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샷 뒤의 여자들 - 피드 안팎에서 마주한 얼굴
김지효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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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아홉 번째 선정 도서

(모임 날짜: 2024년 4월 27일 토요일)





세상에 처음 나오자마자 혁명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된 책이 있다. 이런 책은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해 온 관습과 도덕을 파괴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책은 엄청 뜨겁다. 그 책을 펼치자마자 확 퍼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는 독자들의 눈빛을 달군다. 종이 위에 펼쳐진 혁명을 느낀 독자의 눈은 뻘겋게 달아오른다. 책의 열기에 흥분한 독자는 혁명가가 된다하지만 책에서 뿜어나오던 혁명의 불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뜨겁게 활짝 핀 혁명의 불꽃은 점점 시들어 간다. 불꽃이 완전히 사라진 책은 한 줌의 재가 된다. 햐안 재 속에 뜨겁지 않은 과거가 된 단어, 혁명이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은 수많은 혁명가를 키운 책을 기억하거나 칭송하기 위해 고전이라고 부른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세상을 다시 한번 흔들 만한 열기와 힘을 여전히 품고 있는 책도 있다. 이런 책은 휴화산과 같다. 과거에 세상을 요동칠 정도로 크게 한 번 혁명을 분출했지만, 지금은 멈춘상태다책 속의 혁명은 완전히 죽지도 않았고, 케케묵은 과거도 되지 않았다휴화산 같은 책은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언젠가는 다시 터진다. 다시 한번 혁명을 일으킬 만한 힘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래서 과거에 혁명이라 불리던 책들은 지금 다시 봐도 새롭다







[대구 페미니즘 독서모임 <레드스타킹> 첫 번째 선정 도서, 2017년 10~11월 총 6주 모임 진행]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민예숙 · 유숙열 함께 옮김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


* 한우리 기획 · 옮김 페미니즘 선언: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현실문화, 2016)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 스물다섯 살에 쓴 성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Sex)1970에 나온 책이다. 이 책을 읽고 페미니스트가 된 여성이 많다. 성의 변증법은 가히 혁명적인 책이라 할 만하다파이어스톤은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가족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비혼과 비출산을 제안한다. 파이어스톤은 1970년대 초반 당시에 현실성 없는 공상과학 기술로만 알려진 인공 생식(artificial reproduction)을 진지하게 논의한다. 그녀는 인공 생식이 가능해지면 여성은 고통스러운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남성 또한 출산하고 양육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시대를 앞서간 이 책을 고전이라고 부르는 독자들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성의 변증법을 고전이라는 진부한 단어 대신에 휴화산 같은 책이라 부르고 싶다.






2018년에 만들어진 <레드스타킹> 책갈피.


책갈피 뒷면에 모임 때 읽은 책들과 다음에 읽을 책 제목이 나열되어 있다나는 2018212일 월요일에 처음으로 <레드스타킹> 모임에 참여했다이때 네 번째 선정 도서인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젠더 무법자: 남자, 여자 그리고 우리에 관하여(바다출판사, 2015, 절판)를 읽었다.




파이어스톤의 생각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또 한 번 혁명의 불꽃이 되어 피어올랐다. 국내의 젊은 급진적 페미니스트(Radical feminist)들은 SNS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비혼과 비출산을 생물학적 여성을 위한 삶의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여성의 몸을 통제해서 남성의 욕망만 충족시키는 연애를 거부하기 위해 비연애와 비 섹스를 주장했다. 파이어스톤은 출산과 가족 제도를 비판했지만, 연애와 섹스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나는 에로티시즘(성의 변증법225)’을 옹호했으며 에로틱한 불꽃이 없는 삶은 지루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여성과 아이들에게 성적 자유를 허용하는 세상을 꿈꿨다(같은 책, 297).


파이어스톤은 사랑을 다루지 않은 급진적 페미니즘 책은 정치적으로 실패작이라고 했다(같은 책, 183). 그녀는 출산보다 훨씬 더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요인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비판하는 여성의 사랑은 남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승인(approval)받기 위해 헌신하고,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의존하는 형태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 여성은 절박한 심정으로 연애에 매달린다. 좋은 남자를 만나 연애하면 결혼할 수 있고, 한 남자로부터 사랑받는 행복한 여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성은 남성의 승인을 받지 못한 여성이 된다. 여성은 자신들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사랑을 한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가 만든 연애를 끊지 못한 여성은 진짜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이 여성은 언젠가 남편이 될 사랑꾼을 잘 만나서 잘살고 있다고 만족하지만, 그녀의 삶은 남성의 감정과 욕망에 끼워서 맞춰져 있다.


