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있어요를 정리해 둔다.














<the idea of you>는 지난주에 읽었다. 영화를 먼저 보고 나중에 책을 읽었는데, 나처럼 영화를 보고 좋아하셨던 분이 또 다른 감동을 기대하신 거라면, 책은 그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다.


노력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the idea of you>는 앤 해서웨이의 영화라서, 이런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얘가 셋이든 넷이든 상관없이, 이 사랑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앤은 너무 예쁘고,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핫하다. 책 속의 화자는 앤이 역할을 맡았던 ‘Solen’인데, 소설 속의 솔렌은 딱 엄마다. 헤이즈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의 행동을 관찰하는 시선이, 내면의 목소리가 모두 엄마로서의 솔렌이다. 두 명의 솔렌 중에 나는 확실히 소설 쪽의 솔렌이어서(당연하지 않은가, 영화 쪽으로는 얼씬거릴 수 없음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훨씬 덜 행복했다. 내가 앤 해서웨이가 되고 싶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40살의 싱글맘이 20살의 청년을 연인으로 앞에 두었을 때의 심경이 너무 적나라했다는 뜻이고, 그 마음이 잘 이해되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직진남의 귀여운 돌진은 이어지고.  





계속해서 칭송되는 헤이즈의 특질은 젊음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것이 그를 가장 빛나게 하는데, 그걸 가지고 있는 그는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자랑한다. 자신이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말이다. 나는 남자들이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거나, 나이 든 여자도 젊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차은우만큼 블랙핑크의 제니를 좋아한다. 나는 김수현을 좋아하고, 뉴진스의 민지를 좋아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건, 젊음이다. 내가 사랑하는 건 그가 가진 젊음이다. 헤이즈가 가진 젊음. 솔렌에게 작동하는 헤이즈의 힘은 그의 젊음에서 나온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단장의 아픔을 주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과 영속성을 잃어버린 사랑의 위치가 어디쯤인지에 관해서도 쓰고 싶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정보라의 <저주토끼>가 유행했을 때, 나는 그 책을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인터뷰 기사를 읽고는 정보라 작가의 팬이 됐다. 모든 사람이 사회 정의를 위해, 대의를 위해, 신념을 위해 자신의 삶을 갈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대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에너지를 바치는 사람들에 대해 마음 깊이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더 존중받아야 한다고, 사회의 발전을 위해 애쓰는 만큼 일정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보완책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고독한 작업이고, 사회는 예술가들의 그런 고립과 고독을 이해해 준다. 예술가들은 마음을 흔드는 노래로, 그림으로, 연주로, 작품으로 고립과 고독의 결과물을 사회에 돌려준다. 그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그 누구보다 혼자이고 싶은, 그 누구보다 고립되고 싶은 예술가가, 작가가, 소설가가 길 위에서 써 내려간 이 기록이 특별한 이유다. 세월호 농성과 오체투지와 전장연 투쟁 이야기 등은 한 단어, 한 단어 모두 절절해서 이 얇은 책을 30여 페이지 읽는 동안 자주 덮을 수 밖에 없었다. 더 읽을 수가 없었다부당한 현실에 몸으로 부딪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알라딘 이웃님들과 같이 읽던 그때, 지금 사는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막 코로나가 시작된 때였고,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쓸 때였다. 사회활동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교회까지 가지 못하게 되자, 장보기 이외에는 외출할 일이 없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힘입어 올해는 옷을 사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초반에는 잘 되는 듯했지만, 1+1 행사 때문에 요가 레깅스를 두 개 샀고, 여름 원피스를 하나 샀다. 굳은 결심은 작년에 일을 하게 되면서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책을 펼치자마자 또다시 밀려오는 죄책감의 파도. 먹을 것을 줄일 수 없다면 다른 소비를 줄여야 한다. 소비 행태를 바꿔야 한다. 덜 먹고, 덜 사야 한다. 덜어내고 더 덜어내야 한다.



















<일류의 조건>은 자기 계발서다. 예전에 출판된 책이 절판된 상태에서 박문호 박사의 추천으로 화제가 되어 재출간 되었는데, ‘일류가 될 수 있는 조건이 따로 있는가 하는 의문으로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원칙은 훔치기인데, 도제식 교육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기술을 훔치는 비법이란, '암묵지'와 그것을 활성화한 '형식지'의 순환을 기술화하는 것이다. 이 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적확한 '요약력'과 전문가를 상대로 하는 '질문력', 그리고 '코멘트력'과 같은 중요한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일이라는 것 자체는 '과정'에 따라 진행하기 때문에, 결국 기술을 훔치는 것은 과정을 훔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 스스로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정리하며, 그것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 때까지 수련하는 것은 '일의 추진력'을 단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49)




나는 이런 생활이 아직도 익숙지 않아서 오늘 내내 놀았는데도 더 놀고 싶다. 한없이 오래오래 놀고 싶다. 내일 출근한다는 생각은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처리해야 할 일 하나를 화요일 퇴근 전에 급하게 처리했던 터라 딱 그만큼은 마음이 가볍다.


아침에 흰 빨래 한 판 돌려서 저녁에는 청소기 돌리고, 지금 검은 빨래를 한 판 돌리고 있다. 시간은 흘러가고 이제 곧 잘 시간. 그리고는 아침이다. 아침이 찾아올 테다.


그래서 책을 샀다. 나도 책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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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5-15 22: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젊음을 사랑합니다. 저는 아이들을 향한 돌봄과 노인을 향한 돌봄이 다른 것에서도 그것은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을 향해 더 열리는 종족인듯 합니다.

저도 그걸 깨달았어요, 단발머리 님. 우리가 젊음을 사랑한다는 것을요. ‘우리는 젊음을 사랑한다‘고 제가 1년 전에 써둔 글을 링크합니다.

https://blog.aladin.co.kr/fallen77/14299700

단발머리 2024-05-16 13:31   좋아요 0 | URL
아이에 대한 돌봄과 노인을 향한 돌봄이 다른 부분에 대한 다락방님 이야기 너무 좋았어요. 이달의 당선작의 위용이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다락방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근데,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니깐 이걸 간단히 표현하자면요.
아이들이 덜 아파서(아파도 빨리 회복되어서) 노인을 향한 돌봄보다 아이를 향한 돌봄이 덜 힘들다고요.

