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장재선 기자의 블로그에서 지난번 YES24주최로 열렸던 지리산 문학캠프의 장면들을 옮겨온다. 신경숙, 김훈, 공지영 세 작가가 초대작가로 참석하여 작품 낭송과 함께 독자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아래 내용은 장기자가 전부 타이핑한 것이며(그러니까 신문기사로 정리되기 이전의 날 자료이다), 중간에 오타가 난 한 문장은 건너뛰었다.

먼저, 문학캠프의 소개: "한국의 대표작가 신경숙, 공지영, 김훈과 만나는 지리산 문학캠프가 2006년 8월 24일에서 26일까지 지리산에서 있었다. 지리산 문학캠프는 YES24가 주최한 ‘네티즌 추천 한국의 대표작가 - 노벨문학상 후보를 추천하세요’의 후속 행사로, 2004년에서 2006년까지 ‘차세대 노벨문학상 후보’ 1위로 뽑힌 김훈(1회), 공지영(2회), 신경숙(3회)과 독자들이 만나는 자리였다."

모임 제목 :제 3회 네티즌 추천 한국의 대표작가 YES24 지리산 문학캠프
장소, 때 : 8월 24일 목요일 저녁 8시 전남 구례 지리산 송원리조트

사회 허순용 YES24 팀장 " 문학 지원사업으로 진행하는 행사다. 축제처럼 편안하게 즐겨줬으면 좋겠다. 오늘은 신경숙 선생 모셨다. "

신경숙 (인사말) "오면서 오랜만에 무지개를 봤다. 쌍무지개였다. 사진기가 없어서 못 찍고 눈에 담았다. 내려오면서 가끔 가끔 차창 밖을 내다보니까, 정말 오랜만에 나왔는데, 비 오는 산하를 쳐다보니까 참 좋았다.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그 현재의 순간을 기쁘게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함께 하는 동안을 충만하게 보냈으면 한다."″

 

 

 



신경숙 자선작품 <종소리>(문학동네, 2003) 낭독 시간

"종소리를 선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시간에 낸 책이기 때문.(웃음) 기차 타고 내려오면서 낭독 연습했다. "(나즈막하지만 소구력 있는 목소리. 약간 탁성의 슬픈 정조가 배어있는.)

"지루한 것을 견뎌야 하는 때가 있는 것이 그 연습이라 생각하고 들어달라.  종소리를 쓸 때 2000년대가 시작될 때였다. 옆에 자리한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거나 안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이 소통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안 해야 말이 늘어나면서 나중엔 아무 말도 안 하게 되는 사이가 된다. 서로 조금 상처가 되더라도, 내 치부가 드러나더라도 서로 말을 하고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적막한 집에 새가 날아와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는 것이 이 소설을 관통한다. 마음을 닫아버린 소통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자유로운 새가 날아온다. 남편이 병에 걸리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된다.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지점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낭독 중간에 신씨 눈시울이 붉어짐) "중간에 목이 메었다."

어느 독자로부터 제목이 총소리가 아니고 왜 종소리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산문적이지 못한 대답인데 마음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무엇을 깨고 나오면서 점점 커졌으면 하는 생각으로 종소리라고 했다...

"몇 년 전에 유영철 사건 있었는데, 뉴스를 접할 때 내상을 입었다. 신문에서 그 사건에 대해 세세히 보도했는데, 그것을 읽을 때 정말 마음이 다쳤다. 감당할 수 없는 일로 계속 다치고 그러는데, 정말 심각하게 타격이 오더라. 과연 인간이 무얼까,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때 피해를 당한 가족이 떠돌아다니면서 과연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반대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소설적 치료를 했다. 내가 살아야 하겠기에. 그것으로부터 다친 내 마음을 치유해야 하겠기에. 아직 발표는 하지 않았다. ″

창닫기

독자와의 질문 응답 시간

-소재 발굴 어디서 하나?

"우리 주변에서 정말 소설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어떤 큰 일이라도 내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으면 소설이 되지 않으나, 어느날 찻집에서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소설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종소리는 어느 샐러리맨이 한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새로 옮긴 회사를 가지 않고, 옛 회사를 자꾸 간다는 이야기. 그것의 외연을 확장했다. 여기서 새는 인간을 굽어보는 시선의 상징. 문학은 금지된 것, 말하면 안되는 것들과 근접해 있기 때문에 숨통을 틔어줄 수 있다고 봤다."

-작가를 존경하는 독자다. 캠프가 어떤 의미가 있나?

"(한참 망설이다가) 혹시 제가 오버하는 지 몰라서 검열을 해봤는데 …참 행복하다. 제가 소설을 읽을 때 잠깐 멈추니 너무 집중해서 들어주시니 너무 좋다. 얼굴에 열이 오를 정도로...독자들이랑 함께 하는 시간을 자꾸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놀랐다.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들으실까. 열심히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사랑에 대해 주로 다루는데,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결혼은 하셨는지?

"사랑. 내가 이런 사람이로구나 깊이 알게 되는 것은 사랑을 할때라고 생각.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내 마음 속의 가장 어두운 존재에 다녀가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그리움이 없는 상태에 자신을 두지 않기 바란다. 결혼은 했다."

-직함이 작가신데, 작가로서의 꿈과 개인 신경숙의 꿈은?

"저는 직함이 작가라고는...고맙다. 좀 낯선 말 같아서.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별다른 ..굉장히 대답을 잘해야 하겠는데...책을 읽으면서 자랐고, 책을 쓴 사람에 대한 외경심 때문에 꿈이 작가가 됐던 듯 싶다. 꿈을 다 이루고 살 수는 없지만, 나는 지금도 과정에 있고,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드느냐면 늘 미래에 있다고 대답. 작가로서의 꿈은 내 소설을 읽을 때 가능한 한 좋은 쪽으로, 삶을 읽어내는 쪽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를 바란다. 개인적인 내 꿈은 좋은 작품을 쓰는 것. 시시한 대답이네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게으름 때문에 안 하지 말고,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작가이기 때문에 인생에 플러스, 마이너스가 된 것은? 글을 쓸 때 독자들이 이해해줄 것인지에 대해 불안하지 않으신지?

"글을 쓸 때는 쓰는 일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 때는 읽어줄 사람까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출간할 때가 막 서른이 넘어갈 때였는데, 처음으로 독자에 대해 생각해봤다. 스물아홉때, 이렇게 서른이 돼도 되나, 하는 생각에 직장 일도 멈추고 열심히 글을 쓰고 나면 서른 이후의 삶에 당당해질 수 있을듯 싶었다. 1년동안 단편 8개를 썼다. 책이 처음으로 묶여 나왔다. 독자들과 그렇게 열렬히 만날 줄은 몰랐다. 글을 실컷 썼으니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생각. 1주일 후에 재판, 2주 후에도 많이 읽어줘서... 내가 다시 직장으로 가지 않게 됐다. 다음 책을 쓸 수 있게 하는 시간을 벌고, 갖고 싶었던 책상을 갖게 됐다. 대답을 이렇게 밖에 못했다. 질문도 좀 야릇했던 것 알죠?"

-소설은 언제 쓰는지? 글쓰기 습관? 방해되는 것?

"쓰려고 하는 시간이 길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그냥 밤낮없이 쓴다. 끝을 낼 때까지 쓴다. 작품을 쓰는 동안 인간 관계가 단절된다. 작품을 쓰려는 분은 일단 시작했으면 완성을 시키는 습관이 좋다. 자꾸 중단하면 안 된다. 자꾸만 써보면, 어느 순간 소설이 된다. 그렇게 되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좋은 작품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글 쓸 때 습관은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온갖 청소를 다 한다. 주변이 깨끗해야. 그런 상태서 시작해서 끝이 나고보면 난리다. 작품을 쓰는 동안엔 틈만 나면 손을 씻는다. 머리는 절대 안 감으면서... 방해되는 것은 저 자신이다. 어떤 뭔가를 자제하지 못할 때가 있다."

-고2, 고3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깊은 슬픔을 읽고 진로 결정 영향 받았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어머니, 고향은 어떤 의미인가?

"문학이 어머니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어머니 역할을 문학이 해야. 내 소설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편안하거나 행복한 존재가 아니다. 어머니라는 존재에게도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숙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가?

"제 작품을 쓰고 있지 않을 때 항상 다른 작품을 읽는다. 늘 책과 함께 한다. 한 계절엔 미술책만, 또 한 계절은 음악책을 읽으면 책을 고르는 눈이 생긴다. 가끔 고전을 뒤적여보는데, 악령, 이방인도 그렇고요. 감정이 느슨해졌다고 생각하면 안 읽히는 책을 읽는다. 제목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림책도 많이 뒤적여본다. 시집도 보고요. 한 작가의 작품만 찾아보면 그의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청준, 조세희, 최인훈의 작품을 다 찾아본 경험."