인생샷 뒤의 여자들: 피드 안팎에서 마주한 얼굴은 소위 인생샷이라고 부르는 셀카를 자주 찍는 여성들의 감정 상태와 생각들을 다각도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젊은 여성들이 왜 인생샷 찍기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싶어서 열두 명의 20대 여성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한다기성세대는 셀카 문화를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일로 치부한다. 어른들이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한참 멋 부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철부지다. 하지만 인생샷 뒤의 여자들은 셀카를 단순히 보여주기식 문화로만 바라보는 기존 분석을 거부한다. 이 책의 저자가 만난 여성들이 셀카를 즐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딱 한 가지 이유만 집어서 셀카 찍는 여성들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녀들도 셀카 문화의 부작용을 안다. 그러면서도 인터넷 세상에서 만난 익명의 타인에게, 또는 인터넷 세상 밖에 만나는 실제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셀카를 찍는다. 비록 실제 모습과 다르지만, 그녀들은 셀카를 여러 번 보정하면서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SNS는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음’, ‘존중받음’, ‘인정받음을 확인해야지 관계가 맺어지는 만남의 장소. SNS에 접속한 여성들은 익명의 타인들이 좋아할 만한 셀카를 찍어서 온라인 인맥을 넓힌다. 내가 찍은 셀카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은 ‘SNS 친구가 된다. SNS 친구의 수를 많이 늘리려고 타인의 셀카에 좋아요를 눌러준다반면 셀카를 찍되 보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타인의 시선에 의식하지 않으며 최대한 자신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려고 한다.








인생샷 뒤의 여자들사랑과 인정 욕구를 모두 다룬 페미니즘 책이다. 만약 저자가 럽스타그램’ 관련 사진(연애하는 이성과 같이 찍은 사진 또는 남자/여자친구가 여자/남자친구를 찍어준 사진)을 찍는 여성페미니스트로 인정받기 위해 SNS 계정에 탈코르셋사진을 찍어서 공개한 여성을 만나지 않았으면, 이 책은 ‘2% 부족한 실패작이 되었을 것이다저자는 연애하는 여성들이 사랑꾼남자친구의 선택을 받은 행복한 여성임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럽스타그램 사진을 남긴다고 분석한다. 결국 여성들은 한 남자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 사랑을 하고 사진을 찍어서 모두에게 공개한다. 저자는 연애하는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는 럽스타그램에서 불평등한 이성애 중심 성별 권력 구조를 읽는다. 파이어스톤이 지금 살아 있었으면 럽스타그램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분석에 동의할 것이다.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SNS에서 남성 중심 문화를 향해 줄기차게 비판해 왔다. 그녀들의 공개 발언은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저자는 SNS 여성 운동이 페미니스트가 된 나를 전시하는 기능으로 사용되는 점을 비판한다. 페미니스트는 동료 페미니스트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페미니즘적 발언을 하고, 페미니즘에 반하는 발언과 이미지를 되도록 SNS에 공개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검열한다.


모든 남성이 선호하는 ‘완벽한 여성이 없듯이 이 세상 모든 페미니스트로부터 인정받는 완벽한 페미니스트도 없다. 페미니스트도 연애할 수 있으며 결혼도 할 수 있다. 예전부터 비혼, 비연애, 비 섹스를 줄기차게 주장해 오던 페미니스트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면 그녀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면서 조롱해야 할까? 페미니즘과 연애/결혼이라는 갈림길 앞에 선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부딪힐 때 어떤 삶이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삶의 길을 동시에 가기로 결정했다.[주1] 힘든 결정을 내린 그녀들을 응원해줘야 한. 어떤 페미니스트는 죽을 때까지 일상생활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녀의 결정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서 당연히 응원해줘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인정받으려고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 인생길들을 하나둘씩 제거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지루하고 때로는 위태롭다. 인생의 재미만 놓치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될 자신의 한계를 애써 외면한다SNS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면 자신의 단점을 끝까지 숨겨야 한다. 자신의 진짜 삶을 스스로 갉아먹으면서까지 여성 운동을 하고, 페미니스트로 승인받기 위해 애쓰면서 산다면 진짜 나는 사라지고 없다.