이런 식입니다. 아이들도 강도 높은 돌봄이 요구되는 ‘질병‘의 상태에 도달할 때가 있지만,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그 시기가 짧습니다. 어른들, 노인들은요? 우리 다 아다시피, 무릎이 나으면 허리가 아프고, 어깨를 치료한 후에는 혈압 체크가 필요하고... 뭐 이런 식입니다. 끝이 안 납니다. 계속 되요. 물론 돌봄 대상자의 미적 아름다움이나 삶에 대한 태도(대부분 아이들이 명랑하고 긍정적이죠, 노인들보다요)도 중요하겠지만요.
전 최근에 읽은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을 읽고 그렇게 느꼈거든요. 아이의 병이 위중하고 요구사항이 많다보니 돌보는 사람이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에요. 내 자식이니깐 견디고 참을 수 있었던 것 같고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 저도 젊음을 사랑합니다. 이미 어느 정도 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의 중위 연령이 45.6세래요. 그니깐 중간 어느쯤에 우리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아직 젊네요!!

(추신) 헤이즈의 젊음을, 제가 좋아합니다, 많이..............

다락방 2024-05-15 22: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책 사러 가겠습니다. 슝-

단발머리 2024-05-16 13:20   좋아요 1 | URL
절대 찬성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4-05-17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음, 너무 좋죠. 전 딱히 시간을 돌려 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 젊었던 나를 다시 느껴보고 싶긴 합니다.. 그땐 그게 소중한지 몰랐죠.. ㅠㅠㅠ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저는 소비가 많지는 않은데 물건을 잘 관리하지를 못해서 ‘좋은 걸 사서 오래 쓴다‘ 이게 안되더라고요. 신발도 툭하면 앞이든 뒤든 까져버리고.. 남편이 아예 세무 이런 건 못 사게 해요 ㅡㅡ;; 흰빨래고 검은빨래고 그냥 다 한번에 처넣고 돌리는 저는~ 워우어 .. 모르겠음다. 현명한 소비와 유지 너무 어려워요.
그래도 소비 중엔 역시 책 소비가 최고죠. ㅋㅋ 구간 처리도 많이 못했는데 두꺼운 세트를 선물로 받아버려서 어쩌지 싶던 것도 잠시, 그 책이 재밌어서 행복합니다 크하하, 단발님 행복한 독서하세용♥
 
가부장제의 정치경제학 : 제도화된 수렁들 가부장제의 정치경제학
크리스틴 델피 지음, 김다봄.이민경 옮김 / 봄알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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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가정 밖에서 일하면서 독립적인 수입을 얻을 자유에 대한 대가로 이중 노동을 한다. (123쪽)

이건 사실이다.

출근을 하게 된 이후, 나는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밥을 하고 반찬을(거의 만들지는 않지만) 암튼 먹을 반찬을 준비하고, 식구들을 깨워 학교로 보내고,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바깥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다시 아침의 그 '나'이고, 빨래를 시작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을,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거나 집에 있는 음식을 꺼내 먹는다. (이번 주에는 외식 한 번에, 두 번 저녁으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왔다)

그러니까, 출근부터 퇴근 때까지의 내 생활은 100% 바뀌었지만, 그 나머지 시간은 예전과 똑같다. 나는 가정 밖에서 일하면서 내 소유의 수입을, 적은 수입을 얻게 되었지만, 가사 노동의 주된 책임자는 여전히 나다.

나는 19년간 전업주부였는데, 그 기간에 직무유기와 태만으로 일관했던 내 생활이 얼마나 나태했는지를 고백하는 순간, 온 세상이 온통 나를 부러워할 것이기에 여기에 뭔가를 보태지는 못 하겠다. 나는 보통보다 살림을 안 하는 편이고, 남편은 보통보다 살림을 많이 하는 편이다. (관여나 도움, 협조 등의 단어를 쓰는 거 자체가 불합리하다. 나는 적확한 단어를 골랐다. 살림.)


딸과 장남 아닌 아들을 전부 상속에서 배제하는 베아른의 상속 체계에서 장남 이외의 아들이 법률적, 직업적인 측면에서 '가정부'에 해당한다는 지적은 새삼 놀랍다.(77쪽) 가장과의 결합으로 지위가 결정되다는 게 주요한 포인트인데, 이는 여성이 자신이 결혼한 남성과 맺는 관계와 심각하게도(?) 유사하다.


여성은 자신의 남편이 속한 계급으로 취급(?)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이 이혼했을 때, 여성은 이혼함으로써 더욱 가난해지고, 남성은 더 부유하게 된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해준다. 여성은 출산과 육아로 인해 더 이상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이 아니고, 결혼 이전의 직업과 지위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고, 결과적으로는 경력 단절 등의 이유로 비숙련 저임금 노동에 내몰린다. 결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경제 활동을 이어왔던 남성은 이혼 그 자체만으로는 사회적 지위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혼 후 남편이 약속한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다면? 암묵적으로 강요되었던 육아에 대한 강제는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아이와 하나로 묶인 여성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에서 여성 집단을 고립시키기 위한 첫번째 단계가 '은행 계좌 동결'이었던 이유가, 고소득의 사회적 명망과 지위가 보장되는 '선호' 직업군으로 여성의 진입이 어려운 이유가, 여성들이 주로 수행하는 감정노동, 돌봄노동이 저평가되는 이유가, 여전히 동일 업무에 대해서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돈을 덜 받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발흥과 플랫폼의 발달, AI의 출현등으로 이제 인간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기계에게도 손쉽게 대체되는 '상품'이 되고 말았다. 인간이 직접 수행해야만 하는, 아직 기계의 발전이 도달하지 않은 영역에서의 노동, 특히 돌봄노동과 감정노동의 경우, 오히려 남성보다 여성의 노동력이 더 많이 요구되며, 그런 경우 노동자의 임금은 낮게 책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동의 여성화'가 가속화되는 와중에 일시적으로는 여성의 노동 참여로 인해 남성에의 예속이 약화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저소득층의 아내가 임금노동으로 인해 폭력 가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사례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마르크스주의가 페미니즘과 교차되는 지점을 '완전히'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여성은, 자신의 젊음과 육체에만 의존하도록 '사회화된' 여성은, 영원히 노동자일 수 밖에 없다. 결혼 상태에서도 그러하고, 이혼 상태에서도 그러하다. 계급의 혁파는 경제에서 시작된다. 노동 혹은 수입, 또는 일 그리고 그에 대한 가치에 따라서.