-연재 작품 소개, 다음 작품은?

"1800년도 말쯤에 고종 시대에 살았던 여자 리진에 관해 쓰고 있다. 그 기간을 알려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 책 읽기는 영상물을 접하는 것과 다르다. 그 자리에 있기만 하면 다 흘러간다. 책 한 페이지 이해하지 못하면 뒷장 넘기기 힘들다. 책을 다 읽었다면 책 한 페이지마다 독자가 다 개입한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눈으로 보면서 한 줄 한 줄 다 해석한 것. 리진,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근대 여명기를 배경으로 절대로 잊지못할 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100년도 전에 살았던 여자에게 베를리오즈를 듣게 하고, 카메라에 서게 하면서 문득 이 사람이 나보다 먼저 세익스피어를 접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즐거웠다. 나는 그 사람이 참 좋다. 연재할 때는 제목이 '푸른 눈물'인데 단행본으로 할 때는 다른 것으로 하려고 생각 중이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최근 2, 3년간 개인사 때문에 글 쓰는 시간이 줄었다. 현대문학과 일본 쓰바루라는 잡지에 일본 쓰시마 유코라는 작가와 연재하고 있는데, 그 책이 완성되고, 리진도... 장편 2개 계획. 어머니 이야기, 어느날 갑자기 앞을 못 보게 된 사람 이야기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질문을 많이 할 줄은 몰랐다."

- 술버릇은?

"술은 잘 마시진 못하지만 왠만큼 마신다. 술을 마시면 옛날 집을 자주 찾아가는 버릇이 있는 듯 싶다."

창닫기

YES24 네티즌 추천 한국의 대표작가 제1회 김훈, 제 2회 공지영
때곳: 2006년 8월 26일 지리산 송원리조트

인사말

김훈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직업이 아니고 혼자 숨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이야기를 하는 게 두려운 생각이 든다. 얼굴을 보니 글 똑바로 써야하겠다는 생각."

공지영  "생애 네 번째 등산.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 그런지 얼굴이 품위가 있다. "

작품 낭독 시간

 

 

 



공: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도입부 낭독.

"첫 장면에 상징적인 것 넣으려고 노력. 이 소설에서도 그렇게 했다.  7년전을 회상하는 여주인공의 심정. 하늘과 땅, 서민아파트와 저쪽의 경계,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 ″

 

 

 

 

김: <화장> 일부 낭독

"사랑이라는 것의 아득함. 나도 잘 모르겠어. 무엇을 쓰려 했는 지... 그러나 안타깝게 만질 수 없는 것들의 아득함이 있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손으로 만질 수 없으니까 말로 부르려 해서 말이 나온다. 그 말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인가. 인칭과 인칭 사이의 절망감. 아득함을 묘사한 것."

독자와의 질의 응답

-왜 작가가 됐느냐.

김: "왜 소설을 쓰느냐고 묻는 답답한 젊은이들이 있다. 밥벌이를 하는 노동. 매우 힘들고 고달픈 노동. 돈을 벌어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것을 써서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이것을 하지 않는다. 밥벌이 노동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도 약간의 행복을 느끼겠는데, 그게 성공했다는 자부심에 도달한 때가 거의 드물었고, 나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넘길 때, 나는 내가 쓰려 했던 것이 이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아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을 넘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매일 매일의 불완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말할 수 없이 비통하다. 그 비통함을 견디며 밥벌이 노동을 한다. 여러분, 내 말 듣고 실망하셨죠."(웃음)

공: "김훈 선생과 저는 많이 다르지만, 같은 게 있다. 저도 생계가 되지 않는다면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거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책 안 쓸 때는 책 읽는다.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을 잘 써보려고 한다."

-언제 글을 쓰고 슬럼프가 찾아오면 어떻게 하느냐.

공: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이면 퇴근을 하려고 한다. 슬럼프가 와도 붙어앉아서 열심히 쓸 수 밖에 없다. 소설이 머리 속에서 70%정도 돼야 소설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는다."

김: "조직, 직장 구속이 없지만, 자기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망한다. 강철과 같은 기율이 있어야만 자기를 통제할 수 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건달. 그래서 자기를 긴장시킬 수 밖에 없다. 아침에 책상에 앉아보면 하루 글쓰기 양과 질이 예상된다. 놀 때는 혼자 논다. 영화관 같은 데 가지 않고 강가나 들에 나가 자전거 타고 논다. 연필로만 쓰는 게 못된 습관. 나는 컴퓨터를 모른다. 기계를 만지면 꼭 고장이 난다. 글이 안 써지면 연필 탓하며 다른 연필 사는데 역시 잘 안 써진다." (방청석 연방 웃음 터짐)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성격은. 옷을 잘 입는데 어디서 사나.

공: "학교 다닐 때 새침하고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때는 말광량이였다. 중학교 때 세계명작 읽어보니 주인공은 대부분 새침해서 닮으려고 했다. 대학 영문과 학생은 대부분 여학생. 끝에서 세 번째로 못했던 학생. 옷은 인터넷서 주로 싸게 사 입는다. 튕기지 말고 있을 때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주라고 말하고 싶다."

- 학창 시절에 국어는 언제나 100점 맞았나

김: "60년대 대학에 갔더니 대학에 바로 가지 못한 고교생들을 수용한 포로수용소 같았다. 1년내내 데모. 휴교 많았다. 교련반대 데모를 했다. 1주일에 1시간. 교련받고 1년 공부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공지영씨가 나를 경멸할까."

공: "아니에요. 일리가 있네요."

김: "대학에서 영시를 가르쳐주는데, 너무 좋았다. 데모하느라고 그것을 포기하고 배우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혼자 영시 공부했다. 예이츠 시를 라임 맞춰 다 외울 수 있다. 내가 학교를 안 나왔다는 거에 대해서 아무런 자의식이 없다."

 

 

 



-<강산무진> 잘 읽었다. 제 나이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서 주로 다루시는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여성과 남성에 대해서 직접 이야기해주셨으면 한다.

김: "생로병사. 인생에는 생로병사만 있다. 연애는 병의 문제가 아닌가. 인간의 문제를 떠난 세계가 있다. 초월, 구원 등. 나는 그런 영역으로 가지 않고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생로병사로 대표되는 추잡하고 어두운, 가여운 중생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공지영씨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는 인간의 어두운 측면과 구원의 세계가 조화가 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그 책을 사보는 것이겠지.(방청석 웃음) 나와 동갑짜리 작가 박영한씨의 상가에 갔다. 나는 뭐하며 살아야 하나. 살아감과 죽어감이 완전히 같은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로병사는 구별할 수 없는 한 덩어리라는 것을 그 빈소에서 느꼈다."

-(김에게) 기자와 작가 중 어떤 직업이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하나. (공에게) 노동운동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셨는데.

공: "1980년대 초반 문학공부하면서 문학관 성립.사회문제를 파헤치는 작가가 되자. 그런데 2∼3년전에 문득 생각. 우리 사회는 무척 변했는데, 나는 왜 문학관이 한 번도 변하지 않았을까 되돌아봐.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환경의 변화에 맞춰 변신해야. 요즘 진보 노동권은 그런 고민이 적지 않은 게 아닌가. 80년대 운동권 노래는 새로운 현실에 맞춰 정서의 힘을 보여줬다. 그런 것에 자부심. 요즘 정권은 많이 바뀌었는데, 운동권은 전혀 변하지 않아서 사회에서 오히려 소외된다. 안타깝게 생각한다.

김: "73년에 신문기자 시작. 그 해에 박정희 정권 긴급조치 발동. 긴급조치 시대에 나의 직업적 청춘이 거기서 썩어문드려졌다. 모든 언론은 검열을 받거나 통제 받았다. 기자란 직업에 대한 기억은 행복한 것이 아니다. 기자들 격렬하게 저항. 대부분 신파, 대부분 좌절됐다. 경찰이 고문을 해도 정당한 기사를 쓸 수 없었다.창경원서 호랭이 새끼난다고 하면 사회면 톱기사로 썼다. 그런 시대를 우리가 정리하지 못하고, 좌절, 실패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옆에 계신 공지영 선생 세대로 넘어간 것. 운동권 가요가 나온 시대까지 간 것. 그런 시절이 있었고... 소설을 쓰니 행복하냐, 그렇지 않다. 소설을 쓰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시간을 묘사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을 나는 묘사할 수 없다. 새로운 시간들이 인간의 생명으로 들어오는 것을 체험할 수는 있지만 묘사할 수는 없다. 그런 한계 때문에 자유로운 것은 아니로구나, 생각."

