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월 24일~25일 양일간 부산대학교에서 열리는 한국교육사상학회 2023년 하계학술대회에 


초청을 받아 2개의 발표를 하기로 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일정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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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인문학연구소에서 내는 학술지 [코기토] 100호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역설적 유물론"(paradoxical materialism)으로 재규정함으로써 


신유물론과 스피노자 철학의 차이를 밝혀보려고 했습니다. 


이 논문을 인용하거나 이 논문에 관해 토론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출판된 판본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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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신유물론, 스피노자

[이 논문은 202369일 부산대학교에서 개최된 󰡔코기토󰡕 100호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학술대회에서 날카롭고 유익한 논평으로 논문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정대훈 교수에게 심심한 우정과 감사의 뜻을 전한다.]

 

 

 

국문초록

이 논문은 인류세와 관련하여 신유물론과 스피노자 철학을 비판적으로 비교검토해보려고 한다. 최근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인류세와 그것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을 적절하게 개념화하는 것이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인류세라는 것이 지구 시스템에 미친 인간의 행위성으로 인해 발생한 지구 시스템의 변화 (즉 기후위기와 종 다양성 파괴, 해양 생태계의 훼손 같은 현상들)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지칭하는 명칭이라면, 그것은 과학적 명칭임과 동시에 규범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인류세는 "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W. B. 갈리)일 수밖에 없으며, 상이한 이론적, 윤리적 입장을 산출하게 된다. 신유물론은 인류세의 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물질의 행위성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지구 시스템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유물론은 그 이론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난점과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역설적 유물론으로 이해된 스피노자 철학이 이러한 난점과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는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을 다섯 가지 테제로 제시하면서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주제어

능동-수동, 제인 베넷,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신유물론, 역설적 유물론, 인류세, 행위성

 

 

I. 머리말

 

2000년 미국의 생물학자인 유진 스토머(Eugene F. Stoermer)와 네덜란드의 화학자인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의 한 페이지짜리 기고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면서,[Paul J. Crutzen & Eugene F. Stoermer, “Have we entered the "Anthropocene?”,  IGBP Newsletter 41 (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 2000). http://www.igbp.net/news/opinion/opinion/haveweenteredtheanthropocene.5.d8b4c3c12bf3be638a8000578.html (2023.6.15. 접속)] 지구 시스템과학이나 지질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분야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과 예술 분야, 그리고 대중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급격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인류세 개념은 월터 브라이스 갈리(Walter Bryce Gallie)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essentially contested concepts)이라고 부른 것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W. B. Gaille, “Essentially Contested Concepts”(1956), in Philosophy and the Historical Understanding, Schocken, 1964.] 인류세라는 것이 지구 시스템에 미친 인간의 행위성으로 인해 기후위기와 종 다양성 파괴, 해양 생태계의 훼손 같은 현상들로 표출되는 지구 시스템의 변동이 일어나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지칭하는 명칭이라면, 그것은 과학적 분석 및 서술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상이한 윤리적정치적 입장을 산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세에 관한 상이한 이론적규범적 입장들이 제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이점에 관해서는 클라이브 해밀턴, 정서진 옮김, 󰡔인류세󰡕 (이상북스, 2018) 참조.] 도나 해러웨이나 제이슨 W. 무어의 저작이 보여주듯이 인류세라는 명칭 자체가 본질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 하기󰡕 (마농지, 2021);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망 속 자본주의󰡕 (갈무리, 2020).]


