틀러는 과학기술도 부정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과도한 발전은 인간의 생존력을 지나치게 높여 적자생존이라는 투쟁의 결과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과학기술의 발전은 종족투쟁에서 종족의 우월성을 보인다는 면에서만 유효했다. 히틀러는 농학을 부정했는데 그것이 자연에 개입하여 더 많은 땅을 취하지 않고서도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하여 투쟁 논리를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과학은 한계가 분명하고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잔혹한 자연을 대면하지 못한다고 보았으며 그들을 자연이 가혹하게 작용하는 이질적인 곳으로 보내면 정글의 법칙에 굴복할 수 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히틀러에게 그곳은 시베리아 였으며 실제로 히틀러는 초기 유대인을 학살하기 보다는 그런 곳으로 보내버려서 치워버리려는 생각을 했었다.

 유럽에 대한 히틀러의 세계관도 독특하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인정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독일과 피를 나눈 우수종족이고 대제국의 건설자로 이를 입증했다. 그는 세계를 구분했는데 우랄산맥까지의 유럽대륙의 건설은 영국과 미국이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으며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영미와의 아마겟돈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독일은 1차 대전 당시 영국에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히틀러는 이것이 식량을 확보하여 남에게 주지 않을 능력으로 일종의 지배력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넓은 유럽 대제국을 확보하는게 우선 과제였다. 

 유럽제국의 건설로 눈을 돌린데는 독일이 차지할만한 식민지가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관련한다. 독일은 강했으나 늦게 통일한 국가로 남은 땅은 유럽 뿐이었다. 하지만 유럽대륙은 이미 꽉 찼었는데 인종주의 관념이 그 해결책이었다. 이는 기존 유럽제국의 시각으로 이미 원주민이 있음에도 그들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었다. 독일에겐 이 대상이 동유럽인이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벨라루스인 등이다. 러시아 슬라브 족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이런 열등종족들은 국가를 건설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점령할 때 해당 국가를 철저히 파괴한다. 마치 전에 없었던 것처럼. 이들이 현재 만든 정부는 환영으로 유대인이 만든 보편관념에 의한 껍데기일 뿐이다. 러시아는 본질적으로 독일인 상층계급과 지식인이 만든 창조물이었다. 우크라이나 인은 더 우습게 보아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인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 7가지 정책을 추진한다. 일당 국가, 폭력 전문 집단 생성, 정복지를 무정부 국가 상태로, 제도들의 이중 교배, 독일 유대인의 세계화, 전쟁의 재정의다. 


2. 소련

 독일은 다른 제국에서 토지를 강탈하는 재식민적 경향을 , 폴란드는 다른 제국들을 해방하여 그 식민의 이탈에 기여하는 탈식민적 경향을 띄었다면 소련은 내부식민국가를 지향했다. 스탈린은 놀랍게도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토착민에게 쓴 정책을 자국민에게 쓰고 싶어했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단절되었다. 하지만 체제 경쟁으로 더 성공해야 했기에 유일한 희망은 인적자본을 포함하여 소련 국경안의 자본을 잘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부식민화의 핵심은 농업집단화로 사유지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일부는 농업 노동자, 나머지는 도시나 수용소 노동자가 되었다. 이는 거센 저항과 대규모의 기아를 초래한다. 특히 우크라나이 지역에서는 대량기아가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하 현지인들은 소련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게 된다.

 내부에 우크라이나 인들이 상당수 있었던 폴란드는 이런 기아사태에도 불구하고 지원이나 비판을 하기는 커녕 자국의 이익을 위해 1933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우크라이나 인들은 폴란드에 대해서도 상당한 배신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인들에게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그 체제를 부수는 것이 희망이 된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사정은 히틀렁게 상당한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 인들을 열등종족으로 보아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3. 폴란드

 폴란드는 1차대전의 결과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지위는 크게 불안했다. 서로는 독일이 동으로는 소련이 있었다. 폴란드는 균형외교를 추구하며 소련과 독일 양자와 모두 불가침 조약을 맞는다. 동상이몽이었다. 이 상호간 불가침 조약에 대해 폴란드는 현상유지에 대한 양국의 약속이라 믿었고, 독일은 폴란드가 소련과의 군사행동 협력에 나섰다고 보았으며, 소련은 폴란드가 소련의 협력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소련은 1939년까지 자국내 폴란드 인들을 모두 정화해버린다. 폴란드는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이렇다할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 

 히틀러는 폴란드 인을 우습게 보았음에도 2차대전 전까지 폴란드를 협력자로 삼으려 했다. 이는 1차대전의 아픔 때문이었는데 당시 독일은 서로는 프랑스 동으로는 러시아를 모두 상대해 패퇴했기 때문이다. 이런 독일의 지정학 때문에 히틀러는 폴란드를 협력자로 하여 동쪽의 안정을 도모하고 소련을 같이 상대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런 제안은 현상 유지를 위한 폴란드에겐 위험천만한 생각으로 그들은 이런 독일의 제안을 계속하여 거절한다. 폴란드에게도 독일처럼 반유대감정이 있었다. 폴란드내 유대인은 3백만으로 가장 큰 유럽 내 유대인의 터전이었다. 그만큼 자국내 유대인의 영향력도 컸고 이는 대공황 이후 더욱 강해진다. 