- 영상세대는 문학보다는 영상에 길들여져있는데, 문학의 매력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계획은.

공: "영상매체와 비교해달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 제가 라디오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책 관련 질문을 꼭 한다. 공통점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성공한 영화배우의 특징도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 성공한 감독도 마찬가지. 종이책은 모든 콘텐츠의 기본이기 때문에 중요. 활자로 1차 검증한 다음에 2차 매체로 넘어가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오픈 마인드가 된다. 영화는 그렇지 않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앞으로도 가장 중요할 것. 김훈 선생 책이 일본, 프랑스서 번역되고 내 책도 활발하게 번역 소개되고 있다."

김: "저는 영화를 보지 않는다. 평생 본 영화는 10편 넘지 않는다. 고교 때 강제로 끌고 가기에 봤다. 저는 영화관이라는 컴컴한 공간에 들어가기 싫다. 땀 냄새 나고 컴컴한 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놀 때는 들에 나가 놀아야지.. 영화는 인간을 압도한다. 짓눌러 버린다. 책은 여백이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던져버릴 수 있지 않다. 책만 봤다. 자랑이 아니라 나의 낙후성을 이야기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책 속에는 글자가 있다. 언어의 구조물이 있다. 길은 세상의 길바닥에 있다. 책 속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길은 매우 아름다운 것. 책 속에 어른거리는 길은 매우 아름다운 것. 세상의 길과 연결하는 게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책의 길과 연결됐을 것.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만, 매우 멀고 아득하다. 무기는 세상을 바꾼다. 미국의 무기는 정확하고 분명하고 신속하게. 말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을 영원히 바꿀 수 없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눈물겹게도 중요한 것. 허약하기 때문에. 말로 해서 바꿀 수 있는 한도내에서만 바꿀 수 있다. 이게 내 고민."

- 좋은 문장은?

김: "나는 한국어가 불편. 조사 때문이다. 조사가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동사가 목적어를 바로 지배하는 명석한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 한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조사를 읽는다는 것. 조사가 몇 개 안된다. 너무 옹색한 살림살이. 좋은 문장은 뭐냐. 조사들을 어색하지 않게 해 놓는 것이 일단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 엄청 힘든 일. 나도 잘 모르겠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꽃이 피었다'. 처음엔 '꽃은 피었다'였다. 고심 끝에 ' 꽃이 피었다'로. '꽃은'은 보는 자의 주관이 들어가 있으나, '꽃이'는 그렇지 않다. 한문과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어야만 좋은 한국어문자을 쓸 수 있다고 생각."

공: "여성작가가 대거 등장하던 시기에 섬세한 결이 강조되면서 내 문장에 대해 이야기되었다. 나도 나름대로 공을 들였는데, 평론가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것과 멀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 보기는 괴테의 '모든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 인생의 찰나적 통찰을 몇문장으로 잡아내는 것이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 아름답고 곱고 화려한 것을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평가와 내 생각이 달랐다. 인생을 탁 잡아내 읽는 이를 바꾸는 것을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

- 나이먹을 수록 잘 쓰나.

김: "내 나이 내년이면 육십. 서녀편은 쓰고 가려고 한다. 내 속에 소설로 써야 할 이야기가 무진장 쌓여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서너편은 기어이 쓰려고 한다. 서너편 더 쓴다고 해서 후세대가 작가로서 나를 기억해줄지, 안할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 술은 잘 먹나?

김: "(한참 말이 없다가) 술 끊으려고 해요. (웃음) 와인을 먹으면 로맨틱해진다. 뼈에 술이 스미는 느낌.계통이 없이 취한다. 내가 좋아하는 술은 위스키. 논리적이고 기하학적으로 술이 취하기 때문."

공: "위스키 빼고 다 잘 먹는다."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김: "나를 누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생각이 없다. 나에 대해 누가 말하는 것이 하찮게 생각된다. 논쟁으로 누가 나를 이기려고 했을 때 내 논리로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진실은 논쟁으로 가릴 수 없는 그 너머에 없다. 남의 시선에 관계없이 함부로 살아왔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경우 바른 사람이다."

-미모 비결?

공: "술, 담배, 그리고 내일은 꼭 세수하고 자겠다는 굳은 결심."

김: "공지영씨가 미인이다. 그러나 우리 문단의 미모 수준이 과히 높지 않다."(웃음)

-인물 직업 세부 묘사. 취재 비결?

김: "기자시절 취재가 큰 도움. 재구성. 예를들어, 여성 화장 묘사는 여성잡지 광고를 통해서."(*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작가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흥미롭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영화화?
공: "흔쾌히 승락했다. 송해성 감독을 조감독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다. 목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쾌락."

-강동원, 이나영 캐스팅 만족하나?

공: "강동원 만났을 때,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이 죽으면 참 슬프겠다 생각. 예고편에서 이나영 연기를 봤는데, 연기 잘한다 생각했다."

-후학들에게
공: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스님 '앉아 있을 때 앉아 있고, 걸어갈 때 걸어가라.'  일어나기도 전에 걸어가는 것 생각하기 십상. 그 순간을 명징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함께 생각해보자."

김: "사소한 일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우리 시대에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문제라고 생각. 인터넷이 발달해서 젊은이들은 히어링이 안되는 듯. 말하기에만 능해.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 듣기를 할 줄 아는 사람. 작은 일에 감동하는 사람이 됐으면. 내가 존경하는 데레사 수녀님이 쓰신 글. ' 사람들이 자신더러 인류를 위해 일했다고 하는데, 나는 인류라는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인류를 위한 적이 없고, 나는 다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개별적인 존재를 데려다가 길렀을 뿐. 눈 앞에 펼쳐진 구체적인 사소한 일에 감동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06. 08. 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도 있지만 날씨는 많이 누그러졌다. 바람도 가을티를 더 내는 바람이고. 가을이 오기 전까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지만 또 어김없이 계절은 바뀌고 아무래도 더 바빠질 것이다(이제 이런 딴짓을 할 새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9월이면, 또 연례행사처럼 떠오르는 게 21세기의 화두처럼 돼 버린 9.11이다. 오늘 뉴스에서는 뉴욕경찰이 희생자들의 음성이 담긴 비상통화 테이프를 공개했다고 전한다:

"9.11 테러 5주년을 앞두고 뉴욕경찰 당국이 테러 당시 구조를 요청한 희생자들의 음성이 담긴 비상 통화테이프 1천6백여건을 공개했습니다. 이번 통화 테이프 공개는 희생자 유족들이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 공개를 요구하는 재판을 벌여 이뤄졌습니다. 공개된 내용에는 애절하게 구조를 기다리는 희생자들의 목소리와 구조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의 소리, 생존자 구조를 위해 사투를 벌이는 구조대원들의 음성 등이 생생하게 담겨있었습니다."  

이 외상적(트라우마적) 사건에 대한 문학적 응전 혹은 애도가 문학전공자라면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출간된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 2006)은 주목할 만하다. 어제 한겨레에 실린 최재봉 기자의 리뷰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 굳히게 됐는데, 흥미로운 건 그의 아내인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또한 이번에 같이 출간됐다는 점. <사랑의 역사>(민음사, 2006)가 그것이다. 아마도 두 작가가 부부라는 걸 고려한 듯한데, '뉴욕 최고의 문학커플'이라고 하니까 관심과 질투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질투는 뭔가?). 좀 무거운 9.11 얘기는 가을에 하도록 하고, 좀 가벼운 커플 얘기에 초점을 맞춰서 두 작가와 작품에 대한 리뷰들을 따라가본다. 