그리고 무엇보다, 비-소지자란 누구인가? 성인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주로(베아른 지방의 ‘동생‘과 같은 경우를 보자면 반드시는 아니다) 아내다. 아내들은 가정 밖에서 일하지 않을 때 남편의 계급에 결합-사회학 이론뿐 아니라 자발적 사회학에서도 되며, 고유의 위치를 갖지 않는다. - P82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한 상황, 남편과 아내가 처한 상황을 일반 사회학에서는 ‘성의 범주‘라 부르고 가족사회학에서는 ‘역할‘이라 부른다. 그러나 명백히 보았듯 성의 범주는 계급의 범주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계급 내 지위의 범주다. - P87

한편으로 결혼은 제도적인 여성 착취의 공간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 착취 때문에, 그들의 잠재적인 상황(기혼 여성뿐 아닌 모든 여성의 상황에 해당한다)이 너무나 열악한 나머지 여성들에게 결혼이 경제적으로 그나마 가장 나은 경력이 되는 것이다. - P110

아동 양육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가장 잘 조명하는 동시에 이혼 이후에도 결혼이 지속한다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이혼의 측면이다. 여성이 도맡는 아동 양육은 남편에 의한 여성의 노동 전유라는 가설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덜 분명하던 부분도 뚜렷이 드러낸다. 바로 결혼의 특성인 이 전유가 결혼관계가 끝난 뒤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혼은 결혼의 반대가 아니고, 끝도 아니며, 결혼의 현신이자 변형이라는 것이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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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5-13 1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완독하셨군요. 게다가 멋진 글까지! 고생하셨습니다.

저도 어느 순간 깨달았던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밖에 나가 돈 벌기 전에 가사노동을 하고 밖에 나가 돈벌고 들어와서도 가사 노동을 하는 우리 엄마가, ‘어떻게 저게 가능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우리 엄마가, 아빠보다 훨씬 더 큰 노동으르 감내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지요. 그렇게 힘들게 자식들을 키워오셔서, 그래서 저는 엄마한테 정말 잘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고생했으니까 이제 인생을 즐기시라고 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러다가도 엄마한테 자꾸 화내고... 하아- (갑자기 자기반성)

아무튼, 같이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단발머리 님!

공쟝쟝 2024-05-14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 가족과 결혼 제도가 (뭐 과거에는 어쨌는 지 몰라도) 결국 인간 재생산 + 계급 재생산(혹은 계급 탈출 ㅋㅋ)...의 기능이며 장치인 건 맞아요. 특히 한국에서는 저쪽 프랑스보다 더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저는 마지막 문단에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가족 안에서의 나는 기능(물론...)적으로 대체될 수 없지만. 사회에서 나는 아주 쉽게 대체되거든요. 게다가 저는 완전한 1인 가구고... 나보다 젊고 영리하고 똑똑한 노동력은 많아요. 이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노력하다가도 어느 순간은 너무 지치는 데 요즘은 ai란 경쟁해야 할 거 같아서 근로의욕 더 상실ㅋㅋㅋ 나도 엄마가 필요하다!!!

어쨌든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이고 여성의 생산수단은 몸이예요. 몸. 노동하는 몸, 섹슈얼리티의 대상이자 주체로서의 몸. 살아남지 못하면 남자는 교도소에 가고. 노숙자가 될지 모르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는 혼자이지만 노동시장에서 탈락되는 여자는... 페미니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내 위치에서 현실을 인식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무의식적으로는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도망치듯 결혼을 내가 하고 싶었나 하게 되더라는.

가족이 계급 재생산으로서의 기능이 특화되어버린 현시점의 한국에서... 저는 능력이나 조건이 부족한 타발적 비혼자로서, 가족 혹은 결혼 제도로 탈출하는 여성들을 많이 이해합니다. 정상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로망이 없지 않죠. (가끔 부럽다) 그러나 그 일이 절대 수월하지 않다는 걸 친구들을 통해서 너무 자주 느껴요. 인간이 기능이 아니라 친밀함을 나누는 사연을 지닌 소중한 타자라는 걸 결혼이라는 제도도 가족이라는 제도도 이 급박한 자본주의의 시절에서는 느낄 수 없게 해버리는 듯 합니다. 델피를 마저 사야겠어요~ (본격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탈 노동의 기치 드높이!!)

그나 저나 이 글 왤케 단정합니까? 원래 단정했다고요. 단정적이시네요 ㅋㅋㅋ

yamoo 2024-05-14 15: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미니즘 관련 책은 관심 분야가 아니라서 유명한 책 몇 권만 소장하고 있습니다만...
페미니즘 책을 읽고 이렇게 멋진 리뷰를 쓰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쓸 말을 먼저 쓰고, 할 말을 뒤에 하겠다. 둘의 차이를 나는 모른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the idea of you>를 봤다. 우리 집은 OTT를 안 보는 집이라 이게 얼마나 큰 일인지를 좀 설명하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다. <킹덤>,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안 본 눈 삽니다, 하면 내가 나서면 된다. 아무튼 이 영화를 봤다.

 


오더블 아이디로 들어갈 수 있어서, 아침에 영화를 봤는데, 띠링! 책 선물이 도착했다. 이 책의 원작이었다. 내가 이 영화를, 이 책을 좋아할 줄을 아는, 그러니까 나를 잘 아는 친구의 선물이었는데, 이미 영화를 봤다는 내 말에 친구가 더 놀라는 듯했다. 항상 빈둥거리는데 갑자기 재빨라진 나.


 

 

여기서부터는 본격 영화 이야기라, 내용을 알고 읽어야 한다. 여기(https://blog.aladin.co.kr/fallen77/15522693)에 다락방님 페이퍼가 있다.

 


세계 최고의 보이밴드의 리드보컬 헤이즈(니콜라스 갈리친)와 사귀게 된 솔렌(앤 해서웨이)은 일상이 공개되는 것은 물론이고, 악플의 공격에 더해 딸아이까지 곤경에 처하게 된다. 괜찮냐는 친구의 말에 솔렌이 대답한다. 난 사람들이, 내가 행복하다고 이렇게 빡쳐 할 줄 몰랐어. 친구가 답한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어? 사람들은 행복한 여자를 미워해.

 

 