[주1] 페미니스트의 삶을 포기하고 연애와 결혼을 선택하는 여성도 있다.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는 결혼을 했는데, 과거에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페미니즘 관련 글들을 모조리 지웠다(비공개로 전환한 것일 수도 있다).




* 33



 



 얼짱 1기였던 구혜선은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MBC 시트콤 <논스톱 5>의 주인공이 되었고, 박한별은 영화 <여고괴담>에 캐스팅되었다. [2]


[2] 박한별이 주연으로 데뷔한 첫 영화는 2003년에 개봉된 <여고괴담 3-여우 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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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5-16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 중에 페미니즘 문학이라 볼 수 있는 책은 부끄럽게도 82년생 김지영이 다인 것 같습니다. 좀 더 분발해야겠어요. 공교롭게도 저는 어제까지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한방에 몰아보고 (장장 6시간의 편집영상이에요!) 오늘부터는 아들과 딸을 보고 있는데요. 재미는 있는데 아들과 딸은... 혈압 오르네요. 이 두 드라마가 모두 90년대에 방영된 작품인데 (저는 당시 초등학생), 지금 다시 보면서 아니 미친거 아님?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걸 보니 그래도 지난 30년간 장족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stella.K 2024-05-1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횡무진이군. 건강 잘 챙겨라.
 





겨울, 113일 금요일에 쓴 금정연의 일기는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져 있으면서도 여백에서 쌀쌀한 바람이 나온다. 이 일기에 인용된 마크 트웨인(Mark Twain)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일기는 1월에 쓰였다. 그들 모두 희망적이지 않은 자신의 처지와, 그것으로 인해 처량해진 기분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추운 날씨를 언급한다
















* 금정연 매일 쓸 것뭐라도 쓸 것: 마치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북트리거, 2024년)





금정연은 마지막으로 인용한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의 일기만이 그나마 분위기가 조금 밝은 편이라고 썼다. 로버트 스콧은 남극 탐사대를 지휘한 영국의 군인이다스콧과 노르웨이의 아문센(Roald Amundsen)은 제일 먼저 남극점에 도착하기 위해 경쟁한다. 19111214, 아문센 남극 탐사대가 역사상 처음으로 남극점을 밟았다. 35일 늦게 남극점에 도착한 스콧 탐사대는 허탈한 마음을 짊어진 채 다시 기지로 돌아간다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칠 대로 지친 스콧과 탐사대원들은 결국 기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얼음 길 한가운데서 전원 사망한다.


115일에 쓴 금정연의 일기에도 스콧이 언급된다. 115일 일요일, 금정연은 가족과 함께 눈썰매장에 가다가 교통 체증을 겪게 된다. 금정연 가족이 탄 차는 엄청난 양의 눈발이 날리는 왕복 2차선 국도 한가운데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그 순간 금정연은 스콧의 일기를 떠올린다.



 도로 옆에는 어느덧 눈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대설주의보? 대설경보? 아무튼 눈이 많이 온다고 운전을 자제하라는 긴급 재난 문자가 거듭해서 왔다. 그런데 어쩐담? 안내가 조금 늦은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로버트 팰컨 스콧의 일기를 떠올렸다. 눈이 내리는 남극에서 개썰매를 타고 달리던 스콧과 그의 대원들을, 그리고 그들의 최후를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금정연,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중에서, 171)

 


금정연은 스콧 탐사대가 개 썰매를 타고 남극에 갔다고 썼다. 사실이긴 한데, 스콧은 남극을 탐사하기 전부터 개 썰매를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개 썰매의 실용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스콧은 개 썰매가 아닌 말 썰매와 전기 모터가 달린 썰매를 준비했는데, 스콧의 안일한 선택은 남극 탐사가 실패하게 된 요인이 된다. 말은 매서운 남극의 추위 앞에서 버티지 못했고, 전기 썰매는 얼음 길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얼음 길이 전기 썰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독자라면 스콧 탐사대가 처음부터 개 썰매를 능숙하게 탈 줄 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스콧은 스키조차 탈 줄 몰랐다. 스콧 탐사대원 중 유일하게 스키를 탈 줄 아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그는 노르웨이 출신 스키 챔피언이었다(불행하게도 그는 타국 탐사대에 합류하여 같은 국적의 아문센이 이끈 남극 탐사대와 경쟁하는 상황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아문센은 스콧과 다르게 남극 탐사를 철저하게 준비했다. 스키 타는 법을 익혔으며 이누이트와 친해지면서 개 썰매를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 로버트 팔콘 스콧, 박미경 옮김 세상 끝 최악의 탐험 그리고 최고의 기록: 삶과 송두리째 바꾼 남극 탐험 500여 일의 기록(나비의활주로, 2017)