중앙일보(06. 08. 19) 고독과 폭력으로 헝클어진 두 개의 '사랑 퍼즐'

-모처럼 소설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 나란히 출간됐다. 지은이들이 부부 사이란 것도 눈길을 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니콜 크라우스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다. '분더킨트(wunderkind.신동)'라 불릴 정도다. 1977년생 남편 조너선이 2002년 발표한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LA타임스가 선정한 그 해 최고의 책이 됐고 '가디언 신인작가상'과 '전미 유대인 도서상'을 받았다(*그러니까 25살에 떴다는 얘기이다. 프린스턴대 재학시 조이스 캐롤 오츠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이에 질세라 세 살 많은 아내 니콜이 2005년 발표한 <사랑의 역사>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됐다. 문학과 철학에 심취하던 명문대 재학 시절 만났고 죽어도 글을 쓰겠다는 야망도 같고 문단의 평가에서도 어느 한 쪽이 기울지 않으니 천생연분이지 싶다(*부부간에 상대방보다 더 잘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한 작품은 10대 소녀가, 다른 하나는 아홉살 소년이 이야기를 이끈다. 언어의 실험과 퍼즐식 짜맞추기에서 독자의 폭넓은 상상력을 요구하는 두 소설은 각기 독창적이고 전혀 다른 이야기다. 부부가 발표 전까지 서로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것을 먼저 읽든지 뒤의 것이 앞의 것을 거의 완전히 지워버릴 정도로 둘이 전혀 다르다. 그러면서도 다 읽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랑의 역사>는 '사랑한다'는 말이 의미를 상실한 시대에, 절절한 사랑을 담은 한 권의 책이 돌고 도는 구조다. 그 밑에 인간의 짙은 고독과 전쟁의 폭력이 깔려 있다. 작가를 꿈꾸는 폴란드계 유대인 레오는 첫사랑 소녀 알마를 찾고 있다. 레오가 알마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 원고는 나치의 학살이 시작되자 언론인 친구 즈비에게 넘어간다. 칠레로 망명한 즈비는 현지에서 만난 로사의 사랑을 얻기 위해 레오의 원고를 스페인어로 베껴 전한다. 알마라는 이름만 제외하고 모든 이름이 바뀐 소설은 다시 칠레를 여행하던 미국 청년 다비드의 손에 들어간다. 그는 연인 샬럿에게 이 소설을 선물하고 둘이 낳은 딸을 알마라고 이름 짓는다. 다비드를 암으로 잃은 뒤 일에만 매달리던 샬럿은 책을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10대 소녀가 된 알마는 동생 버드와 함께 자기 이름과 같은 소설의 주인공을 찾아나선다. 한편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미국으로 탈출해 열쇠공이 된 레오. 그는 앞서 미국으로 이민온 첫사랑 알마(소녀 알마와는 동명이인)를 찾지만 알마는 레오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책도 연인도 자식도 잃어버린 레오. 그러나 그는 삶이 아름답고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것을 믿는다. 레오의 믿음은 엄마에게 새 연인을 찾아주려는 소녀 알마의 노력과 만나게 된다.

-이 극적인 만남의 이면에 작가 니콜의 기지와 작품의 활력이 숨어 있다. 소설을 정치적 비판이 아닌 일상의 드라마로 만든 힘은, 자신이 신이라 믿는 엉뚱한 소년 버드의 풀이에 있다. "레오 거스키이며 즈비 리트미노프이며 메레민스키이며 또한 모리츠인 그 사람"을 찾아 누나와 연결하는 버드의 '오해 속 지혜'가 소설을 푸는 열쇠다. 과연 인생은 무겁지만 지혜는 가볍고, 인간은 우울하지만 신은 즐겁다.

-남편 조너선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사진, 그림, 인물의 심리를 반영하는 문체 등에서 아내의 작품보다 훨씬 실험적이다. 초반부에는 책장이 다소 느리게 넘어간다. 그러나 죽음과 상실의 공포, 그리고 사랑과 표현의 한계라는 주제는'사랑의 역사'와 동일하며, 막바지에 한 줄기 햇살처럼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도 비슷하다. 12살 소년 오스카는 9.11 테러로 죽은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열쇠를 발견한다. 열쇠가 담긴 봉투에는 '블랙'이라고 씌어 있다.

-오스카는 뉴욕에 사는 블랙이라는 이름을 가진 216명을 차례로 만난다. 이것이 그가 아버지를 애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스덴 폭격을 겪은 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이 두려워 자식(오스카의 아버지)마저 외면한 할아버지 역시 죽은 아들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면서 용서를 빈다. 이들의 긴 애도는 마지막에 이르러 아주 엉뚱한데서 해결된다. 암으로 죽은 아버지의 유품인 열쇠를 찾던 블랙이라는 사람과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던 오스카가 만나면서 닫혔던 문이 열린다. 그런데 혹시 이 모든 '블랙씨 찾기'는 아빠를 잊은 것처럼 보이던 엄마가 창조한 플롯은 아닐까?

-열쇠 모티프, 세대 간의 대화, 복잡한 플롯을 해결하는 방식, 유대인이라는 가족사가 드러나는 방식 등 여러 면에서 두 작품은, 그리고 아내와 남편은 다르면서 닮았다. 라이벌이면서 천생연분은 가능할까? 부부가 똑같이 성공하고 싶은 우리 시대 연인들에게 두 소설은 다름과 닮음의 멋진 예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폭력의 어두움이 일상이 된 문명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든다.(권택영 교수/ 경희대 영어학부)

동아일보(06. 08. 19)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우리에게는 조숙하고 위악적이어서 매력적인 어린 화자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새의 선물>의 진희, <양철북>의 오스카,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 <자기 앞의 생>의 모모, 그리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등장하는 크라우스 형제까지. 열 살을 채 넘지 않은 이 아이들은 그 어떤 어른들보다 성숙하게 삶의 모순을 바라보고 기록한다. 아직은 우리에게 낯선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주인공, 오스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홉 살 소년 오스카는 혼란의 역사 한가운데에 서서 그 어느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언어로 ‘지금-여기’의 삶을 말한다.

-이 책은 9.11 테러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한 개인과 가족 그리고 그들에게 할애된 미래를 한꺼번에 앗아간 역사적 사건은 폭력에 의해 좌초될 수밖에 없는 인생의 근원적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세 명의 화자의 육성이다. 9·11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오스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할아버지, 죽은 언니를 잊지 못한 채 유령처럼 떠도는 남편을 지켜봐야만 했던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흥미로운 점은 오스카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슬픔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전달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소설 사이사이에 직접 찍은 사진이나 노트를 삽입한다. 마치 ‘거기 있음’을 증명하는 사진이나 영상처럼, 작가는 기록된 모든 사유들을 그 자체로 보여 주고자 한다.

-이 책에서 일차적으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삶의 비의(秘意)를 알아 버린 듯한 조숙한 아이의 위악이지만 결국 밑줄을 긋게 하는 부분들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상실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다. 작가는 상실이란 인생의 비의가 아니라 본질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횡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상상력임을 제안한다. 자꾸만 사라져 가는 언어의 질감, 밑줄을 긋던 손길마저 잠시 멈추게끔 하는 사유의 힘이 이 책을 관류하고 있다.

-작가의 부인 니콜 크라우스도 작가다. 크라우스의 작품 <사랑의 역사>도 이번에 함께 출간된다. 두 사람 모두 뉴욕 문단의 ‘분더킨트(신동)’로 통하며 독자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국내에서는 어떤 반응을 얻을지 궁금하다.(강유정 문학평론가)

 

한겨레(06. 08. 18) 9·11 그순간 잃어버린 말 ‘사랑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미국의 젊은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29)가 지난해 발표한 소설이다. 미국 문학계에서는 부인 니콜 크라우스(32)와 함께 ‘신동’으로 불린다는 작가의 두 번째 장편으로 포스트모던한 형식 실험을 적극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수십 장의 흑백사진, 한 페이지에 한 줄만 싣거나 아예 백지 상태로 비워 놓은 페이지들, 문틈으로 엿듣는 상태를 표현하느라 토막토막 끊어진 문장들, 이미 쓴 글 위에 몇 겹씩 겹쳐 써서 아예 까맣게 뭉개진 페이지, 그리고 오탈자를 골라 표시한 빨간 흔적과 글씨 연습을 한 총천연색 낙서장까지, 소설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들이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라면 이런 기법상의 특징들보다는 이 소설이 9.11 테러를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에 더 큰 관심을 보일 법하다. 얼마 전에는 미국의 원로 작가 존 업다이크(74)가 <테러리스트>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해 화제와 논란을 함께 낳은 바 있다. 작가들이 최초의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 이 미증유의 사태를 상대로 한 문학적 대화에 나서고 있다는 뜻이겠다.

-소설은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아홉 살 소년 '오스카 셸’이 이별과 상실의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아버지의 흔적을 좇는 과정을 추적한다. 죽은 아버지의 유품에서 찾아낸 수수께끼의 열쇠, 그 열쇠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블랙’이라는 성씨를 가진 이를 찾아 드넓은 뉴욕 시내를 순례하는 오스카의 여정은 얼핏 무모해 보이지만, 오스카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 절박한 의미를 지닌다.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야(…)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더 이상 상상하지 않게 될 테니까”(356쪽)라는 것이 그의 변명인데, 테러에 대한 어린아이다운 공포는 소설 앞부분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일 년이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무슨 이유에서인지 샤워를 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웠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은 더더욱 그랬다. 현수교, 세균, 비행기, 불꽃놀이, 지하철의 아랍인들(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닌데도), 레스토랑이나 커피숍 등 공공장소의 아랍인들, 비계, 하수구, 지하철 격자창, 주인 없는 가방, 신발, 콧수염을 기른 사람들, 연기, 매듭, 높은 건물, 터번, 나를 공포에 빠뜨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59쪽)

-그런데 오스카가 이토록 아버지의 흔적 찾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정작 따로 있다. 사건이 있던 날, 그는 학교에서 일찍 귀가해 전화기에 남겨진 아버지의 네 개의 메시지를 듣는다. 비행기와 충돌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있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음성이었다. 네 개의 메시지를 다 듣고 난 직후 아버지의 전화가 다시 걸려오는데, 어쩐 일인지 오스카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 몸이 얼어붙은 것이다. 1분 27초 동안, 사람들의 비명과 울부짖음, 유리 깨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긴박한 목소리가 메아리쳤음에도 오스카는 전화를 받지 못했고, 결국 건물이 무너지는 순간 전화 역시 끊긴다. 그는 이 사실은 물론 마지막 순간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사실 자체를 다른 가족, 특히 엄마에게는 비밀로 한다.