, 여자만은 아니겠지. 하지만, 여자에게 더욱 가혹한 현실. 동화 속, 가장 착한 여자는 죽은 여자, 잠든 여자, 누워 있는 여자. 행복한 여자는 공공의 적이 되기 십상이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People hate happy women. 그런 세상에 저항하는 길은 더 행복해지는 것 뿐이다. 더 건강하고, 더 활력 있게. 더 재미있고, 더 행복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헤이즈가 솔렌에게 유럽 투어를 같이 가자고 말하는 부분이다. 아이 문제도 있고, 일도 해야 하는 솔렌. 갤러리 때문에 안 된다고 하자, 헤이즈가 자기가 갤러리의 작품을 이미 다 샀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 때, 솔렌은 가볍게, 그러나 확실하게 헤이즈의 뺨을 때린다. !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 돈처럼 중요하고 돈처럼 필요한 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서, 그 시간의 필요를 돈으로 해결하는 생활 방식은 이제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실례; 배달의 민족) 나 역시 헤이즈의 그 생각이 100% 나쁜 제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솔렌이 헤이즈의 뺨을 소리 나게 딱! 때렸을 때, 나는 그 순간이 시원하게 좋았다. 그러니까 헤이즈가 맞아서 좋았다는 게 아니라(, 막 때리고 그런 사람 아니에요), 좋아하고 아끼고 소중한 사람이라 해도 예의 없게 행동했을 때,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게 두 사람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작품 속의 설정상 헤이즈가 솔렌보다 16살 연하이기 때문에 그런 교정(?)’ 시도도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남자주인공을 맡은 니콜라스 갈리친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자나깨나 베일리 스타일). 그냥 딱 봤을 때, 전형적인 미남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연기를 잘해서 그런 건지, 모르던 매력을 발견해서 그런 건지, 보면 볼수록 괜찮았다. 왜 그런가 빤히 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알게 됐는데, 목소리. 찾아보니 니콜라스는 미국 배우가 아닌 영국 배우였는데, 미국의 팬들이 그렇게나 좋아한다는 영국 엑센트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어도 잘 못하면서,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 구별하지도 못하면서, 나도 모르게 영국 엑센트에 반했던 걸까. 나만 반하는 이상한 상황. 헤이즈가 솔렌에게 반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헤이즈가 이렇게 말한다. “I think you’re smart and, you know, y-you’re also just-just… y-you’re hot, or whatever. [] 아니고, [하흐:].

 

 


영화를 보면서 가끔, 아주 가끔은 내가 그 환경, 그 세팅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꿈꾸게 된다. 세계 최정상 보이밴드의 아이돌이 나 같은 중년의 아줌마를 좋아할 리 만무하지만, 아무튼 이건 픽션이고, 상상이고, 꿈이고. 그래서,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순간. 아니, 펼치려 하는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현타. 내 인생에, 24살 때에도 이렇게 다정하게, 적극적으로, 필사적으로 대시하는 24살의 남자가 없었는데, 내 나이가 이제 중년인데, 설마 이런 일이. 내 나이 24살에도 없던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고, 없을 테고, 없었던 것이며. 하지만 계속 터져 나오는 웃음.

 

 


hot. 내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니콜라스가 해줬다. 내게 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한 거니까. 니콜라스가 그 말을 했다. 내게 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하긴 했다. … you’re 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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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5-09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네, 저도 들었습니다. hot !!!!

저도 헤이스가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게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놈, 참 마음에 드네 싶었달까요. 적극적 대시가 누구에게나 좋은 것도 아니고 누가 해도 좋은건 아닌데, 헤이스라면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아마도 나의 마음도 사실 어느 정도는 너를 허락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니 엄마뻘이야 안돼, 라고 내 입은 말하지만 자꾸만 나의 몸은 너를 향해... 샤라라랑~ 아무튼 핫한 놈이 핫한 말을 해가지고 분위기도 핫해지는 영화였습니다. 저도 그의 적극성 때문에 많이 웃었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24-05-11 17:01   좋아요 0 | URL
흠.... 자꾸 보다보니 정들더라구요. 적극적 대시가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씀은 참 옳습니다. 사실 그 전에도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들 많았잖아요. 근데 앤이 선택한 사람은 니콜라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실제 나이도 찾아봤습니다. 왜 그럴까요? ㅋㅋㅋㅋㅋ 앤은 82년생이고, 니콜라스는 94생이더라구요. 94년에 출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94년에 우리는 말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4-05-09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딴지를 확 건다면 연애에서는 나이가 권력이죠. 특히 저런 관계에서는 나이 적은게 권력.
그러니 맘껏 대쉬를 하는거 아닐까
그래서 어린 놈이 막막 대쉬하는거 보면 약간 빈정상한달까? ㅋㅋ
그래 너 젋단 말이지 이러면서요. ㅋㅋ
나이 많이 먹어서 저런 사랑 받는거 꿈조차도 못꾸는 나이간 된 바람돌이의 심술입니다. ㅋㅋ

단발머리 2024-05-11 17:0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바람돌이님. 사실 저런 설정에서 나이 적은 니콜라스가 적극적이지 않았다면 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겁니다.
다만 저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자는 연하여도 돌진하고 연상이어도 돌진하죠. 기혼이어도 돌진하고, 가끔 불륜의 상황에서도 남자는 돌진.
물론 그것도 아주 옛날이야기죠. 요즘은 안 그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나이가 많아서 바람돌이님의 심술은 곧 저의 심술이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oonnight 2024-05-09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자벨 위페르 나왔던 피아니스트 생각합니다ㅠㅠ;

단발머리 2024-05-11 17:07   좋아요 1 | URL
저 일부러 찾아보고 왔어요.
김희애의 밀회랑 너무 분위기 비슷하네요. 여기에도 돌진 청년 나오고요.

독서괭 2024-05-09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제시하신 안 본 눈 산다 세 작품 다 안 봤습니다 ㅋㅋㅋㅋ
크흑.. 모든 건 앤 해서웨이라 가능.. ㅠㅠ

단발머리 2024-05-11 17:09   좋아요 1 | URL
세상에~~~~~~어마어마하신 분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위의 세 작품 적으면서, 없겠지, 아예 안 본 사람? ㅋㅋㅋㅋ 하면서 웃었단 말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맞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건, 앤 해서웨이여서 가능합니다. 그녀가 핫한 앤 해서웨이여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울지 마세요 ㅋㅋㅋㅋㅋㅋ
 

 
















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해 보자. 시작은 <제인 에어>.


 

 
















<제인 에어>에서는 초자연적인 목소리가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가 몇 번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여성’, 구체적으로는 어머니의 목소리이고, 또 하나는 로체스터의 목소리이다. 여성의 목소리는 로체스체가 유부남임을 알게 된 그날, 제인의 결혼식이 중단되었던 바로 그날, 중혼을 종용하는 로체스터와의 사이에서 제인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속삭이는 소리로 들려온다. “내 딸아, 유혹에서 몸을 피해라.”(<제인 에어>, 2, 164)

 


로체스터의 목소리는 세인트 존이 제인에게 청혼하는 와중에 고민에 빠져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들려온다. 멀리서, 저 멀리서 들려오는 로체스터의 목소리. 자신의 이름을 애달프게 외쳐 부르는 로체스터의 목소리 때문에 제인은 세인트 존의 청혼을 뿌리치고 로체스터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두 목소리는 모두 외부에서 들려온다. 바깥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다. 하지만, 소설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목소리는 제인, 그 자신의 목소리다. 이 소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여기다.