 

* [절판] 로버트 팔콘 스콧, 박미경 옮김 남극 일기: 남극의 비극적 영웅, 로버트 팔콘 스콧(세상을여는창, 2005)

 

* [절판] 라이너 K. 랑너, 배진아 옮김 남극의 대결, 아문센과 스콧: 아문센 대 스콧, 그들의 세기적 대결과 엇갈린 운명(생각의나무, 2004)





금정연이 참고한 스콧의 일기는 2005년에 남극 일기라는 단출한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마침 그 해에 송강호와 유지태가 출연한 영화 <남극 일기>가 개봉되었다. 스콧의 남극 일기는 절판된 책이었다가 2017년에 촌스러운 제목과 표지를 싹 바꾼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역자는 바뀌지 않았다책의 저자명은 로버트 팔콘 스콧으로 되어 있다.


아문센과 스콧의 남극 탐사 원정은 유럽 강대국들이 제국주의를 내세워 본격적으로 다른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남극의 대결, 아문센과 스콧: 아문센 대 스콧, 그들의 세기적 대결과 엇갈린 운명은 마치 어느 제국주의가 위대한지 뽐내려고 하는 국가 대항전 같은 분위기로 시작된 남극 탐사 원정의 뒷이야기와 두 탐사대의 여정을 상세하게 정리한 책이다. 당연히 이 책에 스콧의 일기가 많이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스콧 탐사대원의 일기도 인용된다. 이 책에 일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스콧의 감정 상태와 그런 스콧을 바라보는 대원들의 시선이 한데 엮어져 있다.







‘1등만 기억하는 역사에 반기를 드는 역사가들은 스콧의 편에 서서, 그의 실패한 남극 탐사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한다. 물론 대부분 역사가는 군인 정신만 있으면 남극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은 스콧의 오만함을 지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문센과 너무 비교될 정도로 남극 탐사를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스콧의 지도력은 자신을 포함한 탐사대원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치명적인 패인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스콧의 두 얼굴을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스콧을 위대한 패자로 평가받을 만한 탐험가로 칭송한다. 한편 아문센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스콧의 부족한 능력만 집요하게 비판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콧의 모습은 말끔하게 생겼으나 탐험가 자질이 부족한 영국 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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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들 - 다중우주의 비밀을 양자역학으로 파헤치다
로라 머시니-호턴 지음, 박초월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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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  ★★★★☆  A





우주는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든 과학에 별 흥미 없는 사람이든 이구동성으로 우주는 빅뱅(Big Bang)’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빅뱅, 즉 대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우주의 모습은 특이점(singularity)이었다. 모든 물질이 모여 있는 특이점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우주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우주는 지금도 커지는 중이다.


그런데 우주의 시작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견해들이 주목받고 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빅뱅이 일어나서 현재 우주가 될 확률을 계산했다. 그가 내놓은 확률값은 놀랍게도 거의 0에 가깝다! 펜로즈는 우주가 태어나면서 점점 커지는 상태가 과거에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정말로 운좋게 우주가 생겼어도 결국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우주의 기원을 확인하기가 어려워도 여전히 과학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철저히 숨기는 우주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기존 견해를 회의적으로 접근하며 그것이 타당한지 검증한다.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는 일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료 과학자들의 반박과 비판을 받아들이는 일을 선호한다. 과학자들도 인간인지라 익숙한 것과 거리를 두면서 연구하는 것을 낯설어한다. 이미 검증된 이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안정적인 우주론을 선호한다. ‘안정적인 우주론은 모든 과학자가 옳다고 인정한 법칙만으로 우주의 기원과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을 뜻한다. 안정적인 우주론의 대표적인 예가 단일우주론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는 단 하나뿐이다반면 다중우주론은 불안정한 우주론이다. 단일우주론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과학자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이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주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단일우주론 지지자는 다중우주론을 SF에 나올법한 이야기로 치부한다.