철학 및 인문학에게 인류세가 함축하는 것은 실체와 사물,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명,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무생명, 이론과 실천 같이 인문사회과학 및 과학 일반의 주요 범주들로 사용되어 오던 것들이 이제 더 이상 자명한 사유와 실천의 토대로 간주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인류세는 한편으로 인간의 행위성이 지구 시스템 자체에 영향을 미칠 만큼 위력적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체들의 존립 기반 자체가 붕괴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역설적 사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곧 인류세는 하이데거가 말하듯 지구 전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배를 위해 인류의 모든 능력을 최고도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으로 하여금 더 새롭고 가장 새롭게 발진하도록 촉발하고 그의 안전한 전진과 목표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지침을 정립하도록 촉구하는 은밀한 목표”[마르틴 하이데거, 박찬국 옮김, 󰡔니체󰡕 2(도서출판 길, 2012), 132.]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따라서 인간의 주체성의 한 정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역으로 인류세는 인간의 주체성 내지 행위성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근본적인 존재 조건(시스템으로서의 지구)에 타율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그 행위성의 정점이 곧 그것의 파괴의 지점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따라서 철학이나 인문학에게 제기되는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인류세의 역설을 초래하게 된 우리 사유의 기본적인 바탕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더불어 이러한 재난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개념적 자원들을 모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신유물론은 인류세의 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물질의 행위성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지구 시스템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신유물론은 그 이론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난점과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에서 나는 신유물론의 주요 논객 중 한 명인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 사물들의 정치생태학󰡕을 중심으로, 신유물론의 이론적 쇄신이 어떤 것인지, 하지만 동시에 그 쇄신에 수반되는 난점이나 모호함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ke University Press, 2010;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이 논문에서는 국역본의 번역을 수정해서 활용하겠다.] 내가 베넷의 저작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신유물론을 이론화하면서 여러 사상가들을 원용하지만, 특히 스피노자 철학을 이론적 준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스피노자는 베넷만이 아니라 다른 신유물론 이론가들, 더 나아가 포스트휴머니즘이나 이른바 '정동이론'(affect theory)의 이론가들에 의해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활용이 적지 않은 난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특별히 스피노자 철학을 역설적 유물론(paradoxical materialism)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베넷을 비롯한 신유물론 이론가들과의 차이점을 드러내고 싶다. 이 논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핵심 논점은, 스피노자의 유물론이 지닌 역설적 성격을 신유물론 이론가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인류세 문제를 사고하는 데서 스피노자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먼저 베넷의 신유물론의 논지를 살펴본 뒤, 내가 이해하는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을 다섯 가지 테제로 제시하면서 신유물론과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다.

 

II. 신유물론의 이론적 쇄신

 

1. 신유물론의 공통적인 요소

 

신유물론은 단수로 통용되지만 사실은 복수로 표기되어야 합당한 명칭이 아닐까 싶은데, 신유물론자들로 통용되는 이들의 구체적인 이론적 지향이 상당히 차이를 지닐뿐더러, 정치적 입장도 일관되거나 균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Coole & Frost, “Introducing the New Materialisms”, eds., New Materialisms: Ontology, Agency, and Pol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10; 김환석, 사회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신유물론, 󰡔지식의 지평󰡕 25 (2018); 이준석김연철, 사회이론의 물질적 전회: 신유물론, 그리고 행위자네트워크이론과 객체지향존재론, 󰡔사회와 이론󰡕 53 (2019); Christopher N. Gamble, Joshua S. Hanan, & Thomas Nail, “What Is New Materialism”, Angelaki 24.6 (2019); 릭 돌피언이리스 반 데어 튠, 박준영 옮김, 󰡔신유물론: 인터뷰와 지도제작󰡕 (교유서가, 2021); 문규민, 신유물론 입문: 새로운 물질성과 횡단성(두번째 테제, 2022); 릭 돌피언, 우석영 옮김, 󰡔지구와 물질의 철학󰡕 (신현재, 2023). 뒤의 두 권의 책은 여러 측면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신유물론이라는 단수적인 명칭이 유명론적인 비판에 딱 들어맞는 헛된 소리(flatus vocis)일 뿐이라고 일축하기는 어려운 이유는, 신유물론으로 표상되는 이론들 내지 담론들에는 몇 가지의 공통적인 지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담론 내적인(또는 언표(énoncé) 차원의) 공통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들이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고발한다는 점이다. 마치 반 세기 전에 알튀세르가 이론적 반인간주의(anti-humanisme théorique)를 표방하면서 인간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 중 하나로 고발했듯이, 또한 데리다가 로고스 중심주의 내지 음성 중심주의를 서양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적시했듯이, 또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이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서양 중심주의내지 유럽 중심주의를 탄핵했듯이, 그리고 그 이후에 여러 이론가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중심주의를 다양하게 만들어냈듯이, 이번에는 신유물론자로 분류되는 이론가들은 공통적으로 인간 중심주의라는 표적을 제시하고 있다. 이때의 인간 중심주의는 무엇보다도 인간 대 비인간의 존재론적 분할 위에서 인간들에게만 행위 능력 내지 행위성(agency)을 부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 신유물론은 비인간적 사물들, 특히 비유기적인 물질적 사물들에게도 고유한 행위 능력 내지 행위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존재론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할 텐데, 실제로 신유물론 및 그와 결부되는 다양한 담론들(행위자네트워크이론(ANT),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존재론(OOO), 포스트휴머니즘 등)은 존재론의 영역에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존재론은, 적어도 신유물론의 일부에서는, 관계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비인간적인 사물들, 특히 물질적인 사물들에게 고유한 행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조건은, 사물들을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인(또는 타자들과의 관계를 외생적인 조건으로만 삼고 있는) 실체들로 이해하지 않는 일이다. 사물들은 관계들의 네트워크 내지 배치(assemblage)로 이해될 때 인간 중심주의의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행위성을 회복할 수 있다.