4. 오스트리아

 인구 5300만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1차대전으로 붕괴한다. 제국은 여러 개로 쪼개졌는데 오스트리아는 수도 빈과 독일어권 지역으로 인구 700만의 소국이었다. 제국의 가장 부유한 곳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었다. 광대한 국내시장도 붕괴하였다. 그래서 신생 오스트리아 인은 정체성이 없었고 자신을 독일인이라 생각하였다. 

 베르사유조약은 이런 위험성을 인지하여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 금지를 명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히틀러는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싫어하면서도 통합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대공황 때 농업국인 오스트리아는 상당한 고난을 겪었지만 독일은 이를 먼저 극복하고 오스트리아 노동자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이에 오스트리아는 큰 감명을 얻는다. 

 독일은 군사적 팽창 정책으로 막대한 재정 적자에 시달린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대공황으로 인한 보수적 경제 정책으로 외환과 금 보유가 충실했다. 이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오스트리아는 동맹인 이탈리아로부터 버림을 받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도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에 슈슈니크 정권은 히틀러의 침공협박에 스스로 나라를 지킬 의사가 없다고 표명함으로써 자연스레 독일에 합병된다.  

 이후의 일은 놀랍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나치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홍위병이 되어 나치의 구호를 외치고 유대인을 폭행하고 찾아내어 거리에 무릎을 꿇리고 청소시키는 망신주기를 시킨다. 재산도 강탈하는데 이 충격으로 오스트리아 내 유대인은 수백명이 자살한다. 


5.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티아는 독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산악지대를 베르사유조약에서 요구한다. 이는 승인되었고, 그들은 다민족국으로 자유주의 헌법을 만든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국의 부유한 지역을 차지해 유럽 최고의 군수산업국이 된다. 

 히틀러는 이를 탐내 체코 침공을 선언한다. 1938년 뮌헨에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지도자들은 놀랍게도 이 침공을 승인하여 체코가 독일에 영토를 이양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체코의 유대인들은 자신의 국가가 파괴되고 재산권 상실의 공포에 빠진다. 그리고 이는 실현되어 독일은 체코 내 금융, 산업 자산의 1/3을 헐값에 탈취하다. 


6. 폴란드 합병

1938년 11월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상당부분을 병합한다. 오스트리아의 재정과 체코의 무기 여기에 900만의 주민이 제3제국에 추가되었다. 독일은 폴란드의 영토 양도를 원했고 그 대가로 소련과의 전쟁, 폴란드내 유대인 문제 해결, 우크라이나 지역 영토를 약속한다. 폴란드는 전쟁을 원치 않았기에 이를 거부했고,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에 폴란드를 끌어들이려는 지난 5년간의 노력을 뒤로 하고 침공을 결정한다.

 히틀러는 1939년 8월 20일 소련과 리벤트로프-밀로로프 협정을 맺는다. 핀란드, 발트3국, 폴란드를 소련과 독일이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폴란드는 서부는 독일로 동부는 소련으로 쪼개지게 된다. 히틀러는 서부 폴란드에서 인텔리를 몰살한다. 그리고 1941년 유대인은 게토에 수용한다. 히틀러는 이들을 프랑스를 격파한 후 그들의 식민지인 마다가스카르로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쉽게 격파했으나 해상을 장악한 영국에 의해 대규모 해상운송이 불가능했다. 이에 선회하여 소련을 침공해 유대인을 보내버릴 장소로 시베리아를 선정한다. 

 동부 폴란드에서는 소련에 의해 거의 30만 폴란드 시민이 굴라크로 추방되었다. 소련의 입장에선 폴란드 장교단이 위협이었다. 그들은 나라의 군사, 교육, 정신적 토대였다. 그래서 모두 제거한다. 폴란드 남자가 사살되면 그 가족은 추방되거나 착취되었다. 소련은 민족차별을 범죄로 규정한 나라로 공식적으로 반유대주의는 범죄였다. 하지만 소련의 반자본주의적 행태가 유대인을 괴롭힌다. 소련은 폴란드 통화를 폐지시켜 유대인의 재산을 소멸시켰고, 이로써 채무도 같이 소멸되어 주요 채권자인 유대인에 큰 손실을 안겼다.  


7. 홀로코스트

 독일이 동유럽을 병합하고 침공하며 히틀러가 사전에 국내에 조직했던 특수임무단이 위력을 발하게 된다. 이들은 1941년 독일 군경과 함께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수많은 민족주의자와 협력하게 된다. 이 집단들은 6개월간 같이 집단 학살 기술을 개발한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대량학살을 억압당한 민족들이 추정상의 지배자인 유대인에 터뜨린 정의로운 분노로 포장했다. 하지만 동유럽 현지에서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히틀러의 생각과는 다르게 종족적 동기가 아니라 정치적 동기였고 극히 일부에게만 향했다. 

 이에 당황한 히틀러는 과거 소련에 점령당했다 독일에 점령당한 이 이중점령지에서 소련에 점령된 경험을 이웃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꾸려 한다. 현지인들 역시 소련 점령하에서 협력한 경험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존과 죄를 씻기 위해 독일에 협력한다. 마치 조선에서 친일파가 미국에 빠르게 부역한 것과 마찬가지다. 

 독일은 유대볼셰비즘에 입각해 공산주의는 결국 유대인의 작품이고 유대인을 공산주의자로 정의하면서 사실상 소련 부역자들을 대개 용서한다. 그 결과 독일과 현지인의 합작으로 대량학살이 가능해지게 된다. 