알바니아 출신의 이론물리학자 로라 머시니-호턴(Laura Mersini Houghton)은 다중우주론 지지자다. 그녀는 양자역학을 이용해 현재 우주가 다중우주의 일부인지를 설명한다우주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을 보여준 그녀의 책 ‘Before The Big Bang(원서는 2022년 출간)’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호턴은 우주론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뿐만 아니라 단일우주론을 지지하는 독자 또는 과학자들에게 자신이 왜 다중우주론을 주장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들은 정말로 보기 드문 친절한 과학책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다중우주론을 설명하지 않는다. 먼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준 이론이다. 그동안 중력은 물질을 움직이게 만드는 으로만 인식됐는데, 일반상대성이론이 알려준 중력은 휘어진 공간이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양자는 입자와 파동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 심지어 입자였다가 파동으로, 또 파동이었다가 입자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면 아무리 뛰어난 관측 기술이 있다고 해도 양자 상태를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양자의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또 양자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덕분에 과학자들은 우주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고, 우주론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저자는 끈 이론(string theory)평행우주론(Parallel Universe)과 같은 불안정한 우주론의 특징과 한계를 설명한다. 과거에 주목받은 여러 우주론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 바로 저자가 제안한 양자 경관 다중우주론이다저자가 생각하는 양자 다중우주는 여러 갈래로 된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파동을 함수로 표현하면 여러 우주가 탄생할 확률은 모두 0이 아니라 제각각 다른 확률이 나온다. 양자 다중우주 속에 우주가 탄생할 확률이 0인 우주와, 0이 아닌 우주가 있는 것이다이 우주론 역시 완벽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불안정한 우주론에 속한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만만하다. 양자 다중우주론의 단점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유를 알려준다. 저자는 계산과 관측 자료를 근거로 내세워 다중우주론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양자 다중우주론의 타당성을 근거로 내세워 우주의 탄생을 불가능하다고 본 펜로즈의 계산 결과가 틀렸음을 밝힌다.


불안정한 우주론은 연구할 가치가 없는 이론이 아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계속 연구해야 할 이론이다. 안정적인 우주론은 완전히 닫힌 상태. 닫힌 상태를 유지하는 이론은 겉으로 보기에 편안해 보여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를 설명하지도 못한다. 닫힌 마음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 불안정한 우주론은 열린 상태. 열린 상태의 이론을 연구하는 열린 마음의 과학자들은 검증받는 일을 좋아한다. 동료 과학자들의 외면과 무관심은 가설이 이론으로 발전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가설이 이론이 되지 못한 것을 실패한 결과가 아닌 배우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열린 마음의 과학자는 넘어져도 아쉬움을 툴툴 털어 버리고 다시 연구를 시작한다.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도 사실 세상에 처음 공개될 당시에 불안정한 이론이었다. 두 이론을 지지한 과학자들은 주류 이론에 과감히 도전한 열린 마음의 과학자였다재미있게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오랫동안 과학계를 군림해 온 뉴턴(Isaac Newton) 고전역학을 뒤집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주장한 열린 마음의 과학자였다. 하지만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예측할 수 없다고 보는 양자역학 앞에서는 닫힌 마음의 과학자가 되었다아인슈타인을 모순적인 과학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게 우리가 알아야 할 진짜 과학자의 모습이다. 과학자는 세상의 이치를 완벽하게 설명할 줄 아는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과학자는 모순적이라서 친근하다. 과학자는 끈질기게 연구해서 기존 이론에 도전하는 용기를 가졌으면서도 때로는 친숙한 이론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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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Me)



No. 5











<Kim Yun Shin>

장소: 국제갤러리

전시 시간: 2024319~ 2024428

2024427일 토요일 오전 10시경에 만남.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서로 다른 둘이 만나면 하나가 되고, 하나는 다시 둘이 된다동양고전에 나올 법한 이 여덟 글자는 조각가 김윤신의 연작 제목이다김윤신은 1970년대부터 <합이합일 분이분일> 연작 조각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조각 작품의 재료는 오래되고 못생겨서 쓸모없는 나무다. 작가는 전기톱으로 나무를 잘라서 작품을 만든다합이합일은 작가와 조각 재료인 나무가 하나가 된 상태다. 작가는 나무를 자르고 쪼갠다. ‘분이는 나무는 작가의 톱질에 분해되는 과정이다. ‘분일은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다.