신유물론의 또 다른 핵심 주장은 관계론적 존재론의 시각에서 비인간 존재자들에게 고유한 행위성을 긍정할 때 새로운 규범적 통찰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신유물론이 비판적인 담론이라면,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사변적 담론에만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의 규범적 토대를 무너뜨리고 좀 더 생태학적이고 좀 더 해방적인 규범적 통찰까지 제시해주어야 한다. 인간 중심주의는 사변적 담론이기 이전에, 인간을 목적이자 척도로 삼아 (인간 및) 비인간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이론적실천적 집합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2. 제인 베넷의 스피노자주의적 신유물론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은 신유물론의 고유한 이론적 특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로서 손색이 없다. 이 책이 불과 10여 년 사이에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인 베넷은 생기적 물질성”(vital materiality)을 기반으로 비인간에 대하여 행위성을 부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는 생명/물질의 이원론”[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27.]을 특징으로 하는 고전적인 생기론과 달리 생기(vitality)의 개념을 인간의 의지와 설계를 흩뜨리거나 차단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궤적, 성향 또는 경향을 지닌 유사 행위자(quasi agents)나 힘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들먹을 수 있는 것, 상품, 폭풍, 금속의 역량(capacity)”[같은 책, 9]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되면 생기는 그것을 영혼이나 생명의 고유한 특성 내지 역량으로 간주해왔던 서양 근대의 지배적인 철학 전통과 달리 비인간적인, 더 나아가 비유기적인 물질에게까지 귀속되며, 이는 존재론의 차원에서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분할했던 오래된 위계적 대립틀의 해체를 낳는다.

베넷의 시도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물들의 역량 또는 비인간적인 물질들의 행위 역량을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사고하기 위해 스피노자(그 자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들뢰즈-과타리에서 유래하는 아펙트(affect)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번역본에서는 정동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 발표문에서는 아펙트라고 표현할 것이며, 스피노자의 affectus 개념은 정서라고 옮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는 아펙트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는 아펙트가 정치와 윤리의 핵심이라고 내내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인간의 신체에 제한되지 않는 아펙트로 나아갈 것이다. 이제 나는 아펙트적인 촉매가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관계 능력의 향상보다는, 비인간 신체 내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촉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이 역량(power)은 초인격적(transpersonal)이거나 상호주관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이념적으로도) 인간으로서 상상될 수 없는 형식에 내재하는 비인격적(impersonal) 아펙트다. 여기서 나는 주술성(enchantment)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두 방향을 강조한다.[번역본에서는 “enchantment”황홀함이라고 번역하는데, 뒤에서 지적하겠지만, 막스 베버와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적절한 번역어라고 하기 어렵다.] 첫 번째 방향은 주술성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그의 행위 역량이 강화되기도 하는 인간을 향한다. 두 번째 방향은 인간의 신체 및 다른 물체들에 (유익하거나 해로운) 효과를 만들어내는 사물의 행위 능력(agency)을 향한다. 유기적 신체와 비유기적 물체, 자연의 대상과 문화적 대상 ...... 모두가 아펙트적이다. 나는 여기서 아펙트를, 일반적인 신체가 갖는 활동성과 반응성이라고 폭넓게 지칭하는 스피노자주의적 개념(a Spinozist notion of affect, which refers broadly to the capacity of any body for activity and responsiveness)에 기반해서 해석하고 있다. ...... 내가 비인격적 아펙트 또는 물질적 생동(material vibrancy)이라고 말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물질에 깃드는 정신적인 부가물 또는 생명력’(life force)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생기론이 아니다. 나는 물리적 신체에 들어가 그것에 영혼을 불어넣는 별개의 힘을 상정하지 않으며, 아펙트를 물질성과 동일시한다.”[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17. 강조는 원문의 것이고, 번역은 수정.]

 

아펙트에 대한, 더 나아가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대한 베넷의 이해 방식이 지닌 난점들 내지 모호함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그가 아펙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왜 그것이 생기적 유물론을 이론화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해보겠다. 우선 베넷은 아펙트를 신체적인/물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스피노자 자신이 아펙트 또는 아펙투스(affectus)에 대해 제시하는 정의(󰡔윤리학󰡕 3부 정의 3)와 이것에 기반을 둔 󰡔윤리학󰡕 및 다른 저술들에서의 용법과 비교해볼 때, 베넷의 아펙트 정의는 사실은 스피노자 자신보다는 들뢰즈의 정의(특히 󰡔천 개의 고원󰡕에서 확립된)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베넷은 2아펙트적 신체들이라는 제목의 절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들뢰즈과타리의 배치 개념과 관련하여 관계론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들뢰즈의 해석을 준거로 삼아 스피노자의 아펙투스 및 코나투스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다.[같은 책, 77.]