 폴란드에서는 지역에 따라 학살의 양상이 크게 달랐다. 폴란드 북동부는 유대인 학살이 적었던 반면 남동부에서는 학살이 많았다. 남동부에는 우크라이나 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이들은 국가설립을 위해 나치에 기대하는 것이 많았기에 협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현지인들은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을 죽임으로써 정치적 사면을 받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재산도 하나의 목적이었다. 유대인이 사라짐으로써 그 재산의 강탈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동유럽을 점령하면서 기존 국가를 파괴하고, 지식 계층과 군을 몰살한다. 그리고 이런 강압적 분위기에서 상당수 현지인들이 소련에 협력하게 되었으며 재산상의 손실도 컸다. 때문에 후에 독일이 점령한 이런 이중 점령지에서는 소련의 재산 몰수와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결합으로 비 유대인이 유대인을 죽일만한 물질적 유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물론 점령이 주민의 상당수는 나치의 기대와 다르게 분별없는 반 유대주의자라 종족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어디나 소련에 적극 협력한 경찰이나 의용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수만에 이르렀다. 

 이런 이중점령지에서는 이 같은 요인으로 인해 유대인의 사망률이 무려 97%로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놀랍게도 이는 소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소련의 영토를 상당히 많이 점령하는데 이들은 상당히 나치에 협력적이었다. 이들은 공산정책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기아를 겪었으며 소수 민족의 경우는 몰살당하기도 하였다. 소련의 정책은 내부간의 고발 문화를 권장하였는데 이런 상태에서 소련시민에게 나치에 대한 협력은 소련정책 협력이라는 범죄에 대한 손쉬운 세탁이었다. 그리고 소련시민들은 나중에 소련 세력이 회복하자 바로 다시 판을 바꾸게 되고 대조국 전쟁으로 자신들이 유대인 이웃을 학살한 행위를 덮어버리게 된다. 1941년말까지 나치가 소련 시민의 협조를 받아 소련 점령지에서 학살한 유대인의 수는 100만에 가깝다.

 독일의 수용소는 처음엔 학살장소가 아니었다. 아우슈비츠 정문의 문구처럼 이 장소는 강제 노역의 장소였다. 독일에게 사로잡힌 유대인의 운명은 독일의 사정에 따라 달랐는데 노동력이 절실할 때면 잠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노동력보다 식량이 절실할 때면 살해되었다. 아우슈비츠는 악명이 높지만 사실 대부분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장소는 트레블린카, 베우제츠, 소비부르, 헤움노다. 

 혹자들은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전쟁 중 학살을 몰랐다고 하지만 당시 학살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는 불가능하다. 독일 내에서 학살이 처음부터 정해졌던게 아닌 만큼 수차례의 정책적 토론이 있었고, 전장과 수용소에서 학살에 참여한 이들의 편지가 가정으로 송부되었다. 심지어 일부 가족은 수용소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독일은 거의 전체적으로 학살에 대한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이를 인지했다.

 독일의 학살은 3가지 방식으로 변화하였는데 처음엔 구덩이 위에서 사살하였고, 나중엔 기차칸에 가두고 내연 기관의 배기가스를 투입하여 질식시켰고, 마지막은 가스실이었다. 가스실에서 사용한 시안화수소는 원래 폴란드인 수감자 수용소 훈증에 사용했던 것이다. 나중엔 소련 포로 살해에 그리고 유대인 살해로 이어졌다. 

 유대인의 학살엔 국가파괴도 관련한다. 나치의 점령지중 국가가 파괴된 곳에서 학살은 쉽게 자행되었다. 반유대주의가 있었을 지언정 국가가 존속한 곳에서는 그 시민을 보호하는 기관과 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덴마크와 에스토니아는 모두 나치에 점령당했는데 에스토니아는 사전에 소련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고 덴마크는 나치에만 점령당해 그렇지 않았다. 나치는 덴마크 국가 파괴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덴마크는 주권을 유지하며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일부 유대인은 동유럽에서 노동력 부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동부유럽은 2차 대전 당시 농업지대로 기계화는 없었고, 인력과 축력에 의한 노동집약적 농업이었다. 대공황의 강타로 시장에서 분리되어 자급자족적 농업이었다. 독일은 소련 침공 때 운송수단으로 수백만 마리의 말을 사용했으며 동유럽에서도 말을 마구 잡이로 징발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독일 내 노동력이 부족하자 처음엔 고용의 형태로 나중엔 징발과 강제의 형태로 동유럽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수백만의 동유럽 사람들이 독일로 끌려가게 되었으음로 동유럽의 농가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경험하게 된다. 때문에 나치를 피해 돌아다니는 유대인 아이들은 노동력의 수단으로 구원의 손길을 얻기도 한다. 