-소설은 주인공 오스카와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 사람을 화자로 삼아 진행된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 그러니까 오스카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할머니는 손자에게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서전 형식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1963년 5월 21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아이에게’라는 제목으로 쓰기 시작한 할아버지의 편지는 2차대전 당시 독일 드레스덴에서 겪은 폭격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고통스럽게 증언한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사랑하는 여자를 폭격으로 잃고 미국으로 건너와 그 여자의 동생과 결혼한 할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탄생을 지켜보지 못하고 독일로 떠났다가 아들이 죽은 뒤에야 귀환한다. 자신의 상처를 아내와 나누려 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선택은 할머니에게 또 다른 상처로 남고, 할머니는 소설 말미에서 손자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너에게 지금까지 전하려 했던 모든 이야기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란다, 오스카.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사랑한다. 할머니가.”(439쪽)

-결국 소설의 세 화자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했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소통’의 결여라 할 수 있다. 오스카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그리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한 마디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것이 이들 모두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던 것. 오스카가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실어증인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손자를 향해 거듭해서 ‘미안하다’는 글씨만 써 보이는 소설 말미의 눈물겨운 장면,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각자의 아버지이자 아들이 되는 사람의 텅 빈 관을 파헤쳐 그 안에 할아버지가 40년 동안 할머니에게 보냈던 내용 없는 편지를 채워 넣는 상징적인 장면은 뒤늦은 사랑의 고백에 해당된다.

-할아버지 못지않게 드레스덴의 악몽에 시달리던 할머니는 이런 꿈을 꾼다. “꿈 속에서, 무너진 천장이 우리 머리 위에서 전부 다시 만들어졌어. 불길은 폭탄 속으로 도로 들어갔고, 폭탄은 위로 올라가 비행기들의 몸통 속으로 도로 들어갔어. 비행기 프로펠러들은 거꾸로 돌았지. 드레스덴을 가로지르는 시계 초침처럼.”(428쪽) 사건과 시간을 되돌리는 할머니의 ‘마술’은 오스카에게도 전수된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오스카는 아버지에게서 ‘뉴욕의 잃어버린 여섯 번째 구’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으로 되돌아가며,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가 마지막 문장이 된다.



-마지막 문장으로 소설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독특한 소설의 마무리는 15장의 사진이 담당한다. 9·11 당시 불 붙은 무역센터 건물 바깥으로 추락하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인데,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어 책장을 빠르게 넘겨 보면 남자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솟아올라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출판사 민음사는 이번에 포어의 부인 크라우스의 소설 <사랑의 역사>(한은경 옮김)도 함께 번역 출간했는데(*모처럼 성공적인 기획인 듯하다), 이 소설가 부부가 배우자에게 바친 헌사가 눈길을 끈다(*소설 안에 쓰지 않은 게 다행이다). 각자 상대방을 ‘내 아름다운 여신’과 ‘내 인생’이라 지칭하며 자신의 사랑을 경쟁적으로 과시하는 듯한 형국이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6. 08. 19.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06-12-03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문학의 빈곤'이라...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문구다. 예전에 중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성민엽의 첫 평론집이 <문학의 빈곤>(문학과지성사, 1988)이었다(*<지성과 실천>에 이은 두번째 평론집이다. 세번째 평론집이 재작년에 출간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철학의 빈곤>(아침, 1989)을 패러디한 제목이엇다(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철학을 풍자했던가). 아침신문에 시인이자 현재는 경향신문 기자인 김중식씨가 <작가와 비평> 특집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그걸 옮겨온다.  

 

 

 

 

경향신문(06. 08. 14) 모두 가난한데 빈곤문학이 없다

-모두가 가난하다고 아우성인데, 문학은 더 이상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최근 나온 <작가와 비평> 제5호의 특집은 ‘우리 시대의 가난과 빈곤의 상상력’이다. 요즘 문학이 빈곤 문제를 사회양극화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보자는 취지다. 빈곤의 원인·양상이 시대마다 다르므로 문학적 상상력 또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가설’에서 출발한 기획인 셈이다. 그랬는데 글을 쓴 4명 비평가의 결론은 ‘모두 가난한데 빈곤문학은 사라졌다’는 것쯤 된다. 작가들이 현실의 절망에 눈감았거나 세상을 체념한 탓에 가난의 원인과 결과를 개인에게 귀속시킬 뿐 ‘근대성과의 충돌’이라는 문제제기를 회피하고 있다는 요지다(*내가 읽어본 몇 개의 빈곤문학으로는 중과부적인 모양이다).

-문학평론가 정문순씨(37)는 1990년대 이후의 소설을 분석한 글 ‘빈곤문학의 길 찾기, 좌절과 모색’에서 “겉으로 드러난 풍요와 이기심 뒤에 숨은 빈곤의 얼굴을 직시하는 작가가 과연 있는가”라고 자문한 뒤 “없다고 본다”고 자답했다. 정씨에 따르면 빈곤문학은 70년대까지는 하나의 독립적 영역이었다. 80년대 빈곤문학은 노동문학에 수렴됐다. 90년대 이후에 대해서는 “민중의 삶을 말하던 그 많은 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라고 표현했다. 작가들이 절망의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가까스로 빈곤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일부 작품들도 빈곤의 이유를 가족해체에서 찾을 뿐이다. 가난 자체가 모멸이며 소외라는 인식을 가진 작가가 거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근대적 사회제도의 일부로서 가족제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면서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서 빈곤을 통한 성찰은 근대성과의 충돌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평론가 강경석씨(31)는 ‘불황의 상상력인가, 근대문학의 종말인가’에서 최근작 소설에 실업자 캐릭터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했다고 보고 그 배경과 의미를 살핀다. 정이현 ‘소년은 꿈꾸지 않는다’, 김숨 ‘트럭’, 김미월 ‘너클’, 이기호 ‘나쁜 소설’, 김애란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날 때’ 등을 분석했다. 강씨에 따르면 ‘소년은 꿈꾸지 않는다’는 속물의 허위를 폭로하기보다는 속물을 속물이게 만드는 속물성의 세계 혹은 그 메커니즘을 비판한다.

-주인공들이 현실의 백수라기보다 정신적 실직자에 가까운데, 이는 작가가 ‘세계의 기성질서=처음부터 막다른 골목’이라고 체념했기 때문이며 작품 속에서 속물성의 세계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 귀결된다는 설명이다. ‘너클’ 속 주인공의 무력감 또는 권태 역시 ‘무엇도 되지 않고자 하는 열정=세속적 방기=귀차니즘’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강씨는 그러나 “‘문학을 떠나서 생각’한다는 젊은 작가의 표현처럼 문학하는 허망함이 집단적인 표현들을 얻었던 시대는 없었다”면서 “이들이 그만큼 문학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반어일 수 있다”고 동시대 작가들을 감싸안았다.

-비평가 엄경희씨(43) 역시 한국시사 속의 가난을 살핀 ‘가난을 재생산하는 자는 누구인가?’에서 “가난을 촉발시키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통찰은 이제 소수 시인들의 관심 영역”이라고 했다. 전국노동자문학회, ‘일과 시’ 동인, 백무산·조기조·최종천 시인 등 노동문학 계열, 그리고 70년대 이후 출생자 가운데 박성우·김사이 시인 정도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실업은 자본주의를 버티게 하는/몇 안 되는 기둥 가운데 하나다/실업은 노동의 무덤이며 자본의 강력한 무기다”(백무산 ‘너희들이 손댈 수 없다’).