둘째, 더 나아가 베넷은 아펙트를 인간 또는 생명체에 고유한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것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확장한다. “비인격적 아펙트 또는 물질적 생동이라는 대목이 보여주듯, 아펙트는 비인격적 사물들에도 내재하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아펙트야말로 물질적인 사물들을 무기력(inert)”[같은 책, 42.]하거나 수동적인 수단”[같은 책, 54.]으로 간주하는 인간 중심적 편향에서 벗어나, 물질의 행위성 내지 생동을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적 자원이다. 이렇게 이해된 아펙트는 인간의 관계 능력의 향상을 산출하는 촉매를 뜻하기보다는 비인간 신체 내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촉매를 의미한다고 베넷은 지적한다. 촉매의 사전적인 의미가 자기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물질의 화학 반응을 매개하여 반응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늦추는 작용을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베넷이 아펙트를 촉매로서, 그것도 비인간 신체, 특히 물질적 사물 내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촉매로 이해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아펙트는 물리화학적인 변용 작용 그러한 작용을 수행할 수 있는 사물의 행위 능력을 지칭하는데, 이때의 행위 능력은 촉매로 작용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르지 않다. 앞서 인용했듯이 베넷이 생기를 자신만의 궤적, 성향 또는 경향(trajectories, propensities, or tendencies of their own)을 지닌 유사 행위자(quasi agents)나 힘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들의 역량으로 정의하는 것은 이러한 개념적 변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비인격적 아펙트와 관련하여 주술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넷이 사용하는 주술성 개념은, 알다시피 막스 베버에서 유래한 것이다. 베버는 전근대세계와 구별되는 근대세계의 고유한 특성을 탈주술화”(Entzauberung, disenchantment)로 규정한 바 있는데(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학문(1917)), 이 말의 뜻은, 근대인들은 자신의 주변 환경, 특히 자연 세계를 불가해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는 세계로 이해하지 않고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는 목적합리성(Zweckrationalität)으로서의 근대적 합리성의 결과인 동시에 그러한 합리성이 발전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따라서 탈주술화 개념은 자연의 지배자로서의 인간 대 인간의 이익을 위해 계산하고 활용할 수 있는 대상 내지 수단으로서 자연, 곧 능동적 주체로서의 인간 대 수동적 객체로서의 자연이라는 존재론적 구별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넷이 비인격적 아펙트, 따라서 물질의 생기와 관련하여 주술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의도적인 일임을 알 수 있다.[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인간의 자기도취를 논박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성이 비인간 자연과 어느 정도 공명한다는 의인관을 조금은 받아들이고 갖출 필요가 있다.”(24)]

이렇게 이해된 주술성은 두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첫 번째 측면은 인간 이외의 다른 사물들에 주술적인 힘 내지 역량이 깃들어 있다고 느낌으로써 자신의 행위 역량을 증진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측면이다. 주술성에 대한 믿음과 감각은 (경우에 따라) 행위 역량의 증대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은 더 나아가 주술성을 사물의 행위 능력 자체로 이해한다. 이 두 번째 측면이 사실, 주술성 개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베넷의 핵심 논점을 잘 보여준다. 물론 주술성 개념을 복원함으로써 사물의 생기, 비인격적 사물에 고유한 행위 능력을 옹호하려는 것은 불가피하게 의문을 낳을 수밖에 없다.