 그외에도 결혼이나 결혼의 전망, 성적 욕구 등은 유대인에게 또 다른 생존의 기회가 되었다. 그 외에도 일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유대인을 구조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대인을 집안에 들이는 것은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였고, 반면 고발하면 부족한 식량상황에서 설탕과 소금, 보드카등을 얻을 수 있었으며 근심걱정이 사라지게 되었다. 때문에 보호보다는 밀고가 보다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8. 미래의 홀로코스트

 히틀러는 생활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량학살로써 지구를 회복하겠다는 계획과 독일인 가족에게 더 나은 삶을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처럼 생활 수준이 삶과 혼동되면 부유한 사회가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더 가난한 사람을 공격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인류는 이런 위기를 겪고 한다. 녹색 혁명이후 전 세계 식량은 안정되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2010년 농산물 가격이 치솟자 중동에서는 항의 시위와 혁명, 민족 정화가 자행되었다. 때문에 장래의 식량 부족은 국가의 엘리트로 하여금 히틀러처럼 정치와 과학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지 선택하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산업화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 위기를 겪고 있다. 현재 1.5도가 상승한 상태가 이대로라면 금세기 안에 4도의 상승도 예측된다. 이런 기후 위기로 전례없는 폭풍이나 가뭄에 발생하는데 이는 기본적인 자원의 안전에 대한 예상을 뒤흔들게 되고 사람들은 이에 히틀러식의 정책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기후 위기는 세계적 문제이므로 세계적 해법을 요구하나, 일부 지역에서는 그 세계적인 적을 규정하는 것이 한 가지 확실한 해법이 된다.

 아프리카는 지금도 경작 가능한 토지와 식수가 부족하다. 하지만 허약한 소유권과 부패한 정권, 그리고 전 세계 미개간 토지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 아시아 식량 안보의 핵심 계획이 되어 버렸다. 현재 중국은 일인당 경작지 공급이 세계 평균의 40%에 불과하고 이 마저도 연간 100헥타르씩 감소하고 있다. 중국은 식량 자급이 불가능한데 과거 중국 공산당은 대규모 기아와 경제적 풍유를 모두 가져온 바 있어 식량안보에 무척 민감하다. 그래서 중국은 아프리카를 자국의 식량 안보의 해결책으로 생각한다. 

 식수도 마찬가지다 80억 인구중 10억은 생존에 필요한 하루 1.9리터의 물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10억은 위생에 필요한 하루 19리터의 물을 확보하지 못한다. 중국의 일인당 물소비는 아직 세계 평균의 1/3에 불과하다. 중국인 다수가 의존하는 물은 빙하가 녹은 물이며 중국의 민물 절반과 지하수 상당수가 이미 오염으로 사용이 어렵다. 향후 온난화로 인한 물부족으로 중국을 물이 풍부한 시베리아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 

 중동에서는 국가가 약하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있다. 이들은 오랜 기간 미국인과 영국인, 유럽인을 전 지구의 적으로 규정해왔다. 이들의 이런 반세계적 사고는 전 지구적인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에 용이하다. 중동에서 기후 위기 및 경제위기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위기가 발생하면 유대인은 손쉬운 희생양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위기의 해결책으로 의외로 국가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홀로코스트는 국가가 파괴된 곳에서 자행되었다. 이런 저런 불만이 있어도 국가는 권리의 인정과 보증, 보호 역할을 하기에 이런 현상을 지역에서 방어한다. 또한 복지국가도 중시한다. 성공적 복지국가는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한 국가내 극우주의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낙후되는 불평등이 심한 경우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기술의 꾸준한 투자도 방법이다. 히틀러는 과학을 부정했지만 현대의 과학기술은 기후 위기 시대에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물부족은 해양담수화 기술의 발전으로 해결이 가능할 수 있으며 식량문제도 수직 농업이나 배양육 등의 문제로 해결이 가능할 수 있다. 저자는 연대와 우리의 과거로부터의 학습도 강조한다. 현재의 우리는 생각보다 히틀러로부터 멀리 나가지 못했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우리가 연대하지 않고 특정 세력을 전 지구의 희생양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히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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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4월 20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가 이미 2022년에 돌아가셨으니 난 고아가 된 셈이다. 내 나이가 이미 한국 중위 연령을 넘어섰기에 정확히는 '고독한 아저씨'가 된 셈이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한국전쟁을 경험하신 큰아버지가 그런 소리 말란다. 당시 전쟁 이야기를 짧게 하시면서 전쟁 고아가 무척이나 많았다고. 

 우리 엄만 2009년에 뇌출혈로 쓰러져 14년간 온전치 못한 마음과 신체로 와병하다 코로나 19를 계기로 가족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런 엄마의 병수발을 가장 많이 든게 우리 아버지다. 자식 둘은 결혼해서 지방으로 나가 가정을 꾸린지라 아버진 요양원과 요양병원에 의지하긴 했지만 어머니를 가장 많이 돌보셨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진 그제서야 당신 몸을 돌보시기 시작했고, 갑작스레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엔 다리가, 그리고는 허리가 그리곤 귀가, 그리곤 가슴이 아프셨다. 결론은 폐암이었다. 확진을 받았을 땐 뭔가를 해보기엔 상당히 늦은 시점인 작년 말이었다. 의사는 3-4기를 운운했지만 내가 듣기엔 4기 같았다. 그리고 어느 암이나 그렇지만 폐암 4기는 생존률이 10% 미만이다. 의사는 항암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이런 경우 평균 4개월에서 1년 정도 생존한다고 하였고 그 말처럼 아버진 진단 후 4개월 정도 살다 돌아가셨다. 아버진 적극적인 치료를 원하지 않으셨다. 엄마의 경우처럼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1-2월엔 내가 병원에 통원시켜 드리며 돌보았고, 상황이 악화되자 아버진 동생 집에 머물며 2-3월을 보내셨다. 동생은 목포에 산다. 3월에 그 먼 목포를 아버지를 보러 어린 아들을 데리고 주말에 내려가곤 했다. 말기 암 환자는 하루하루가 달랐다. 3월 초만 해도 식욕이 크게 감퇴하고 고통을 겪어서 그렇지 같이 식사도 하고 손자를 훈육해주시기도 하고, 같이 이야기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3월 말이 되자 하루 종일 누워계셨고 고통이 너무 심하고 먹기는 커녕 진통제마저 먹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섬망이 심해져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리고 중환자실과 호스피스를 2주 간 전전하다고 돌아가셨다. 동생 부부는 집에서 아버지를 돌보며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며 죽음을 향해가는 어려운 과정을 매일 보았다. 평생 갚지 못할 빚을 동생에게 지게 되었다.