-문학평론가 조해옥씨(43)는 ‘내면의 가난과 가난이 주는 풍요’에서 “90년대 이후 가난을 소재로 한 시작품들은 시대의 가난 또는 물질적 빈곤 대신 내면의 가난을 추구하는 게 대부분”이라면서 “이는 시인의 빈곤한 자아, 즉 시정신의 미시성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거대담론과 이데올로기의 해체에 뒤따르는 허무감이 90년대 이후의 시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씨에 따르면 90년대 이후에 가난을 다룬 시들은 대개 ‘무욕의 시’다. 시인들이 빈곤하고 위축된 자아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내면의 가난을 추구하는 바, 비판정신보다는 서정성과 생의 본원적 문제에 천착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시인들의 가난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거부하고 누추한 곳에서 삶의 비의와 환희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내면의 가난은 특정한 시대·역사와 무관한 시창작의 에너지”라면서 “가난을 오로지 시인 또는 시적 자아 개인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시의 미시성이 곧 시정신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김중식 기자)

06. 08. 14.

 

 

 

 

P.S. 전체적인 요지는 '빈곤문학의 빈곤'쯤 되겠다. 그게 (역설적이지만) '문학의 빈곤'을 낳고 있다고(거기에 비하면 차라리 영화가 괄목할 만하다. 가령 1000만명 이상이 볼 걸로 예상되는 <괴물>만 하더라도 얼마나 계급의식에 투철한가?!). '빈곤문학'은 다르게 규정하면 '계급문학'이다. 그리고 이 계급을 규정하는 변수는 경제적 특권과 문화적 특권이다.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이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이하인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문화적 향유 수준은 평균을 훨씬 윗돈다(대부분의 대학강사들처럼). 때문에 경제적 피착취 계급이란 자의식을 강하게 갖지 않는다/못한다. 더불어, 절대 빈곤의 상태에서라면 무슨 문학을 하겠는가? 그건 문학(예술) 자체의 오랜 딜레마이다(가령 19세기 인텔리겐치아 문학의 독자가 되어야 할 대다수 민중/농민들은 문맹이었다). 한데, <작가와 비평>은 몇 명이나 읽는 잡지인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케 현상 2006-08-1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명쯤?

마노아 2006-08-1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깨기 어려운 딜레마군요. 몇달 전에 누가 저더러 너의 하부구조는 뒷받침되지 않는데 너의 상부구조는 인텔리라고 하더만...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나는군요.ㅡ.ㅡ;;;

2006-08-14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jouissance 2006-08-15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민엽의 첫 번째 평론집은 '문학의 빈곤'이 아니라 '지성과 실천' 아닌가요? '문학의 빈곤'은 그의 두 번째 평론집으로 알고 있는데... 한때 그의 비평을 좋아한 적이 있어 기억이 가뭇하게 나네요. 암튼 성민엽은 '문학의 빈곤'을 출간하고 현장비평을 떠나 아카데미성으로 꼭꼭 숨어버렸지요. 이동하는 그를 일러 '비평계의 기린아'라고 평할 정도로 뛰어난 비평가였는데 말입니다... 로쟈님 좋은 글과 정보들 항상 감사^^ -

로쟈 2006-08-1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지성과 실천>(1985)이 먼저 나온 첫 평론집입니다.^^ 한데, 제가 그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있고, <문학의 빈곤>은 사서 본 책이라 후자가 더 기억에 남아있네요(더불어 <지성과 실천>은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는 책이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2004)을 최근에 냈으니까 현장비평을 아예 떠난 건 아니겠고, 관심이 좀 줄었다고 봐야겠네요. 하긴 중국문학이 더 재미있고 역동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침신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외신 기사는 <양철북>의 작가로 독일의 노벨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가 자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로 복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다음달 발간 예정인 그의 회고록에 담긴 내용이라는 데, 그가 이전에 쓴 '나의 세기'는 전폭적으로 수정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관련기사 두 개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8. 14) ‘양철북’ 노벨상 작가 귄터 그라스 “나는 나치 친위대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78) 씨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SS)에서 복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인터넷판은 11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그라스 씨와의 회견 내용을 보도했다. 그는 다음 달 발간되는 회고록을 통해 2차 대전을 전후한 자신의 행적을 공개할 예정이다.

 

 

 


-그라스 씨는 회견에서 “이런 과거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랜 세월 침묵한 끝에 회고록을 내놓게 됐다”며 “당시에는 SS에서 복무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으나 전쟁이 끝난 뒤 수치스러운 감정이 들어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15세 때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잠수함부대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한 후 군 노무자로 일하다가 17세 때 드레스덴에 주둔한 SS 제10기갑사단으로 징집돼 복무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그라스 씨는 자신의 군 복무 경력에 대해 17세 때 징집돼 교황 베네딕트 16세처럼 방공부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얘기해 왔다. 그는 종전 후 부상한 채 미군 포로로 잡혀 1946년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S는 원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경호대였으나 이후 강제수용소를 운영하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을 학살하는 임무를 맡아 악명을 떨쳤다.

-그라스 씨는 “내 기억에는 SS가 그렇게 소름끼치는 존재가 아니었고 격전지에 파견된 엘리트 부대일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 SS는 범죄 조직으로 규정됐다. 그는 “10대 시절의 나치 사상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며 자신이 나치 사상의 자발적인 동조자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또 “(전쟁 참여는) 당시 많은 젊은이에게 흔했던 일”이라고 자신의 행적을 옹호했다.

 

 

 

-나치 시대에 성장해 전쟁에서 살아남은 세대의 ‘문학적 대변자’로 불리는 그라스 씨는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양철북은 영화로 만들어져 1980년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라스 씨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나타냈고 인종 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명성을 떨쳤다.

-그라스 씨의 이 같은 고백에 대한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그간의 귄터 그라스론에 적어도 의미있는 수정이 불가피하겠다. “이런 과거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왔다”는 고백을 고려하지 않은 작가론이란 사실 무의미하다). 독일의 유대계 작가인 랄프 조르다노 씨는 그의 과거사 고백을 환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 온 업적과 명성이 훼손됐고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는 반응도 만만치 않다. 국제펜클럽 체코본부는 13일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던 문학상의 철회를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지리 스트란스키 회장은 “우리는 이 문제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며 논의에 부칠 것”이라고 말했다.

-체코 펜클럽은 1994년 체코의 저명한 작가인 카렐 차페크(1890∼1938)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다. 공교롭게도 차페크의 형으로, 작가 겸 화가였던 요세프 차페크는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망했다.(김기현 기자)


세계일보(06. 08. 14) 귄터 그라스 "나는 나치 친위대원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78·사진)가 자신이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악명 높은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61년 만에 고백해 독일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라스는 12일자 일간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너 차이퉁과의 회견에서 자신이 17세 때인 1944년에 당시 군부대를 지원하는 노동봉사자로 근무하다가 드레스덴에 주둔한 나치 친위부대인 제 10기갑사단에 입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무했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그라스의 고백은 오는 9월 출간 예정인 ‘양파 껍질들’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라스는 “전쟁이 끝난 뒤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괴로워했다”며 “친위대 복무 사실을 아내 외에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했었다"고 실토했다(*양파껍질들!).

-그라스가 복무한 제 10기갑사단은 45년 2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옛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다 4월에 옛 소련군에 투항했으며, ‘프른즈베르크’라는 별칭을 지녔다. 나치 친위대는 하인리히 히믈러 지휘하에 초기엔 9만5000명의 히틀러 경호부대로 발족했으나, 이후 90만 병력에 36개 사단을 자랑하는 정예 전투부대로 발전했다. 임무는 전선 투입은 물론 유대인 체포와 강제노동수용소 관리, 유대인,공산당원,집시 학살과 프랑스, 폴란드, 체코 등 나치 점령지에서 민간인 학살과 마을 방화 등의 만행을 자행해 악명을 떨쳤다.

-그라스는 자신은 15세에 집을 벗어나 애초 잠수함 부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더 이상 모집을 하지않아 노동봉사 부대에 근무하다가 후에 친위대로 편입됐다고 밝히고 “나는 친위대 복무 사실을 치욕으로 느껴 차마 말로 고백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회고록에 밝혔다”고 실토했다(*작가 자신이 파문을 감수하고 생전에 사실을 고백한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데, 나의 관심은 그보다는 그가 느낀 '치욕의 문학적 변용'에 두어진다. 귄터 그라스 읽기의 지평 변화가 사실 이 파문의 보다 중요한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라스는 1927년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단치히에서 출생했고 전후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59년 반 나치소설 ‘양철북’으로 9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고양이와 쥐’, ‘넙치’ 등 명작들을 내놓았다. 그는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어서 항상 사민당 선거운동에 참여해 왔으며 반전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의 고백이 발표된 후 소설가 발터 옌즈, 발터 켐포스키, 역사학자 아눌프 바링, 평론가 미카엘 볼프존 등 독일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라스를 둘러싼 옹호와 비난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다.(프랑크푸르트=남정호 특파원)

06. 08. 14.