베넷은 책의 첫 머리에서부터 자신의 저술 목표가 하나의 철학적 기획 및 그와 관련된 하나의 정치적 기획”[같은 책, 7.]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곧 베넷의 궁극적인 목표는 존재론적이거나 인식론적인 게 아니라 규범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다. 사실 인간 중심주의 내지 인간 예외주의를 비판하고 존재론의 차원에서 모든 사물의 존재론적 수평성을 긍정하는 것, 아울러 그동안 인간의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의 지위만 부여받았던 비인간적 존재자들, 특히 물질적 사물들에게 고유한 생기(vitality)를 긍정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규범적 함의를 지닌다. 특히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같은 다중적인 생태적 위기를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 물질의 생기 내지 사물들의 역량/권력”(power of things)을 옹호하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에 입각한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반()생태적 속성에 대한 문명론적 고발이라는 함의를 지닐 뿐 아니라, 좀 더 호혜적이고 지속 가능한 대안적 문명 건설을 위한 규범적 기초의 탐색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베넷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물들의 역량/권력에 입각한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이 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특히 이 책의 7장과 8장에서 집약적으로 논의된다. 베넷은 존 듀이와 자크 랑시에르를 대화의 상대방으로 삼는다. 그가 존 듀이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듀이가 공중”(public)을 관계론적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공중을 인간 시민들에 의해 구성된 실체로 한정하는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듀이가 말하는 공중은 문제에 반응하면서 창발하는 것으로서, 명시적인 합리적 계획 내지 의도에 따라 형성되고 통제되는 집단들이 아니라, “교호-작용(trans-action)의 간접적인 결과들에 체계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이 마땅하다고 여길 만큼 그러한 결과들에 변용된 사람들로 구성”[John Dewey, Public and Its Problem, p. 16; 󰡔생동하는 물질󰡕 249쪽 주 13)에서 재인용.]되는 것이다. 베넷이 주목하는 교호-작용이라는 개념은, 명시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개인들이나 집단들 간의 상호작용이나 합목적적인 전략적 행위와 달리, 우발적으로 생성된 문제들로 인해 피해를 겪고 그것에 반응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신체들 사이의 변용 작용들을 가리킨다.[이런 측면에서 이 개념은 캐런 바라드의 내부적 작용”(intra-action)이라는 개념과 비교해볼 만하다. 캐런 바라드, 행위적 실재론: 과학실천 이해에 대한 여성주의적 개입, 󰡔문화과학󰡕 59(2009).] 이 과정 속에서 신체들의 연합”[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248.]으로서의 공중은 형성되고 분해되었다가 다시 다른 문제를 계기로 재형성된다. 따라서 듀이가 정의하는 공중은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우발적인 문제들에 의한 반응 및 변용 작용(“교호-작용”) 속에서 인도되는것인데, 베넷은 브뤼노 라투르를 원용하면서, 듀이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러한 공중이 반드시 인간의 분투”(endeavors) 내지 인간의 노력”(efforts)[같은 책, 252~53. 주지하다시피 “endeavor”“effort”는 영어권에서 conatus 개념의 번역어로 널리 쓰인 용어들이다.](강조는 원문)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가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베넷 자신은 2장에서 2003년 미국과 캐나다를 연결하는 송전망의 이상 작동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정전사태를 인간과 비인간(전기, 발전 장치, 송전선, 전력회사, 소비자, 연방 에너지규제위원회 등) 사이의 교호-작용 및 이를 통한 공중의 형성의 적절한 사례로 제시한다.

베넷이 랑시에르의 정치이론에서 주목하는 것은 공중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잠재적인 파열”(disruption)[같은 책, 257. 번역본에서는 분열이라고 옮기는데, 이것은 부적절한 번역어다.]의 힘이다. 그가 볼 때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공동체에서 신체들이 분배되는 질서에 대한 독특한 중단”[자크 랑시에르, 󰡔불화󰡕, 160; 󰡔생동하는 물질󰡕, 258쪽에서 재인용.]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치적 제도 내에서의 권력의 분배를 둘러싼 합법적인 투쟁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다시 나누고 지각 가능한 것의 체제를 전복”[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262.]시키는 파열의 작용에서 찾아야 한다. 베넷은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적 행위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파열이라든가 폭발”(eruption) 같은 은유들 자체가 이미 정치 행위가 자연의 힘과 유사하다는 점을 암시”[같은 책, 260.]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비인간에게 데모스의 참여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으며, 파열은 반드시 합리적인 담론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수반해야”[같은 책, 261.] 한다고 간주한다. 곧 랑시에르는 데모스 내지 인민을 형성된 사물이나 고정된 실체로 이해하지 않고, “통제하기 어려운 활동 내지 비규정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 간주하고, 데모스를 이런저런 특수한 신체들로 환원할 수 없는 초과”(excess)[같은 책, 같은 곳.]로 파악하고 있음에도, 비인간적인 사물들에게 행위 능력을 부여하는 데 대해서는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베넷 자신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 이론이 인간 중심적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평등한 자유의 이념 및 제도,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성립하고 실행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언어를 다룰 줄 알고 사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같은 책, 263.]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베넷은 민주주의의 핵심을 전복적인 파열에서 찾는 이론가인 랑시에르가 민주주의 또는 정치를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데모스의 통치 역량을 불신했던 플라톤적인 편견에 버금가는 편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으로는,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에 미치는 비인간적 사물들의 영향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미국인의 전형적인 식습관이 이라크 침공을 유발하는 프로파간다에 대한 광범위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가?”[같은 책, 264.] “가족농이 기업식 농업으로 전환될 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문화가 패스트푸드 소비문화로 변할 때, 공중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펼쳐질 때, 석유 채굴과 유통이 가진 폭력을 인식하지 않은 채 연료를 소비할 때”[같은 책, 280.] 생태계가 어떤 변화를 겪고, 인간의 생활양식이 어떻게 굴절되며, 개인들 및 집단들의 정체성 형성이 어떻게 변환되고 이것이 정치에 어떤 효과를 초래하는가? 베넷이 보기에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의 정치적 실천의 중대한 쟁점이지만, 랑시에르의 인간 중심적인 민주주의 개념으로는 여기에 제대로 답변하기 어려우며, 사실 질문을 제기하기조차 어렵다.