 폐암은 급사가 많다. 폐가 갑작스레 멈추면 사람도 갑자기 죽기 때문이다. 4월 20일은 중환자실에서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 모처럼 면회가 가능한 날이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비가 내려 막히는 고속도로를 따라 목포로 향하고 있었다. 임종을 보러 가려는 것도 아닌 그저 면회였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셨단 연락을 받았고 반쯤 내려가던 길을 되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친척들과 가족, 직장에 연락을 하고 상조에 연락을 하고 동생과 장례식장을 잡았다. 그렇게 장례식장에 도착해 계약을 하고 빈소를 차리는데 무척 피곤했다. 8시간을 운전했다.

 장례는 짧게 3일을 잡았다. 최근 돌아가시는 분들이 적어 화장장이 여유가 있어 가능했고 어머니때와는 다르게 이젠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정리할게 많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날에는 빈소를 늦게 차려 조문이 한산했으나 다음 날은 정신없이 바빴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먼 친척들과 친구들, 또한 오랜 만에 보는 나의 친구들도 볼 수 있었다. 나이가 들고 서로 가정과 직장에 바쁘니 이런 때나 보게 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삶을 볼 수 있었다. 자식과 어머니 없이 오랜 기간을 사시며 나는 보지 못한 아버지의 인생이었다. 아버진 월남전에 참전했기에 참전유공자였다. 그래서 대통령 조문기와 한 재향군이 분이 오셔서 약간의 의식을 해주셨다. 참으로 감사했다.

 엄마와 같이 납골당에 모시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장례식은 워낙 바쁘고 맞이할 사람이 많아 의외로 슬픔을 느낄 만한 시간과 공간이 적다. 그게 한꺼번에 몰려온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량 안이었다. 흐르는 눈물과 피로로 인한 졸음이 겹쳐 힘들었다.

 다음 날 아버지가 홀로 사시던 전세 집을 찾아가 동생과 집 정리를 시작했다. 집주인에게 연락하여 사정을 이야기하고 인근 부동산에 전세를 냈다. 그리고 구청을 찾아가 사망신고를 하였으며 유산 정리를 위해 관련 자산을 파악해주는 원스톱 서비스를 신청했다. 점심을 먹고 동생과 집정리를 시작했다. 오래 혼자 사시며 검소하고 깔끔한 성격에 이렇다 할 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집이라 모든 것이 무척 많았다. 아버지의 손길이 닿은 어떤 것 하나 버리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은 옷이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담배 냄새가 잔뜩 벤 옷이었지만 아버지의 체취인 만큼 그것마저 그리웠다. 여러가지 짐을 버리는데 쓸만한 것을 동생과 나눠 챙겼고 오랫동안 우리 집에 있었던 기념할 만한 것들은 챙겼다. 

 나이가 들고 홀로 사셨음에도 의외로 먹을 게 많았다. 한참을 먹을 빻은 마늘을 얼린 것들과 김치 및 아버지가 평소 좋아하는 라면 등을 버리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먹을 수도 없었고 버리기도 쉽지 않을 것들이었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집을 배우는데 할애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에 이불을 가장 마지막에 버렸는데 그것을 버림으로써 다시 이 집에 머물지 않게 될 거란 생각이 드니 다시 쉽지 않은 순간이 다가왔다.

 나는 어버지 집에서 아직 쓸만한 가전 제품 몇 가지와 아버지의 직장 20년 근속패, 그리고 천주교 십자가, 코트 한 벌을 챙겨왔다. 직장 20년 근속패는 늘 우리 집에 있던 것으로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아버지가 늘 자랑스러워 하셨던 것이라 버릴 수 없었다. 십자가 역시 난 더 이상 성당을 다니자 않지만 성당을 열심히 다니셨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오래 전에 성당에서 구입한 후, 매우 오랜 기간을 우리 집 거실을 장식했던 것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 이런 걸 버리는게 맞는 것이라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키는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내가 덩치가 더 커서 대부분의 옷이 맞지 않는다. 하지만 코트 한 벌이 유독 컸고 입어보니 그게 맞았다. 아버지 냄새가 가득 벤 옷이었다. 그걸 하나 챙긴게 다행이었다. 아버진 살아 생전 당신에게 세 가지 걱정거리가 있다고 하셨다. 하나는 와병하는 엄마, 다른 하나는 아직 가정을 잡지 못한 동생, 다른 하나는 장애가 있는 나의 큰 아들이었다. 엄만 아버지 보다 먼저 돌아가셨고, 동생은 늦게 나마 장가를 가서 두 가진 해결되었다. 나머지 하나가 남은 채로 돌아가셨는데 나의 아들인 셈이다. 그것을 내가 해결해드려야 할 문제다. 