P.S. 한국일보의 칼럼 하나를 보충해 놓는다(아래 사진은 그라스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회견 도중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06. 08. 16) 그라스의 주홍글씨

-김지하 같은 시인을 감옥에 가둬놓는 나라는 방문하지 않겠다던 귄터 그라스는 30여년이 지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그는 월드컵 개막식 전야제에서 '밤의 경기장'이라는 축시를 발표했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관중석이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앞에 서 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오프사이드' 그라스는 이 시에서 축구를 빌어 절묘하게 시인, 넓게 말해 작가 혹은 지식인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현실의 게임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한 발 앞서 가는 그들은 운명적으로 오프사이드 반칙을 범할 수밖에 없다.

-독일어권 최고의 지성, 비판적 좌파 지식인의 대변인 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이 알려주듯 그라스는 이 시의 고독한 시인처럼 인류의 이상이라는 골대를 향해 누구보다 앞서 가며 오프사이드를 두려워하지 않던 작가였다. 나치 비판, 반핵운동,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반대,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비판 등 20세기와 함께 달려온 그라스는 소설 <어느 달팽이의 일기>(1972)에서 작가를 "악취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악취를 사랑하는 사람, 그것이 존재의 조건"이라고 정의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음으로써 그는 한층 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작가가 됐다.

-이런 그라스가 최근 2차대전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조직인 나치 친위대(SS)에 복무한 적이 있다고 62년만에 털어놓으면서 독일은 물론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17세 때인 1944년 SS 제10기갑사단에 배치돼 종전까지 복무했다는 사실을 내달 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언론에 밝힌 것이다. 독일 언론들은 그를 위선자 취급 하는 모양이고, 일부는 노벨문학상 반납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독일에 점령당한 뼈아픈 역사를 가진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더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은 "그를 만나면 악수하지 않겠다"며 그라스의 출생지로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그단스크 명예시민 자격 취소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라스는 왜 60년이 넘게 이를 숨겨 왔을까. 그는 "나치 친위대 복무 사실은 아내 말고는 자식들도 몰랐다"며 "젊은날 세상 물정 모르고 한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이후 줄곧 나를 짓눌렀으며, 그것은 나의 '주홍글씨'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홍글씨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양철북>(1959)의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의 입을 통했든, 47그룹의 동료 하인리히 뵐이 자신보다 27년이나 앞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였든, 그는 더 일찍 자신의 악취에 '이름을 붙여' 주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가 2002년 방한시 "일본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깨닫는다 해도 그걸 내놓고 말하지도 않는다"고 독일과 일본의 과거 청산을 비교했던 말이 지금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8월은 오욕의 시간이다. 그라스의 고백에, 이라크전 일으켜 그로부터 욕 먹었던 부시와 블레어, 8ㆍ15에 신사참배 강행한 고이즈미, 혹은 땅찾기에 혈안인 이 땅의 친일파 후손 등등 평소 고상한 문학이니 이상이니 따위 경멸해왔을 세계의 현실주의자들은 "거 봐, 잘난 척하더니, 너희들은 별 수 있냐" 하며 코웃음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세기'(1999)를 소설로 썼던 노작가의 인간적 나약함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그라스의 고백은 너무 늦었다. 20세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하종오 피플팀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남진우씨의 새 시집이 출간되었다.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지성사, 2006). 그의 네번째 시집이라고 하는데, 시인으로서는 지난 81년에 등단했으니까 네 권의 시집은 (상당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과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남진우는 첫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민음사, 1990)과 첫 평론집 <바벨탑의 언어>(문학과지성사, 1989)를 펴낸 '젊은 남진우'이다(그의 평론집을 나는 지방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고 시집은 사서 읽었다. 내 기억에 그는 정현종론으로 등단했으며 초기에 '시운동' 동인들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적어놓고 보니까 시인으로서 먼저 등단하고서도 평론집을 먼저 낸 셈인데, 아무튼 군복무 때문에 휴학중이던 한 문학도에게 20대 초반에 시와 평론으로 등단하고 후반에 각각 첫시집과 평론집을 상자한 이 젊은 시인/비평가는 얼마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갓 스물에 쓴 것으로 보이는 그의 데뷔시 제목이 "로트레아몽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이었다. 요즘 같아선 '치기'로 폄하될 수 있겠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런 류의 '포즈'는 시인다움의 징표였다. 가령 이런 시를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1
그 겨울 내 슬픈 꿈은 18세기 外套를 걸치고 몇닢 銀錢과 함께 외출하였다. 木造의 찻집에서 코피를 마시며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흰 살결, 파고드는 快感을 황혼까지 생각하였다. 때로 희미한 등불을 마주 앉아 남몰래 쓴 詩를 태워 버리고 아, 그 겨울 내 슬픔 꿈이 방황하던 거리, 우울한 샹송이 정의하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 숱한 만남과 이 작은 사랑의 불꽃을 나는 가슴에 안고 걷고 있었다.

2
밤 열시,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그녀의 살속으로 한없이 下降하는 헝가리언 랍소디. 따스한 체온과 투명한 달빛이 적시는 밤 열시의 고독, 머리맡에 펼쳐진 十二使徒의 눈꺼풀에 主祈禱文이 잠시 머물다 간다.

3
날개를 준비할 것 낢, 혹은 우리의 좌절에 대한 代名詞. 솟아오름으로 가라앉는 변증법적 사랑의 이중성.

4
가로등이 부풀어 오른다. 흐느적거리는 밤공기 사이로 킬킬대는 불빛의 리듬. 안개는 선술집 문앞에 서성이고 바람은 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다. 쉬잇 설레이는 잠의 音階를 밟고 내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보았다. 아득히 밀려오는 파도와 살 섞으며 한잎 두잎 지워지는 뱃고동 소리,조용히 모래톱에 속삭이는 잔물결을 깨우며 한 여인이 꽃을 낳는 것을.

5
물결치는 시간의 베일을 헤치고 신선한 과일처럼 다디단 그대 입술은 그대 향기로운 육체는 깊은 昏睡로부터 꿈을 길어오른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박수를 치며
젖은 불꽃의 옷을 벗으라 나의 하아프여.

가만히 촛불을 켜고 기다리자.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地中海의 녹색 문을 열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피어나는 연꽃 속에 눈뜨는 보석을 찾아.

6
子正이 되면 샤갈과 함께 방문하는 러시아의 雪海林. 모닥불 옆에 앉아 우리는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船舶을 그 긴 항해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는군요. 바람 부는 海岸 푸른 고요 속에 목마른 자 홀로 남아 기도하는 子正의 海岸 그 어둠 속에 눈은 내리고 내리고 幼年의 마을 어디쯤 떠오르는 북두칠성. 地上의 모든 불빛이 고개 숙인다.

7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문학청년으로서의 감수성과 재능 이외에도 이국적 취향과 교양체험 등이 쉽게 감지되는 시인데, 사실 이러한 경향성은 남진우의 시세계를 관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몇몇 리뷰들을 읽다 보니까 문단에서는 기형도와 같은 연배의 시인으로서 '그로테스크'한 시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이해되는 듯한데, 기형도의 등단작 '안개'(1985)와 남진우의 '로트레아몽' 사이의 거리는 현실과 환상 사이만큼이나 멀며 뚜렷하다. 그리고 그건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남진우의 시들을 읽어본 지 꽤 됐지만 그의 시에 가난과 실연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던가 의문이다(평론가 김현이 기형도의 유고시집을 해설하면서 지적한 기형도의 심리적 외상이다). 

 

 

 

 

'죽음'에 대한 관심 정도는 공유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경우에도 남진우의 관심은 보다 간접적이고 추상적이다. 비평가로서의 계열을 따지자면 남진우적 비평의 정점에 모리스 블랑쇼가 놓여 있을 것이다. 죽음과 언어, 이 두 가지가 나는 블랑쇼적 비평의 화두라고 생각하며 남진우의 비평의 특장은 죽음과 언어의 치명적인 매혹을 짚어내는 것이지 않나 싶다. 이때 '죽음'을 '신성'으로 '언어'를 '책'으로 바꾸어놓아도 무방하다. 실상 그의 시들 또한 그 두 열쇠어들의 자장 안에 놓인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1996)에서 <타오르는 책>(2000)을 거쳐서 이제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2006)까지. 그러한 시세계를 요약해줄 수 있는 문구로 '신성을 향한 귀족주의'를 고를 수 있을까? 그 귀족주의의 태생과 운명은 사실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노트에 이미 기입돼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때로 나이를 먹지 않는다... 