 


...... 절망에 뒤따르는 무모함을 생각하고, 그를 달래고 구원하고 사랑하라. 그리고 너는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의 것이 되겠노라고 말하라. 세상에 너를 걱정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 너의 행동으로 해를 입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러나 대답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걱정한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존경한다…. ‘ (<제인 에어>, 2, 159)

 


내가 나를 걱정한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존경한다.’ <제인 에어>라는 작품에 공명하는 지점은 사람마다 다를 테고, 같은 사람이라도 언제, 어떻게 그 소설을 읽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그 소설을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로 읽었고, 한 여성의 독립 여정기로 읽었고, 로맨스와 인류애의 대결로 읽었고, 한 여성 속 두 자아의 대립으로 읽었고, 끝내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는 용기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었다.

 


실제 세계에서 제인은 특별할 것 없는 외모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가난한 20대 여성, 돈이 필요한 젊고 어린 가정교사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세계, 만들어진 우주 속에서 그녀는 연약한 여성이 아니다. 창조주이자 주인이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소리 내어 말하고, 설득하고, 설명하고, 판단하며, 거절한다. 세상과 구별된 독립된 객체로서 자아를 소유한 가 그 세계의 주권자로 자리매김 되어있다.

 

 


작가들의 초기작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록 형태를 띤다. 오르한 파묵이 소설을 썼을 때, 가족들이 그와 절연하고 나섰던 이유와 같다. 그는 소설을 썼고, 그리고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알아챘다’. 소설가는 피해 갈 수 있다. ‘그건 지어낸 이야기야!’ ‘그건 그냥 소설이라고!’ ‘제인은 내가 아니야!’ 픽션이라는 장르 속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작가는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화자이기도 하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있다. ‘쓰는사람은 작품 속의 와 실제의 를 분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글에서는? 다른 글에서도 그게 가능할까.

 


논픽션은 어떠한가. 논픽션 중에 가 제일 많이 등장하는 형태는 일기일 것이다. 일기는 나에게 일어난 일을, 내가 서술한 글이다. 사람은 일기를 쓰면서도 진실을 감출 수 있다. 일기(라는 세계) 속에서도 거짓말할 수 있다. 나는 그랬다. 오랫동안 일기를 써왔던 나는 그랬다. 내가 남기고 싶은 일을 남기고, 내가 감추고 싶은 일을 감췄다. 나는 일기 속에서, 일기 쓰고 있는 나를 만들어 갔다. 나는, 나를 창조해 냈다.

 


다른 글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무엇에 관해 쓰든, 결국 자신의 전기를 쓰게 된다고 말한 니체의 말을 돌아봐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쓰는 건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글을 읽고, 자신에 대한 글을 쓴다. 아는 만큼 쓸 수 있고, 쓰는 만큼 도달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쓰는 나, 쓰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알라딘 서재에서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적어 온 시간이 이제, 꽤 되었다. 알라딘은, 알라딘 이웃들은 이제 내 생각에서, 내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일부가 되었다. 쓰는 는 누구인가. 닉네임 단발머리인, 나는 누구인가. 두 아이의 엄마이고, 40대 후반의 기혼 여성, 서울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인 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러 번 이 고민을 이곳에 써 두었지만, 여태 답을 찾지 못했다. 이제 나는,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는 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음을 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총체로서의 나로 존재하고, ‘의 경계는 외부 세계와 구분된다. 실제의 나보다, 실존하고 있는 나보다 글 쓰는 단발머리는 훨씬 더 나은 존재다. 더 사려 깊고, 더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 더 조심스럽고, 더 진중하다. 나는 그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런 나를, 그 간극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 자신을 잃을 일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돌연 깨달았다. 내게는 나를 위해 싸워줄 서술자가 있었다. 이 서술자는 자신이 곧 어머니처럼 되었기에 그 곁을 떠나지 못한 여자, 바로 나였다. "또 혼자"라는 상황에 겁먹지 않는 서술자. 생각해보면, 그는 도시를 걸어 다니는 사람, 혹은 이혼한 중년의 페미니스트, 혹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작가인 나에게도 크게 휘둘리지 않았다. 이 서술자는 그저 견고하고 제한된 자아로, 중심을 잘 잡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내가 해낸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페르소나를 창조해낸 것이다. (<상황과 이야기>, 30)

 


그러니까, 비비언 고닉의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그건 전혀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위해 싸워줄 이 서술자를 믿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이 페르소나, 논픽션 페르소나를 받아들이면 될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내 이야기에 더 자유로운 연상을 허용해줄 유용한 관점이 필요했다.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놓쳤던 점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서술자에게서만 이런 관점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상황과 이야기>, 29)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서술자.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을, 그렇게 고닉의 책에서 찾아냈다. 너무 하찮은 일이라 이 글을 올려도 될지 고민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이제 발견해 놓고는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저어되기도 했다. 하루에 방문자가 50명도 안 되고, 그조차도 다른 책들과 연동해서 내 서재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새 글을 썼을 때 각 잡고 내 글을 진지하게 읽어줄 사람이 30명도 안 되는 그런 내가 할 만한 고민은 아니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지만, 아무튼 이 이야기를 썼다. 쓰고 싶었다. 고백하고 싶었다.

 

 















글을 쓰도록 우리를 강제하는 것이 '고백 성향', 고백 욕망, 고백의 맛을 맛보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고백하고 싶은 욕구와 그 불가능성 둘 다죠. 대체로는 우리가 고백하는 순간 속죄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고백, 그리고 건망증이라는 함정이죠. 고백은 최악의 것입니다. 고백은 자신이 시인한 것을 부인합니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86)

 

 


내가 읽은 문장과 내가 겪은 일들과 내 생각과 주장과 판단과 고민과 흔적을, ‘나 아닌 나의 목소리로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서 기뻤다. 기억과 기억 사이의 경합과 경험에 대한 판단을, 나보다 훨씬 나은 나, 훨씬 현명한 나, 훨씬 윤리적인 나에게 맡기면 된다는 말에, 부담감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 간극이 주는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쓰면 될 것이다. 이제, 쓰면 될 것이다. 이제부터.  

 

 

다시 말해, 독립해가는 자의 투쟁과 가치를 기록하고 말하는 남자만이 남는다. (<상황과 이야기>, 117)

 


맞다. 독립해가는 자의 투쟁과 가치를 기록하고 말하는 사람만이 남는다. 기록하고 말하는 사람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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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4-05-06 1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네, 내가 아는 단발이 속성 한그득이라서 더 좋네, 근데 좀 뭔가 다르네? 달라지는듯 폭 넓게 🩵

단발머리 2024-05-06 12:34   좋아요 1 | URL
수이님이 아는 그 단발이입니다. 이제 제정신 챙겨서 주워올 시간이에요. 저 요즘 머릿속이 이랬거든요. 🤯🤯🤯
폭 넓게 펼쳐보렵니다. 가능할까요? (빈둥빈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5-06 1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는 자아와 쓰는 자아를 발명하는 여정에서 만나 <상황과 이야기>를 같이 읽을 수 있어 기뻤습니다. 계속 책읽고 글쓰는 머리긴 단발머리님의 서재 방문 독자1이 되겠사오니... 수다는 필수, 쓰기는 선택!! ㅋㅋㅋ

- 다시 말해, 독립해가는 자의 투쟁과 가치를 기록하고 말하는 남자만이 남는다. (<상황과 이야기>, 117쪽)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그 모험과 과정과 여정이지요. 처음에는 부족하고 허술한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순간은 그의 결함때문일까요, 기구한 팔자 때문일까요. 가능성 때문일까요. 공감때문일까요. 그건 독자의 몫!