 

















* 후지하라 다쓰시, 박성관 옮김 분해의 철학: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사월의책, 2022)





합일합이 분이분일은 자연계의 모든 물질이 순환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서로 다른 재료를 조합하면 새로운 물건이 완성된다(합일합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의 상태는 변하고물건의 품질이 떨어지면서 분해된다(분이분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분해는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부정적인 현상이다. 모든 존재가 분해되면 갈라지고, 부서지고, 썩어가고, 파괴되고, 쓸모없는 상태가 된다한마디로 말하면 사물이 분해되면 쓰레기가 된다하지만 생태학 관점에서 바라보는 분해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분해된 것은 망가진 것도, 쓸모없는 쓰레기도 아니다. 언제든지 재사용하거나 재활용할 수 있다분해돼서 남은 자연의 여분은 새로운 사물 또는 생명체가 탄생하는 데 이바지한다.


환경사를 전공한 일본의 철학자 후지하라 다쓰시(藤原辰史)분해의 철학에서 돈이 되는 사물을 만들어서 생산하는 사회덧셈과 곱셈의 세계로 비유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분해되고 부패해서 쓰레기가 되거나 완전히 소멸한다. 분해가 일어나는 세계는 뺄셈과 나눗셈의 세계.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2002-789 (2002년, 맨 왼쪽)

합이합일 분이분일 2002-790 (2002)

합이합일 분이분일 2016-3 (2016)

합이합일 분이분일 1978 (1978년, 맨 오른쪽)




후지하라 다쓰시는 부패가 더 미적이고 더 역동적인 작용(분해의 철학》 51)’이라고 말한다<합이합일 분이분일> 나무 조각 연작은 생태학적 조각이다. 작가의 나무 조각에 분해와 재생이 새겨져 있다. 못 쓰는 나무는 자연적으로 부패하거나 인간에 의해 분해돼서 생긴 부산물이다. 작가를 만난 죽은 나무 조각들은 살아있는 조각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2019-14

2019

 




지난달 4월에 종료된 국제갤러리의 김윤신 개인전에 톱으로 자른 나무 조각들을 쌓아 올려서 만든 목재 조각 작품색을 입힌 나무 조각들을 이어 붙인 작품들이 공개되었다(회화 작품도 전시되었다). 하지만 작가의 목재 조각 작품 재료에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합이합일 분이분일 2019-14>의 재료는 폐목과 못이다


















* 프랜시스 마르탱, 박유형 옮김 숲 아래서: 나무와 버섯의 조용한 동맹이 시작되는 곳(돌배나무, 2022)


* 멀린 셸드레이크, 김은영 옮김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아날로그, 2021)




나무 조각에 박힌 못은 마치 썩은 나무에 자란 버섯 또는 균류(菌類)를 연상시킨다버섯은 죽은 나무에 무리를 지어 자라며 죽은 나무의 영양분을 먹는다. 버섯은 균류에 속하는데, 균류는 동물도 식물도 아닌 독립된 생물군()으로 분류한다. 균류는 생태계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한다. 바로 부패. 균류는 죽은 나무와 동물의 사체에 있는 영양분을 흡수한다. 분해와 부패를 일으키는 균류는 무기질과 같은 여러 화학물질을 만든다. 무기질을 만드는 균류 덕분에 흙은 비옥해지고, 새로운 식물이 흙의 영양분을 먹으면서 자란다. 균류가 없으면 지구는 사람이 버려서 썩지 않는 쓰레기와 자연이 남긴 쓰레기(썩지 않은 동물 사체와 죽은 식물)가 흘러넘치는, 아주 지저분한 별이 되고 만다최근에 식물학자들은 지구 생태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나무와 버섯 또는 균류의 공생 관계를 주목한다.


김윤신의 목재 조각 작품은 ()든 탑이다. 하지만 목재 조각 작품 또한 시간의 흐름과 오직 무질서로 향하는 엔트로피(entropy)의 보이지 않는 힘을 피할 수 없다. 목재 조각 작품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분해되고, 파괴될 것이다(목재 조각 작품은 불에 약하다). 작품이 해체되는 과정은 작품 제목인 <합이합일 분이분일>분이분일에 해당한다. 가수의 운명이 가수가 직접 부른 노래 제목에 따라가듯이, 김윤신의 목재 조각 작품은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제목을 따라간다. 합쳐진 둘이 분해되면 하나가 되지만, 이 하나마저 분해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완전히 소멸되는 상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맞이하게 될 진정한 ()’이다()든 탑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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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헌사

 


틈만 나면 내게 금정연정지돈의 글이 재미있다고 알려준 서한용 씨에게

오늘, 이 글이 태어날 수 있게 내 옆에서 여러 번 도움을 준 

산파 서한용 씨에게.