 별로 대단한게 없지만 그냥 이런 아들을 믿고 어머니와 같이 편하게 쉬셨으면 한다. 그 시대 아버지들이 다들 그러셨지만 자기 인생 없이 평생 일만 하고 아끼고 안쓰며 즐기지 못하고 고생만 한 인생이었다. 아버진 몇 년 전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우셨다. 아버지가 영화를 보며 우는 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기에 놀랬지만 그 영화 자체가 아버지의 인생과 너무 비슷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아버진 어린 나이였지만 한국 전쟁을 경험했고,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며, KBS이산가족찾기에 직접 참여하셨다. 상당히 감정이입에 되셨을 거다. 굴곡진 인생을 힘들게 마무리 하신 아버지가 역시 어렵게 산 어머니와 더불어 편히 쉬셨으면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 옆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늘 계셨을 것처럼 내 옆에도 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 그렇기에 늘 부끄럽지 않게 잘 살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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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4-29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월 20일이면 거의 일주일 전이네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유족께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물총새 2024-04-29 0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순식간에 읽었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blanca 2024-04-29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페넬로페 2024-04-29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중년의 나이에도 고아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부모님의 빈 자리는 채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음 잘 추스르시기를 바래요^^
 













 





 영장류의 한 무리가 인간으로 진화한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뛰어난 지능과 사회성으로 그 개체 수를 꾸준히 늘려왔다. 현재 그 수는 무려 80억에 이르렀고 금세기 안에 100억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지구의 자연을 변환하여 만들어낸 산물들은 경제성장이라는 것으로 측정 되었다. 지표의 모습도 자신들의 발달한 문명을 이용해 몰라보게 변화시켜 인간의 생존과 생활 편의 만을 위해 도시라는 형태로 만들어 그곳에 모여산다. 그리고 인구 성장과 경제성장은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말한 것처럼 산업혁명이 촉발된 18-19세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 매우 밋밋한 성장이었다.

 그러다 19세기 말부터 서구권을 중심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수명이 늘어났다. 책 '인구의 힘'에서는 서구 선진 사회의 인구가 어떻게 증가하고 안정세를 찾았으며 각 나라마다 다른 인구성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구증가와 기술로 자연을 활용하고 착취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며 경제성장도 그에 못지 않은 궤적을 그렸다. 

 그래서 인간은 지난 100년 간 인구 성장과 경제 성장을 매우 당연 시 해왔다. 일부 지역이 두 가지 측면에서 마이너스를 겪거나 경제 공황이나 세계 대전 같은 이례적 사건으로 전 세계가 같이 고초를 겪긴 했지만 대부분 일시적이거나 국지적인 현상이었다. 세계의 인구와 경제는 매우 꾸준히 성장해왔다.

 하지만 이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주요 요인은 출산율의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인구의 감소세로의 전환, 미중갈등으로 촉발된 지정학적 갈등, 기후위기다. 소위 성장의 시대에서 축소의 시대로 패러다임이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책 '축소되는 세계'는 이러한 것에 관한 책이다. 

 향후 세계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구가 늘어나는 지역과 감소하는 지역으로 나뉘게 된다. 극심하게 인구가 감소할 지역은 한국, 중국, 일본이 있는 동아시아이며, 유럽과 미국에서도 적지 않은 인구가 감소할 예정이다. 아직은 인구가 성장하고 있는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도 십수년 이후면 인구가 감소세로 돌아설 예정이다. 하지만 당분간 전체적 인구는 성장하는데 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의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인구의 힘'에서 언급된 것처럼 인구는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식량 공급이 안정화하고, 의료기술의 발달로 전염병 및 응급처치가 가능해져 사망률 및 평균수명이 늘어나 급격이 성장한다. 그리고 도시화로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며 자녀의 양육부담이 커지며 출산율이 급감하며 안정화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두 지역은 아직 열악한 도시화 수준과 심각한 빈곤, 여성의 낮은 교육수준으로 인해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게 된다. 

 현재 동아시아 지역의 인구 감소는 가장 심각한 상태다. 일본은 2040년이면 지자체의 절반이 소멸하며, 한국은 2020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률로 총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다. 중국은 지금 추세라면 2100년이면 인구의 절반이 감소한다. 다른 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여서 향후 5-10년이면 태국과 대만도 인구 감소가 확실시 된다. 현재 세계 최고의 인구 대국인 인도다 마찬가지인데 낮은 도시화율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인구 성장은 둔화하고 있으며 2050년 이후면 확실히 감소세로 돌아설 것으로 예측된다.

 유럽은 서유럽과 동유럽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서유럽인 인구가 20세기 완성된 후 낮은 출산률로 인구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동유럽은 사회적 영향이 컸다. 이들은 공산권의 붕괴 이후 서유럽과 경제적으로 통합되면서 더 나은 일자리를 향해 대규모 이주가 이뤄졌다. 주로 서유럽 쪽으로 이주가 이뤄졌는데 그래서 동유럽은 서유럽에 비해 더욱 빠르게 인구가 감소했다. 하지만 유럽은 미국보다 제조업이 강하고, 공공복지의 수준이 높아 상대적으로 안정된 인구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선진국 중 인구가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나라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높은 출산률과 경제력을 바탕으로한 높은 인구 흡입률로 이주가 많다. 하지만 트럼프 이후 이주에 대한 제재가 강해지고 출산률도 낮아지면서 사실상 2020년대 들어 인구 성장이 멎춰버렸다. 인구가 감소하면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감소하며 축소도시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가장 먼저 등장한게 미국인데 이는 2차대전 후 미국이 탈산업화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조업이나, 탄광 등이 있던 도시 위주로 축소도시가 심각하게 나타났다.