따라서 비인간적인 사물들의 행위 능력을 긍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규범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의 조건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 자신이 유기적이면서 비유기적이고, 인간적이면서 물질적인 작용들 및 신체들의 배열”(array of bodies)[같은 책, 276, 강조는 원문.]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자신이 강력한 물질성”[같은 책, 273.]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베넷은, 스피노자, 낭만주의, 화이트헤드 및 니체, 카프카, 베르그손, 그리고 들뢰즈와 과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자들과 문인들이 제기한 바 있는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같은 책, 286. 󰡔윤리학󰡕 1부 정리 29의 주석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natura naturansnatura naturata라는 용어들은 대개 능산적 자연소산적 자연으로 번역되지만, 이 논문에서는 일본어에서 유래하는 이 번역어들 대신 산출하는 자연산출된 자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의 기초 위에서, 인간과 다른 비인간적 사물들에게 능동적인 생성의 능력,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같은 책, 287. 강조는 원문.]을 긍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정치를 위해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3. 베넷의 이론적 강점과 난점

 

베넷의 작업은 무시할 수 없는 이론적 강점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베넷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비인간적 행위자들(actors) 또는 오히려 (행위자네트워크이론에서 유래한 개념을 사용하자면) 행위소들(actants)에 고유한 행위 능력을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물론 및 생기론과 이중으로 구별되는 관점이다. 둘째, 베넷은 인간적 지각의 바깥에, 언어적 표상 너머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물질 및 그것에 고유한 행위 능력을 탐구하려 하지 않고, 관계론적인 입장에서 비인간적인 사물들의 행위 능력에 대해 사고하려고 한다. 그가 스피노자 철학 또는 오히려 들뢰즈와 과타리의 스피노자 전유에서 유래하는 아펙트 개념에 주목하고, 실체로서의 사물들의 본질 내지 정체성이 아니라 (역시 들뢰즈와 과타리에서 유래하는) 배치 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셋째, 규범적 또는 정치적 실천의 측면에서도 베넷의 논의는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해준다. 실로 물질의 생기라는 개념은, 사회정치적으로 인정받는 가치 있는 삶과, 가치 없고 따라서 살해해도 무방한 삶(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의 규범적 구별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비판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이러한 구별을 오직 인간적인 존재자에게만 한정하는 관점들 역시 문제 삼을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날마다 우리나라 및 전 세계의 확진자 수와 위중증 환자의 수, 사망자 수를 계산하면서 확진된 이들에게 연민과 위로를 보내고 사망한 이들을 애도해왔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또 다른 종류의 팬데믹, 훨씬 더 장기적이고 치명적인 팬데믹을 겪고 있는 생명체들(조류독감, 구제역 등)의 안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을 기울여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의 팬데믹이 우리의 팬데믹, 우리의 문명적 삶의 양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은 우리의 규범적 상상력의 범위와 깊이를 훨씬 더 확장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베넷은 환경에서 생기적 물질성으로 이동함으로써 환경 내지 자연의 보호자로서 인간이라는 관념, 그리고 그것이 함축하는 인간과 환경적 조건 사이의 외재적 관계라는 관념과 단절할 수 있게 해준다. 베넷의 생기론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 물질성을 공유하고 있으며, 인간의 행위성은 항상 이미 더 복잡한 물질적 배치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물들의 생기라는 발상은 우리가 인간성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성, 곧 사물성을 인정하고, 이점에 입각하여 공중 및 정치적 행위를 사고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한 정치학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생태적 정치학을 사고하려는 흥미로운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베넷의 논의가 여러 가지 난점 및 모호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려운데, 내가 보기에는 베넷이 스피노자 철학을 전유하는 방식에서 이러한 점들이 뚜렷이 나타난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베넷이 이 책에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는 스피노자는 정확히 말하면, 들뢰즈(과타리)에 의해 전유되고 활용된 스피노자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베넷은 스피노자의 아펙투스 개념을 신체적인것으로 이해하면서, 더 나아가 인간의 신체에 제한되지 않는 아펙트’”, 비인격적인 아펙트”[같은 책, 19.]로 그 개념을 확장하고자 시도한다. 또한 그는 코나투스 역시 신체적인것으로 규정한다. “다른 신체들과 연합하여 자신의 행위 역량/권력(power)을 향상시키려 노력한다는 의미를 지닌 코나투스적 신체.”[같은 책, 14.]

(2) 베넷은 󰡔윤리학󰡕 2부 정리 13의 주석에 나오는 매우 문제적인 구절을 생기적 유물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명제로 받아들인다. 󰡔윤리학󰡕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준 것은 완전히 일반적인 것이어서 다른 개체들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줄표 사이의 해당 구절의 라틴어 원문은 이렇다. “omnia, quamvis diversis gradibus, animata tamen sunt”] 베넷은 이를 다음과 같이 활용한다. “모든 사물이 서로 다른 정도라 할지라도 살아 있다”(all things are “animate, albeit in different degrees”)고 주장한 스피노자.”[같은 책, 43; Jane Bennett, Vibrant Matter, p. 5.]