Scene 2

루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이 아닌: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문학동네, 2021)

 

* 장 자크 루소, 문경자 옮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문학동네, 2016)




토요일과 일요일, 나는 혼자였다. 정지돈은 산문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이 아닌>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첫 문장을 인용했다.



 마침내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나 자신 말고는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교제할 사람도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사교적이고 정이 많은 내가 만장일치로 인간 사회에서 쫓겨난 것이다.

 

(장 자크 루소, 문경자 옮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첫 번째 산책중에서, 7)



마침내 나는 주말 외톨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루소처럼 만장일치로 인간 사회에서 쫓겨난 외톨이는 아니다. 나는 루소와 반대로 사교적이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사교적이지 않아서 외톨이로 지낸 시간이 많았다. 책을 읽으면서 홀로가 된 시간을 보냈다


토요일, 오랜만에 두류도서관까지 걸어서 갔다. 걸어서 책의 세계 속으로. 루소가 산책하는 심정으로 루소의 뿔처럼 혼자서 갔다.





Scene 3

나는 왜 쉬는 날에 일기를 쓰는가

 















* 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에세이(한겨레출판, 2010


이 책은 오래전에 내가 활동했던 알라딘 신간 도서 평가단선정 도서. 출판사는 홍보 목적으로 알라딘 신간 도서 평가단 정회원들에게 책을 무료로 제공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은 정회원은 정해진 기간 안에 서평을 써야 했다. 



그러게‥…? 내가 봐도 이상하. 평소에 안 쓰던 일기를 노동절에 썼고, 어린이날을 삼켜서 더욱더 빨개진 주말에 두 번째 일기를 쓰게 됐다. 이건 뭐, 주말 부부도 아니고‥…. 이런, 결혼하지 않아서 내가 주말 외톨이였구나. 부인(婦人)이 없다는 사실을 부인(否認)하지 않겠다.





Scene 4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책

















*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 2024)


금정연 매일 쓸 것뭐라도 쓸 것마치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북트리거, 2024)



 

정지돈의 신작 장편소설 브레이브 뉴 휴먼을 금요일 밤부터 읽기 시작했다. 책의 겉모습이 얇다. 나는 토요일이 된 새벽에 작은 책을 다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이 빗나갔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책은, 읽고 싶은 책을 여러 권 부르게 하는 힘을 지닌 한 권의 책이다한마디로 표현하면,책 속에 책이다. 이런 책들을 너무 많이 만나는 바람에 내가 책을 많이 샀지브레이브 뉴 휴먼은 무시무시한 마력을 가진 책 속에 책이다. 소설을 읽다가 다른 책들이 내 눈앞에 한두 권씩 나타났다. 내 눈앞에 얼쩡거리는 책들을 찾기 위해 소설 읽기를 멈추고, 책 탑을 허물기 시작했다한밤중에 책 정리 시작. 책 정리는 읽고 싶은 책을 찾기 시작하면 해야 하는 나만의 노동이다(내가 쓴 노동절 일기참조).


다행히 내가 원하던 책들을 찾았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책 탑을 다시 세워야 한다. 책 탑을 새로 쌓는 속도는 더디다. 왜냐하면 책 탑을 쌓다가 예전에 찾지 못했던 책을 만나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고. 나중에 읽어야 할 책들은 되도록 내 눈에 띌 수 있는 곳에 배치한다. 이러면 정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책 많이) 사서 고생하는 나책 많이 사서 후회하는 금정연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책장에 새 책을 둘 자리가 없어서 한참 노려보다가 그냥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왜 맨날 책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면서 또 책을 사는 걸까? 마조히스트인가?

 

(금정연매일 쓸 것뭐라도 쓸 것》 68일 일기 중에서, 93~94)

 





Scene 5

책이 없으면 서점으로

 


올해 일요일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휴일인 어린이날을 삼켰다. 그래도 일요일이 양심이 있는지 더 쉬고 싶은 우리를 위해 빨간 월요일을 뱉어냈다. 하지만 완전 공휴일이 된 일요일과 붉게 변한 월요일에 도서관은 문을 열지 않는다. 이날에 도서관이 열려 있으면 보고 싶은 책들을 빌릴 수 있을 텐데. 되도록 책을 안 사고 싶었는데. 결국 서점에 가서 책을 사기로 했다.



