동아일보(06. 08. 12)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문 앞까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처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 짧은 잠에서 깨어나 문득 눈을 뜬 깊은 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의 텅 빈 방.’(‘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에서)

이제 남진우(46·사진) 시인은 보이는 것을 노래한다. 앞선 시집들에서 그는 추상적인 것,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시를 썼다. 그러나 네 번째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에는 동물과 도시의 모습 같은, 금세 떠올릴 수 있는 시적 대상으로 가득하다(*'내 방문 앞'까지 찾아온 사자 한 마리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나?). 표제시 ‘새벽 세 시…’를 포함해 ‘긴 혀를 늘어뜨리고/두 눈에 푸른 별을 켠 개들’(‘저수지의 개들’)이나 ‘갯벌을 건너가는 꽃게 한 마리’(‘종일토록’), ‘해 저물도록 그림엽서를 팔던 소녀’(‘오래된 사원’) 등이 그렇다.

-그는 죽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적 믿음을 시로 옮기는 데 애써 왔다. 새 시집에서는 그동안 죽음과 어둠의 이미지로만 갇혀 있던 시어들을 풀어 준다. 구원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다. 시 곳곳에서 세속적인 세상을 순례하면서 성스러운 ‘무엇’을 찾아다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이런 목적의식을 더욱 명료하게 한다.

-‘어스름이 내리는 강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물소 한 마리 느릿느릿 내 곁을 지나간다…뿔이 긴 소를 타고/ 저 물속으로 깊이 자맥질해 들어가면/거기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을까.’ 그러나 시의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는다.

-평론가 신형철 씨는 “스스로 성스럽지 못한 세상에서 스스로 성스럽지 못한 자의 회한과 동경이 그의 시를 낳았다”고 평한다. 이번 시집의 주제 의식이기도 하다. 상상의 공간에만 머물러 있던 시인이 세상으로 나와 이곳저곳을 다녀 보지만, 어디든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타락한 도시다. 생존경쟁의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시 ‘문 밖에서’의 한 부분.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즐비한 술집 앞엔 매일 얼어 죽은 시체가 발견되곤 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일 년 내내 기침을 해댔고/ 검은 안개 속을 허우적거리듯 걸어다녔다/ 거리의 검투사들은 찌르고 찔리며 환호 속에 죽어갔다.’(김지영 기자)

(*)기형도의 '안개'에는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죽었다"란 구절이 나온다. 거기에 비하면 "즐비한 술짚 앞엔 매일 얼어 죽은 시체가 발견된곤 했다"는 구절은 관념 혹은 상징이다. 그 상징의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나는 그것이 남진우 시의 매혹이면서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일보(06. 08. 13) 남진우 시의 본적은 묘지다. 때때로 책들의 무덤인 도서관이나 우물, 항아리 속으로 주거를 옮기기도 하지만, 파묻히는 곳이 아니면 가지 않는 그의 시는 한 번도 제 주소를 죽음이라는 본적지에서 전출한 적이 없다(*좋은 지적이다. 문학담당 기자라면 이런 정도의 지적은 해줘야 한다). 문학 평론가이자 시인인 남진우 씨가 네 번째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타오르는 책> 이후 6년 만이다.

-사자, 여우, 개, 호랑이, 악어떼, 벌, 전갈, 낙타 등이 끊임없이 출몰하며 ‘동물의 왕국’을 이루는 이번 시집에서 화자는 번제에 바쳐진 제물처럼 물어 뜯기고 찢긴다(*'사자'는 이 '왕국'의 왕이자 왕족/귀족이다). “한껏 아가리를 벌린 호랑이는 단숨에 나를 삼켜버리고” (‘먼 산 먼 길’), “책을 펼치면 전갈에 발뒤꿈치를 물린 채 낙타 등 위에 혼곤히 엎드린 내가 보인다” (‘전갈에 물리다).

-그러나 시인은 목 잘린 얼굴, 피눈물을 흘리는 깊게 파인 눈구멍, 절단된 사지가 나뒹구는 이 그로테스크한 세속 도시에서 순교를 앞둔 사도처럼 묵묵하기만 하다. 그가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까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처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라고 쓸 때, “밤이면 밤마다 죽은 여인이 다가와/ 네 튼튼한 심장을 먹고 싶다, 조금만 다오 말했네// 두 팔에 안긴 채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내 심장을 먹어가며/ 죽은 여인은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고 쓸 때, 시인은 아픈 몸을 내주며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똑딱거리는 심장이 그마저 멈출 날을 기다릴 뿐”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추적자가 문을 두드리는 이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방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문 밖에서’)고, “내 인생에 더 이상 반전은 없다” (‘나는 흑색 소설만 읽는다’)는 것을 익히 아는 탓이다.

-이 시인의 시 세계를 구축하는, 성(聖)을 향한 귀족주의는 ‘새벽 세 시…’에서도 여전하다. 세속 도시를 떠나 앙코르와트로, 반얀트리 밑으로, 카타콤으로 순례의 행보를 내디뎌 보지만, “순례자 대신 장사치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리/ 영혼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자들이 비좁은 계단 사이 어깨를 부딪치며/ 값싼 지폐와 시성을 교환하기 위해 오”가는 이곳에서 그의 시는 홀로 성스럽고자 하는 자의 고독으로 울울할 뿐이다.(‘몽생미셸’)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선지자조차 지쳐 떨어진 밤/ 길가 하수구는 붕글어 터지는 말의 거품들로 가득”하고 (‘겨울일기’), 그는 다만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라던 기형도의 '켤레시인'답게 읊조릴 뿐이다. “흑색 소설을 읽으며 오늘도 나는 확인한다, 모든 길 끝엔 파헤쳐진 무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박선영 기자)

문화일보(06. 08. 11) 남진우(46)씨의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마리>는 한밤에 깨어있는 새벽에 깨어있는 예술가의 고독이 구원을 지향하는 순례자의 언어로 푸른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은 세속 도시의 타락에 대한 절망을 겉에 묻히고 있 다. 이 때문에 속에 배인 푸른 기운의 유열을 맛보기 위해선 시 인이 구축한 언어의 수도원, 혹은 사원에서 참을성 있게 순례자 의 기도를 들어야 한다. 이런 인내가 오늘날의 시독자들에게 얼마나 있을까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세상의 허무와 맞대응하며 먼 곳의 신성(神性)을 열망하는 시세계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드문, 독자적인 영역의 신비로움으로 읽는 이를 매혹한다 .

-1부의 시편들은 여우, 개, 사자, 반달곰, 호랑이 등의 동물들이 나타나 시의 화자가 세속도시에서 느끼는 절망과 갈증을 확장한 다.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까 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쳐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 ’(표제작 중)

-2부의 작품들은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문밖에서’ 중)에서 삶 자체가 곧 죽음인 모습을 어두운 배경에서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앙코르와트와 인도의 사원 등을 순례한 후에 씌어진 3부의 시편들은 성소(聖所)를 잃어버린 자의 비애를 노 래하고 있다.

-‘저녁이 머뭇대며 내 주위를 에워싸기까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조용히 물살을 가르며 내게 다가오는 숲 그림자/ 나는 어 느덧 온몸을 휘감아 오르는 나뭇가지 푸르름에 휩싸여/ 아무도 찾지 못하는 사원이 된다’(‘오래된 사원’ 중).

-숲으로 된 푸른 성벽의 이미지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해 온 남씨가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시세계를 평하는 글에서 등장한 바 있다. “기형도의 시는 우리 세계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아름답고 신비 로운 성(城)을 찾아가는 언어의 순례이자 그 성을 은폐하고 그 성을 향해 가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는 현실에 대한 강 력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남씨는 문우인 요절시인 기형도가 생전에 가다가 멈춰버린, ‘숲으로 된 푸른 성벽’ 너머의 신성을 찾아 순례자의 길을 고독하 게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장재선 기자)

06. 08. 12.

 

 

 

 

P.S. 표제시의 '사자'는 '사자(死者)'이기도 하다는 리뷰도 읽었는데, 일리있는 견해이다. 한편으로 지적하자면, 한국시에서 '사자'는 비교적 드물게 등장하는 동물이다. 우리시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동물 중의 하나는 '낙타'인데, 개인적으로 '낙타'가 등장하는 시들의 대부분은 그냥 '포즈'라고 생각한다. '열사(熱沙)의 사막' 운운하는 시들이 대개 자기연민적 관념에 빠져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시의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이

김천의료원 6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로 시작하는, 문태준의 '가재미' 같은 시이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 이게 리얼리티의 척도이다. '초원의 사자'나 '사막의 낙타' 같은 시적 언술들이 얼마큼 멀리갔는가를 가늠해주는. 최근 우리시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동물들의 대표종을 꼽자면 가재미(=현실적 서정주의)와 낙타(=전통적 정신주의)와 사자(=초월적 귀족주의)와 고슴도치(=전위적 미래주의) 정도이다(그러고 보니 '동물의 왕국'이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