(3) 베넷은 아주 흥미롭게도 양태(modus, mode)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코나투스 및 아펙트 개념을 재해석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2장의 아펙트적 신체들이라는 절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적 신체 개념이 모든 사물이 동일한 실체양태들이라고 보는 존재론적 시각이라는 맥락에서 연원”[같은 책, 77.]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양태 자체가 많은 단순한(simple)[번역본에서는 일관되게 “simple”이라는 용어를 단일한이라고 잘못 옮기고 있다.] 물체들의 모자이크 조직 또는 배치”[같은 책, 78.]라고 말한다. 또는 단순한 물체들이라는 표현 대신 아마 원시-물체들(proto-bodies)이 더 적절한 용어일 것이다”[같은 책, 79. 이것은 󰡔윤리학󰡕 2부 정리 13의 주석 이하에 나오는 이른바 자연학 소론의 문제적인 개념 중 하나인 “corpora simplicissima”와 관련된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아무튼 베넷에 따르면 단순한 신체들 ...... 과 그러한 신체들이 형성하는 복합적이고 모자이크형인 양태들 모두 코나투스적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양태를 이렇게 풀이한다.

 

여기서 양태라는 말은 동맹들을 형성하고 배치들에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다른 양태들을 변화시키고/양태화하고(mod(e)ify) 다른 양태들에 의해 변화된다. 그러한 변화의 과정은 하나의 양태의 제어 하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어떠한 양태도 위계적인 의미를 지닌 행위자가 아니다. 언제나 우연이라는 요인에 종속되어 있으며 모든 마주침에 내재하는 우연성(chance or contingency)에 종속되어 있는 (변화하는 하나의 집합으로서의) 다른 양태들의 (변화하는) 변용에 맞서 각각의 양태들이 견디고 다투기 때문에, 긴장이 없는 과정은 없다.”[같은 책, 79~80. 해당 대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What it means to be a “mode,” then, is to form alliances and enter assemblages: it is to mod(e)ify and be modified by others. The process of modification is not under the control of any one modeno mode is an agent in the hierarchical sense. Neither is the process without tension, for each mode vies with and against the (changing) affections of (a changing set of) other modes, all the while being subject to the element of chance or contingency intrinsic to any encounter.” Jane Bennett, Vibrant Matter, p. 22.]

 

이것은 스피노자의 양태 개념에 대한 참으로 흥미로운 해석이다. 첫째, 이러한 해석에서 양태들은 끊임없는 변화 과정에 있으며, 양태 자체가 사실은 일시적인 변화의 산물이면서 변화의 촉매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양태는 실체가 아니라 항상 이미 복수의 양태들이 형성하는 동맹들내지 배치들이다. 둘째, 베넷은 양태들 사이에는 아무런 위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의 변용들을 견디거나 그것에 맞서 변용하는 작용을 수행하기 때문에, 양태는 본질적으로 긴장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고 이해한다. 셋째, 양태의 기본적인 존재론적 양상은 우연이며, 베넷은 우연을 표현하기 위해 chance or contingency라는 두 개의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III.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

 

이제 3장에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겠다. 스피노자 철학을 일종의 유물론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드물지 않게 존재해왔다.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스피노자 수용은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에서 알튀세르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스피노자는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앙드레 토젤, 김문수 옮김, 스피노자라는 거울에 비친 맑스주의, 󰡔트랜스토리아󰡕 5 (박종철출판사, 2005) 참조.] 최근의 사례를 살펴보면, 앙드레 콩트-스퐁빌은 자신이 한때 유물론자로서 스피노자주의자였지만, 더 이상 자신은 스피노자를 일관된 유물론자로 간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자신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스피노자주의의 유물론적 측면과 비유물론적 측면을 구별한 바 있다.[André Comte-Sponville, ““Nous avons été spinozistes”, une lecture matérialiste de Spinoza”, Association des Amis de Spinoza, 2020. 10. 21. https://aas.hypotheses.org/706 (2023.6.15. 접속)] 반면 짧지만 유용한 소책자에서 파스칼 세베락은 스피노자의 유물론을 경험적 유물론, 존재론적 유물론, 방법론적 유물론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하고 있다.[Pascal Sévérac, Qu'y a-t-il de matérialiste chez Spinoza? (Paris: HDiffusion, 2020).]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을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전유하려는 베넷과 같은 이론가들의 시도는 상당히 오랜 이론적 전통 위에 서 있는 셈이다. 하지만 베넷의 스피노자 전유는 흥미롭기는 해도 몇 가지 난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스피노자 철학을 역설적 유물론으로 파악해보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내가 이해하는 바,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을 5가지 테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첫 번째 테제: 물질과 정신의 동등성과 동근원성

 

일반적으로 유물론은 물질과 정신의 대립 및 위계를 유물론 성립의 일반 조건으로 삼고 있으며, 이점에서 신유물론도 예외가 아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물질과 정신의 대립 및 위계 관계를 거부하며, 오히려 물질과 정신의 동근원성동등성을 주장한다.