저는 지혜로워지며 사려깊어지며 (ㅋㅋㅋ) 살아있는 모험의 독자라는 게 자랑스러웠고, 앞으로도 코믹 멜로 액션 에로 sf 과학 신학 외국어…. 광폭한 독서로 그 여정의 단짠의 기쁨을 나눠 주실 것이라 믿기에 아직 씌어지고 있는 단발님이라는 책에 읽기로 함께 하고 싶어요! (방문자 +1) 살아남자요.

단발머리 2024-05-06 12:37   좋아요 2 | URL
서재 방문 독자 1이 되어주신다는 댓글 감사해요. 가끔 2가 되어도 되는데요 ㅋㅋㅋㅋㅋ 대상화도 연결해서 쓰고 싶었거든요. 근데 너무 할말이 많아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자유로워진만큼, 글 속에서 내가, 우리가 만들어낸 페르소나는 곧 내가 아니라는 것도 쓰고 싶었는데, 그것도 다음 기회를(뭐 응모하나요? ㅋㅋㅋㅋㅋ)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읽는 종족이 영영 사라지는, 사라질 것으로 보이는 이 시대의 마지막 읽는 인간으로서 ㅋㅋㅋㅋㅋ 앞으로도 굳건히 살아남자구요!
아, 내일 출근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4-05-06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엇, 저도 그저께 외출하면서 이 책을 조금 읽었는데… 반가워요. 전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라서 흥미롭더라고요 :)

단발머리 2024-05-06 12:39   좋아요 0 | URL
건수하님도 이 책 읽으신다니 반갑네요. 전 이 책이 고닉의 첫번째 책이고요. 작년의 발견 같은 책이라 참 좋아합니다.
건수하님의 리뷰/페이퍼도 기대되네요^^

건수하 2024-05-06 12:46   좋아요 1 | URL
어 음음.. 다 읽어야 뭘 쓸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

단발머리 2024-05-06 12:56   좋아요 1 | URL
그럼 먼저 끝까지 읽으시기를 응원합니다! 응원 이모티콘 여기에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요. 🥰👏👍🏼

독서괭 2024-05-06 14: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각잡고 읽는 30명의 독자중 한명이 되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어깨빵 하며 들어왔습니다😙
저 요즘 글 못 쓰고 있는데 반성합니다
그런데 뭐죠 밑에 저 맛있는 조합은… 쓰읍 🤤

공쟝쟝 2024-05-06 16:33   좋아요 2 | URL
아앗! (어깨를 부여잡으며)
저기요? 팬클럽 회비 내도 안받아주는 잠사모 회장님? 은오한테 잠자냥님 빼앗겼다고 여기서 이러시면... 됩니다?...ㅋㅋㅋㅋㅋ 여기는 30명 한정 멤버십 그런거 아니래요ㅋㅋㅋ

독서괭 2024-05-06 16:34   좋아요 3 | URL
글 다 읽고서도 꾸물거리며 안 비키던 그분이군요.. ㅋㅋㅋ

단발머리 2024-05-06 19:29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 / 각잡고 읽어주시는 예상 독자 30명 중에 당연히! 독서괭님도 계시지요. 입구가 크고 사람이 없어서 널널했는데, 왜 어깨빵을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바쁘시고 아프셨다는 내용의 댓글을 다른 분 방에서(아마도 다락방님?) 본 듯 해요. 얼른 급한 일 마무리되시고, 건강도 회복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알라딘의 부흥은 독서괭님의 어깨에 달려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시구요!!
아래의 아름다운 조합은 마라상궈와 멘보사입니다. 마라탕 유행이라 집 바로 앞에도 하나 생겼더라구요. 자주 가게 될 느낌입니다^^

쟝쟝님 / 회비 내도 안 받아주시는 독서괭님 어깨 부여잡지 마시고요 ㅋㅋㅋㅋㅋㅋ 여기 30명 한정 멤버십이에요. 무한확장해도 오실 분들 없어가지고, 그냥 알음알음 소수정예로 운영됩니다!

다락방 2024-05-06 17: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너무 좋은 한편, 어떤 글 혹은 어떤 작가는 다른 사람의 소개 혹은 중개로만 더 잘 읽을 수 있는 거란 생각이 드네요. 그건 모든 책이 읽는자, 즉 독자의 몫이라는 것과 같은 개념이기도 한데요, 제가 읽었으나 제가 읽지 못한 지점을 타인, 즉 이 글에서는 단발머리 님의 짚어줌으로 새로이 알게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읽은 제인 에어는 사랑 이야기였고 용감한 자의 이야기였어요. 저는 어린 시절 로체스터를 용감하게 생각했거든요. 내가 그전보다 상황이 더 나빠지고 돌봄이 필요해진 약한 상태가 되었어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용기라고 보았거든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단발머리 님은 그 책에서 보셨네요. 마찬가지로 비비언 고닉도 저는 도무지 뭔가를 잡아낼 수 없었는데 단발머리 님은 아주 많은 걸 캐치하셨고요. 정말이지 읽는자, 즉 보는 자의 몫이 되는거겠지요.

그리고 서술자로서의 나 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내 글은 내 손이 쓴다‘ 고 말해왔는데, 오늘 이 글과 저의 그 문장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손이 있기 때문에 저는 언제든 글을 쓸 수 있고 또 무너지려는 저를 잡아주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글 쓰는 제가 좋아요. 글이 저를 붙잡아주기 때문에 저는 다른 사람들도 글쓰기를 하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아주 자주 생각합니다.

내 글을 읽어주는 서른명이라면, 너무나 감사하죠. 저는 단 한 명이라도 제 글을 기쁘게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행운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우선순위는 저이고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저 자신을 위해서인데, 그런 글이 타인에게 즐거이 읽힌다면, 와, 얼마나 좋은가요! 단발머리님의 서른명의 독자중 한 명이 저라는 사실 역시 저는 오늘 기쁩니다.