 인구감소는 향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예정이다. 인구 통계요인부터 살펴보면 우선 고령인구가 증가한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서비스와 복지시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 다음은 1인 가구 증가로 이로 인해 주택공급과 수요간의 불일치가 일어난다. 셋째는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다. 대부분의 업종에서 노동자의 나이가 40세가 될 때 까지는 노동생산성이 증가하고 이후엔 감소한다. 그렇기에 고령노동자의 증가는 숙련노동자의 부족과 우수인재의 해외유출로 이어지게 된다. 마지막은 아동인구의 감소다. 이로 인해 학교를 비롯한 아동관련 시설의 수요가 감소한다.

 다음은 경제성과에 미칠 영향이다. 우선 소비부분인데 상업활동이 줄어들고, 소비 공간 수요가 줄어들며 판매세가 줄어든다. 인간의 소비는 대개 30세부터 40세 중반까지 증가하며 이후에는 감소한다. 고령층이 다른 세대에 비해 앞서는 소비 부분은 의료비가 유일하다. 둘째는 생산성과 혁신이다. 산업성장이 감퇴하고, 숙련노동자가 줄어들며 역시 고급인재의 해외유출이 일어난다. 셋째는 투자와 자본시장에 대한 영향으로 인구감소로 인한 디플레이션이 고착화하면서 경제 전분야에 기대감이 사라져 자본투자가 크게 감소한다. 또한 기존 시설에 대한 투자 역시 멈추게 된다.

 경제적 평등도 문제가 된다. 우선 지역 간 격차가 확대한다. 신자유주의는 대부분의 국가의 지방산업 및 제조업을 이전시켰다. 그래서 도시 간 격차가 커졌는데 인구 감소는 이를 더욱 가속화한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중심도시는 세력을 유지하거나 더 커질 가능성이 있고 주변 도시 및 축소도시는 쇠퇴가 가속화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한다. 중심도시는 높은 자산 가격과 고임금의 일자리가 지속될 것이고 축소도시는 자산 가격이 폭락하고 일자리가 더욱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한 낙인효과마저 생겨나게 된다. 이 낙인 효과는 미래에 대한 부정적 전망을 하게 하여 축소도시의 인구 유출을 더욱 증가시킨다.

 재정 및 정부에도 영향이 크다. 공공세수가 감소할 것이고 지자체의 세수는 더욱 줄 것이며 이로 인해 지자체의 서비스가 감소한다. 고령화로 연금과 복지서비스 수요가 증가하여 사회적 지출 수요가 커질 것이다. 축소도시는 텅 비게 되어 공공시설과 인프라가 잉여화한다. 

 주택시장에서는 주택공급과 수요가 불일치 하게 된다. 빈집이 증가하고 도심과 교외에서 나타나는 인구의 공간적 재구성이 일어나다. 그리고 언급한 것처럼 축소도시에서는 인구의 감소로 주택의 가치가 하락한다. 이로 인해 주택 투자가 줄어들고 주택의 가치도 감소한다. 

 마지막은 양극화와 분리의 문제다. 이미 신자유주의로 인해 양극화와 자산 차이에 따른 분리의 문제는 심각하다. 하지만 인구 감소는 이를 더욱 악화한다. 중심도시와 축소도시 간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이로 인해 시민은 참여가 감소하고 분노로 인해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의 지지가 더욱 증가한다. 이런 현상은 책 '장벽의 시대'에 잘 언급되어 있다.

 인구감소는 이처럼 전방위적 악영향을 가져오지만 설상가상으로 인류에겐 기후 문제도 있다. 기후변화는 도시에 많은 영향을 미칠 예정인데 기온 상승으로 인한 폭염의 증가, 해수면 상승, 심각한 폭풍, 산불 증가, 가뭄과 사막화 증가, 식량 생산 감소, 강제 이동과 이주의 증가, 경제활동 감소와 경기의 침체다. 

 기후 위기로 해수 온도와 염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날이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멕시코 만류가 아예 멈춰 버릴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인도와 남미, 서아프리카는 강수가 감소하고 유럽은 폭풍이 증가하고 기온은 내려가며 북미는 폭풍으로 해수면이 상승하게 된다. 인간이 만든 도시는 상당수가 강가와 해안가에 위치하는데 기후 위기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폭풍의 증가는 도시의 유지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도시는 인구 밀도가 높고 인간이 만든 복잡한 기반시설이 가득하며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뒤덮여 있어 기후위기에 더욱 취약하다. 열이 잘 빠져나가지 않아 폭염에 시달리게 되고, 배수가 잘 되지 않아 홍수가 나기 쉽기 때문이다. 라고스, 방콕, 자카르타는 대표적 저지대 도시로 원래 홍수에 약하다. 이들 도시는 인구 증가로 인한 식수 부족으로 수십년간 지하수를 마구잡이로 사용하여 도시가 상당히 빠르게 침하되고 있다. 이들 도시는 모조리 포장되어 있어 강수로 인한 지하수 공급도 불가능하다. 이 같은 아시아의 도시들은 기상 이변으로 도시의 식료품 가격이 오르고 전력이 부족하고, 질병창궐과 상수도 공급중단, 폭염, 대기오염에 시달릴 것으로 예측된다. 