* 쥘 베른, 김남주 옮김 20세기 파리(알마, 2022)

 

* [절판, No Image] 쥘 베른, 김남주 옮김 20세기 파리(한림원, 1994

※ 검색하면 역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서점에 구매한 책은 딱 한 권이다. 휴, 정말 다행이다. 내가 산 책은 쥘 베른(Jules Verne) 사후에 발표된 소설 20세기 파리. 나는 오래전에 나온 20세기 파리를 가지고 있다. 10년 전에 나온 책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대구 헌책방에서 만났다







20세기 파리는 한동안 절판된 책이었다가 2022년에 새로운 출판사를 만나서 다시 태어났다. 절판된 20세기 파리》의 번역가 김남주가 새 책의 번역을 맡았. 절판본과 새 책의 문장을 비교해 봤는데 역자가 문장을 새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22년에 출간된 20세기 파리를 구매한 이유는 이 책에 정지돈의 단편 소설 언리얼 퓨처: 22세기 서울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쥘 베른의 20세기 파리》를 패러디한 이 단편 소설의 주제는 인공 자궁과 가족 제도이다언리얼 퓨처: 22세기 서울』은 인공 자궁 기술이 허용된 미래 사회를 그린브레이브 뉴 휴먼이 나오기 전에 발표된 소설이라서 내용이 무척 궁금했다


20세기 파리전자책이 있는데도 종이책을 샀다.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20세기 파리 ‘SF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레이가 말한 은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이겠지.





Scene 6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일기















 


* 강지희, 김신회, 정지돈 외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한겨레출판, 2022)








비가 내린 일요일. 집 근처 콩나물국밥 전문 식당에 가서 콩나물이 든 잔치국수부추전 먹었다. 마신 음료는 막걸리다. 





Scene 7

지돈 일기! 어때요?



53일에 쓴 금정연의 일기유튜브를 하기로 결심한 정지돈과 주고받은 대화가 나온다. 금정연은 정지돈을 위해 유튜브 이름을 지어준다.

 



지돈티비! 어때요?”

지돈 씨가 한숨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

내가 재빨리 덧붙였다.

지식이 돈이 되는 지돈티비.”

그러자 지돈 씨가 말했다.

, 그건 좋은데‥…


(금정연매일 쓸 것뭐라도 쓸 것》 5월 3일 일기 중에서, 209)

 

 

내가 쓴 일기의 다른 제목 지돈 일기지식이 돈이 되는 일기가 아니다지돈 일기는 내가 주말에 지출한 돈’을 어디에 썼는지 공개한 일기다. 혼자서 책 사고, 혼자서 밥 먹고 쓴 일. 



이 글의 주인공은 토요일에 산책한 나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산 책들이다.

 

(내가) 산책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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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5-06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는데? ㅎㅎ 난 알고 있었다. 너 휴일이면 일기 쓰는 거. 휴일이나돼야 너의 근황을 알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두번째 사진 서점같다. 책 좋아하는 죄지 뭐. ㅋ
근데 설마 혼자 먹었던 건 아니지? 막걸리 먹어 본지가 삼백만 년쯤된 것 같다. ㅠ

cyrus 2024-05-13 06:18   좋아요 1 | URL
그날 국수 혼자 먹은 거예요. 주말에 카페에서 책 읽거나 글을 쓰면 식사는 밖에서 해결해요. 그래야 능률을 올릴 수 있거든요. 글을 써야 한다면 밥만 먹고요, 책을 읽어야 한다면 낮술을 마셔요. 그날 몸 상태와 작업 방식에 따라 메뉴와 음료가 달라요. 글을 제대로 쓰는 날이면(이때, 집중력이 높아진 상태예요.) 식사 한 끼 거를 때가 있어요. ^^;;

서니데이 2024-05-07 0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어린이날 연휴 잘 보내셨나요.
이번 연휴에 금정연 작가의 신작을 선물받아서 읽었는데, 오늘 cyrus님의 글 속에서 인용된 부분을 읽으니 반갑네요. 연휴에 비가 오는 날 맛있는 음식 드셨군요. 사진만 보아도 따뜻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cyrus 2024-05-13 06:19   좋아요 0 | URL
연휴 잘 보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평일보다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

북깨비 2024-05-09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야말로 무서운 리뷰입니다 😭 대체 책을 몇권을 더 사고 싶게 만드나요!?

cyrus 2024-05-13 06:25   좋아요 2 | URL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 한 명만 알고 지내면 무서울 정도로 ‘책 과소비’를 하게 돼요. 그 사람이 추천한 책을 사서 읽었는데, 하필 그 책 속에 언급된 책들마저 좋아하게 되면... 어휴.. 생각만 해도 무섭네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