:)

단발머리 2024-05-06 20:5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랬어요. 그러니깐 저는 로체스터의 그런 면, 자신이 제인에게 의지해야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런 면이 전 좋았거든요. 물론 그가 가진 올드한 태도에 불만도 많이 있었지만요.

저는 꽤 오래전부터, 저 문제, 그러니까 실제의 나와 글쓰는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서요. 그니깐, 저는 작가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니니까요. 책을 읽고 그 감상을 적어내는 저 같은 독자가 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 생각에 골몰(?)했거든요. 명시적인 답을, 비비언 고닉에게서 찾아서, 정말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저의 미미한 발견의 순간을 나누고 싶어서 글을 썼는데, 오늘 다락방님 댓글 읽고 나니 용기내서 글을 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알라딘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떤 생각에서 글을 쓰는지 제가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저는 이 공동체가 제 삶에서 너무 소중하고, 또 이 곳에서의 인연이 정말 감사하거든요. 다락방님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락방님 자신을 위해서라고 썼잖아요. 전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을 위해 쓰는 글이라는 걸, 쓰는 사람이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근데, 나 자신을 위해서 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전 다락방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렇거든요. 그런 행복한 일들이 앞으로도 쭈욱~~~ 이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책읽는나무 2024-05-08 0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인 에어>가 단발 님의 인생책이 될만하단 생각을 오늘 이 글을 읽으며 생각
하게 되었어요. 단발 님 인생에서 늘 함께 하며 여러 번 곱씹으며 여러 지점들을 파악하며 짚어내는 혜안이 딱 고닉스럽단 생각도 했고, <제인 에어>가 이래서 단발 님께 인생책이로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아침에 고닉의 새 에세이를 조금 읽었거든요. 고닉도 청춘시절 읽었던 소설을 계속 반복하며 읽고 있던데 읽으면서 계속 새로운 관점과 시선을 발견하는 장면이 놀라워 한참 읽다가 아침 차리느라 잠깐 멈춤했어요.
단발 님의 페이퍼를 읽으면서 고닉과 단발 님 어쩌면 비슷한 성향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네요.ㅋㅋㅋ

전 다른 책 읽기에 급급한지라 사실 두세 번 읽는 책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돌아서면 책 내용이 죄다 사라져 버리구요.ㅋㅋㅋ
암튼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그냥 읽는 게 좋다! 는 생각으로 독서를 해왔어요.
하지만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 ‘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제 이웃 알라디너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맞아, 맞아. 공감 많이 하고 있고, 또 공을 들여 쓰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읽을 수 있고, 그 주체적인 삶과 생각에 공감하며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공간도 어쩌면 한 권의 책을 읽는 느낌과 흡사합니다. 끝없는 이야기로 구성된 제법 두꺼운 책을 펼쳐든 기분이랄까요?^^;;
암튼....저도 30명 안에 들려고 겨우 비집고 막차에 올라타긴 했는데...둘러보니 어쩌면 31명 독자를 채워 머릿 수를 늘게 한 독자일 수도 있겠어서 기쁩니다.ㅋㅋㅋ

단발머리 2024-05-09 06:37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이 이리도 인정해주셔서 너무 기쁩니다. 책나무님의 댓글로 ‘제인 에어‘는 이제 영원히 제 인생책이 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여러번 반복해서 읽는 책이 많지는 않은데요. 근데, 저는 교회 다니니까 성경을 읽잖아요. 성경을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라도 대강은 알고 있는 조건에서, 성경 읽기는 무조건 ‘다시 읽기‘거든요. ‘반복해서 다시 읽기‘요. 그래서, 다시 읽고, 반복해서 읽는게 저한테는 그렇게 많이 어려운 게 아닌거 같아요.

근데, 저도 신간 ㅋㅋㅋㅋㅋ 읽고 싶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읽고 싶어서요. 어제도 읽던 책들 미뤄두고 또!!! 새 책을 시작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데모>입니다, 그 책은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자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소중한,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30분만 모시는 건 아닙니다만 거의 30분 내외) 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쓰는 시간도 즐겁지만 책나무님처럼 귀한 댓글 달아주시는 분이 계셔서 감사해요. 항상 전해주시는 격려와 응원의 말씀 덕분에 다시 또 즐겁게 글 쓸 수 있는 거 같아요. 저도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얼른 책나무님도 투비의 <먹다> 연재의 자리로 돌아오시길 바래요. 상황이 안정되고 책나무님도 에너지 보충 다 하신 후에요. 진지한 독자인 제가, 딱!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내가 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베일리. 다른 베일리도 있다. 요즘 뭐, 베일리 풍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단 조나단 베일리가 있고, P. 베일리(P. 베일리, 나만의 그대여....)가 있고, 그리고 베일리 한 명 더 있다.





몸이 느끼기에는 작년보다 훨씬 수월하다. 체력이 좋아졌다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내 몸이 이 생활에 적응한 것처럼 느껴진다. 정신적으로는 작년보다 고되다고 할 수 있는데, 작년에 경험하지 못한 빡침의 순간들이 여러 번 찾아와서, 이제 내가 진짜 직장인이 되는건가, 싶기도 하다. 인생은 원래 고행이고, 고된 것이 기본값이라고 되뇌이기엔 퇴근 시간이 너무 빨라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안 된다고 본다.



작년에는 짬짬히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지는 못해도 알라딘 눈팅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엔 그럴 시간이 없다. 작년이 천국이었구나,를 올해 깨달았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만, 또 그걸 쓸 시간이 없고.



나는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아니라는 걸 발견했다는 건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발견했다는데 나는 또 ‘굳이’ 작은 ‘의미’를 둔다. 일찍 퇴근해서 작년처럼 바닥에 키스하지 않지만, 식탁에 앉으면 책을 펴기보다는 유튜브에 접속을 하고, 그리고 포털에 들어가 뉴스도 읽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허송세월.



그 와중에 독서대에 올려둔 책은 이 책이다.














투비에 자주 가지는 않는데, 투비 갔을 때 읽은 장강명의 글이 눈에 들어와 도서관에서 대출해 왔다. 앞에 조금 읽어보니 사야할 책이어서 사야지, 사야지, 어서 사야지, 하고 있다. 이 책을 사야지, 라고 결심한 지점은 여기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주의 기원과 인간 진화의 역사를 살펴봐야한다는 바로 거기. 그 문단.




나는 인간의 죽음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책들 중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책들이 가는 길을 쪼금 안다. 죽음 현상을 탐구하고 이해해 보려 하다가, 노력을 조금 하다가, 결론은 하나로 모아진다. 우리,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죽는다. 당신도 죽는다. 죽음을 받아들여라.