 기온의 상승은 경제성장과도 밀접하다. 향후 세계는 인구 감소로 인한 수요의 감소와 숙력노동자의 감소 및 투자의 후퇴로 경제가 후퇴할 것 가능성이 놀다. 기후 위기는 여기에 기름을 붙는다. 연구결과 연평균기온 13도까지는 노동생산성이 향상된다. 하지만 그 이상이 되면 노동생산성은 하락한다. 더위에 신체가 지치는 것이다. 그래서 2100년가지 기후 변화로 인해 전 세계 생산량은 무려 23%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논의는 책 '기후위기 부의 대전환'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기온의 상승으로 식량생산의 감소도 예측되는데 아프리카 남부, 서아프리카, 지중해 분지, 미국 서부등 많은 지역에서 농업생산량이 감소된다. 특히, 지중해 지역과 미서부는 세계의 식량창고이기에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반면 캐나다와 시베리아, 북유럽은 농업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여기에 세계는 전제주의 국가의 등장으로 지정학적 위기도 갖고 있다. 90년대 초 동구권의 붕괴로 세계는 미국과 서구사회를 필두로 한 자유민주주의에 포섭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다. 헝가리, 튀르키예, 중국 등의 국가들은 오히려 더 독재화하였다. 이들은 오히려 경제적으로 성공함으로서 정권의 회복력과 유지력이 갈수록 강화하였다. 그리고 아직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전제주의 국가들에게도 하나의 모범적 사례가 됨으로써 여타 국가들의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도 늦추었다. 이 정권들은 서구와의 경쟁으로 기후 변화와 인구감소라는 세계적 과제의 대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협력적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파도를 해치기 위해 책은 지속가능하고 지역화한 경제와 사회의 구축을 주장한다. 여기엔 4가지 원칙이 있다.

1. 올바르게 통치하고 바람직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공공 민간의 협력, 도시 주민. 민간 지도자 간의 개방적인 의사소통지원 및 신뢰 형성이다.

2. 모든 수준과 모든 연령에서의 교육을 포함해 지역 사회의 인적 자본구축 노력

3. 자연환경과 건축 환경에서부터 안전, 양질의 의료 서비스, 식량 안보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모든 이의 삶의 질 개선 노력

4. 환경측면에서 지속가능성을 지역 경제의 모든 측면에서 통합 노력


 이런 식으로 지역화가 이뤄진 기반에서 소도시간 네트워크가 이뤄지면 생산이 늘고 교육이 높아지며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성이 낮아지게 된다. 지속가능한 도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인데 포용적이고 참여적 지역사회, 경제적인 구조(로컬푸드 시스템, 분산생산, 분산된 에너지 공급, 재택 및 하이브리드 근무), 환경과 삶의 질 관련 구조(수자원과 녹지 인프라, 예술과 문화, 공공영역), 사회적인 구조(고령화 친화, 네트워크한 교육기회, 네트워크한 의료서비스와 시스템)이 함께 달성되어야 가능하다. 책 '지방도시 살생부'에서도 비슷한 논의를 펼친적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 한국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드러나 있어 같이 살펴볼 만하다.

 저자는 3중고의 위기에도 미래에 미국이 유럽연합과 중국을 제치고 여전히 강국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3가지다. 우선 기후 변화로 미국 남부와 서부 지역이 상당한 고통을 겪겠지만 미국의 전체적인 위치는 중위도 및 고위도로 상대적으로 기후위기에 버틸만한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의 춥고 서늘한 지역은 인구의 이주를 받을 만한 상당한 여력이 있다. 국토의 상당수나 열대 아열대 및 중부이며 인구를 받을 만한 지역도 상당히 부족한 중국과는 다른 면이다. 둘째는 미국은 인구가 감소세이긴 해도 그것이 가장 최근의 일이고 다른 선진국에 비해 출산률이 높고 젊은 층이 많으며 이주에 대한 수요도 많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미국은 제조업이 부족하고 내수경제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며 대부분의 식량 및 원자재로 자급자족이 가능해 지정학적 위기에도 강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저자가 언급하진 않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도 한몫을 하게 될게 분명하다.

 인구의 감소는 성장을 멈추고 자본주의에 상당한 제동을 걸 것이란 점에서 인간이 지난 100년 이상 겪어 보지 못한 위기가 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인구의 감소는 기후 위기의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며 인구 감소는 인구증가와 성장이 불러온 여러 역효과를 해소할 가능성이 있다. 인구의 감소는 투자와 수요의 감소, 생산성의 감소로 경제성장을 저해할 것이지만 여기엔 과학기술발달에 의한 생산성의 혁신이란 면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저자는 스스로도 인정했을 만큼 기술의 단기간 발달에 부정적이지만 인구감소와 기후위기, 지정학적 위기가 장기적인 것인 만큼 기술의 발달로 인한 산업생산성의 향상도 충분한 일어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 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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