인간의 삶이 아무리 무의미할지라도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그 무의미를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부조리의 영웅이 되는 길이요, 우리의 부조리한 인간 조건에 대한 진정한 반항인이 되는 길이라고 카뮈는 역설한다.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46쪽)



죽음과 타협하라.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무섭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용기, 연민, 그리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불어넣음으로써 삶을 숭고하게 만든다. 의미와 가치, 사회적 관계, 영성, 개인적 성취, 자연과 동일시, 순간적인 초월 경험을 자기 나름대로 잘 조합함으로써 영원히 지속될 의미를 찾으라. 이런 방도를 제공하는 문화적 세계관을 장려하고 불확실성 및 자기와 다른 신념을 품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 (<슬픈 불멸주의자>, 345쪽)



나는 과학책, 특히 빅히스토리를 다룬 책들이 가는 길을 쪼금 안다. 우주의 시작과 생명체의 출현, 지구의 변화와 그와 함께 이어지는 지난한 진화의 과정. 그리고 그 결과물 혹은 총체로서의 인간. 당신은 그 모든 돌연변이의 운좋은 결과물이다. 우리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은 이미 죽는 중이고, 결국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창출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미 우주의 타임라인을 조망한 우리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엔드 오브 타임>, 455쪽)



나는 이러저러한 결론이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게 맞는 답인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매일 묻는다. 명랑하고 긍정적인 내가 묻는다. 내 인생의 조건과 환경에서 대부분의 경우 낙관적이었고, 앞으로도 낙관적일게 분명한, 내가 묻는다. 내 삶이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한 삶 너머가 궁금해서 묻는다. 그 답으로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이 오늘, 바로 지금 나의 삶을 지속할 만한 이유가 되는가. 합당한 이유가 되는가. 그 이유가 내게, 충분한가.



직딩, 내 표현으로 하자면, 피라미드 조직의 제일 아랫칸에 위치한 나는, 이런 고민을 매일 안고 사는 나는, 저 책을 독서대에 올려 놓고. 올려 놓고는 읽지는 않는다. (어제 반납해서 이젠 읽을 수도 없다.) 아렌트 전기와 아렌트 책을 미뤄놓고 있고, 아직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의 4번째 책도 마치지 못 했다. 그래서 맨날 노트북과 놀다가 지친 내가 지난 주말에 읽은 책은, 바로 이 책. <Love on the Brain>.














표지가 마음에 안 드는 이 책. 다행이다. 남자주인공은 마음에 든다. 이 책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나와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 그녀에게 내가 이 책을 샀음을, 그리고 핸드폰으로 쭉쭉 넘기며 대충이지만 다 읽었음을, 나는 말해줘야 하고. 그리고 다시 읽어야 한다.




그저께 난데없이 제정신이 조금 돌아와서 읽은 책은 이 책이다. 엘렌 식수, 내 스타일인가. 내 스타일 아닌가. 사람 이름 항상 헷갈리는 나는 엘렌 식수랑 이리가레 맨날 헷갈리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 엘렌 식수인지 이리가레인지도 모르면서 읽는다. 5월 여성주의책 같이 읽기 대상도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찾다가 발견해서 읽는다. 어제는 이런 문단을 만났다.













읽기는 또 몰래 하는 은밀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걸 인정하지 않지요. 그건 당황스럽습니다. 읽기는 우리 주장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서재 열쇠를 훔쳐야 합니다. 읽기는 도발이고 반란입니다. 우리는 그냥 단순한 문고본을 펼치는 척하면서 책의 문을 열고는, 백주에 탈출하는 겁니다! 우리는 더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읽기는 그런 것입니다. 그 방을 떠나지 않았다면, 담을 넘지 않았다면, 읽고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 있는 체하고 있다면, 가족들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읽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먹고 있습니다. 읽기는 몰래 먹기입니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44쪽)




그러니깐 지난 주말에 로맨스를 두 권 읽었는데, <Love on the Brain>은 이북이라 핸드폰을 휙휙 넘겨가며 읽는라 다들 내가 핸드폰 하는 줄 알았는데, 이 책은. 아, 이 책은 책이라, 숨겨가며 읽어야했고. 우리집 사람들은 책은 안 읽어도 내가 읽는 책에는 다들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종족들이라 조심해야 했고. 특히 눈이 좋고 영어를 빨리 읽어제끼는 큰애가 제일 위험하며. 나는, 엘렌 식수의 말처럼, 그렇게 ‘가족들의 시선을 속여가며’ 이 책을 읽었으니, 그 책은 바로 이 책. 제목부터 부끄러운 이 책이며. (내 책은 다른 표지인데 알라딘에는 없는 듯하다. 내 책의 표지는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다.)















이 책의 저자가 바로 베일리, 테사 베일리인 것이다. 세 명의 베일리 중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잠깐 고민에 빠질 것이고,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람, 그리고 나로 하여금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 중에. 나는 발칙하게도,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니, 내가 선택한 베일리는.



그 베일리다. 베일리, 그 베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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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5-03 1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시간이 있잖아요? 수다 떠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춤추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혼자 까페 앉은 시간이 될 수도 있고요. 제 경우에도 그런 시간이 몇 개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신뢰하는 사람의 글을 조용히 혼자서 맛있는 것 먹으면서 천천히 읽기’ 입니다. 좀전에 단발머리 님의 글이 올라와서 일단 걸으면서 후루룩 보고, 지금, 소울푸드와 함께 다시 천천히 읽었어요. 저는 이 시간 너무 좋아하는데 단발머리 님덕에 그런 시간을 가졌어요. 고마워요.

단발머리 2024-05-04 12:40   좋아요 1 | URL
‘신뢰하는 사람의 글을 조용히 혼자서 맛있는 것 먹으면서 천천히 읽기’는 저 역시 무척 좋아하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일상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 순간 말이지요. 공감하게 되고, 활짝 웃게 되고, 그리고 그 사람이 먹는 걸 먹고 싶어지는 그 놀라운 마법의 순간.
전 다락방님의 글 읽으면서 그런 순간 많이 누리는 사람이라… 그 감사한 ‘고마워요’를 다락방님께 돌려드립니다. 고마워요, 다락방님! 💕

다락방 2024-05-03 1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 메이크 미… 오른쪽 표지 어쩔;;

단발머리 2024-05-04 12:41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저도 이걸 뺄까….. 를 3번쯤 고민했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4-05-04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06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4-05-04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세히 보니 츄러스인 듯 합니다.
저 글과 어떻게 매칭이 될지?^^

단발머리 2024-05-06 21:07   좋아요 1 | URL
급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줄 알았던 나 - 출근하니 책을 한 자도 안 보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 읽어도 가벼운 책을 손에 드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 (츄러스 먹으면서)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연결 괜찮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