 

이것이 스피노자 형이상학의 핵심 중 하나인 속성 이론의 의미다. 스피노자에게 속성(attributum)실체의 본질을 구성”(󰡔윤리학󰡕 1부 정의 4)하는 것 내지 실체의 본질을 표현”(󰡔윤리학󰡕 1부 정리 10의 주석 외 여러 곳)하는 것이며,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인 신 또는 자연은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을 비롯한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다(󰡔윤리학󰡕 1부 정의 6). 현대적인 어법으로 표현한다면 각각 물질적인 우주와 심리적 우주를 표현하는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은, 신의 본질을 구성하거나 표현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위상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더욱이 실재적으로 구별되는하나 없이 다른 것이 인식될 수 있는”(1부 정리 10의 주석) 이 속성들은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으며(1부 정리 10),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 한정될 수 없다(1부 정의 2). 따라서 속성들은 서로 독립적이며, 속성들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상호 간섭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관계는 속성 내부의 양태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스피노자 당대에 충격적이었던 점은 사유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연장이 신의 속성 중 하나라는 점, 따라서 물질적인 것이 신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이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연장하는 실체는 신의 무한한 속성들 중 하나라고 결론을 내렸다.”(1부 정리 15의 주석) 왜냐하면 연장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은 결국 신이 물질적 본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무신론자라는 비판에 시달리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스피노자는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부정했음에도).

더욱이 연장이 신의 속성 중 하나라는 것은 자연학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결과를 산출했다. 물리적 자연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데카르트적 기획의 조건은 물질적인 것들에게서 모든 인과적 힘을 박탈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물리적인 것들이 지니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일관성 있게 표현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데카르트는 물리적인 것들의 운동을 장소 이동 운동으로 한정하고, 물리적인 것들이 지닌 원인으로서의 힘을 모두 신에게 귀속시켰다. 오직 신만이 자연적인 것들을 움직일 수 있으며, 더욱이 그것들이 속해 있는 자연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에서 진정한 원인으로서의 신과 신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 사이에는 초월적인 간격이 존재하게 된다. 신은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을 계속 움직이는 원인이며, 자연 그 자체는 아무런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취른하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데카르트 연장 개념의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데카르트가 인식한 연장, 곧 불활성적인/정지하고 있는 덩어리(molem quiescentem)로부터 물체들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은, 선생께서 말했듯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정지 중에 있는 물질은 정지하고 있는 한에서 계속 정지하게 될 것이며, 좀더 강한 외부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면 운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가 이전에, 자연적 실재들에 관한 데카르트의 원리는 전혀 부조리한 건 아닐지 몰라도 아무 쓸모도 없다고 주저 없이 주장했던 것입니다.”[Benedictus de Spinoza,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Vol. IV, Carl Winter Verlag, 1925, p. 332.]

반면 스피노자는 물리적 우주를 표현하는 연장을 신의 본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데카르트와 달리 연장은 신 바깥에, 그리고 신보다 존재론적으로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물리적 자연은 신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스피노자의 연장, 곧 물리적 우주는 데카르트와 달리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생산하는 역동적인 자연인 것이다.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 󰡔윤리학󰡕 4서문)이라는 정식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베넷을 비롯한 신유물론 이론가들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물질의 행위성을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자원을 발견하는 것은 일리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신유물론자들이 간과하는 점은, 스피노자의 신의 본질을 구성하거나 표현하는 속성은 연장 속성만이 아니라는 점, 스피노자의 신 또는 자연 또는 우주를 구성하는 속성들은 무한하게 많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속성 중에는 연장 속성 이외에 사유 속성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유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에, 사유 속성에 따라 신을 파악하게 되면, 이번에는 신 또는 자연은 정신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사유 속성)은 물리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연장 속성)과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것이며, 두 개의 속성은 영원에서부터 다른 모든 속성들과 함께 신을 구성해왔다는 점에서 동근원적인 것이다. 이러한 동등성 및 동근원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을 비롯한 각각의 속성은 신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실체가 지니는 모든 속성은 항상 실체 안에 함께 존재해 왔으며, 그 중 한 속성이 다른 속성에 의해 생산될 수 없고, 각각의 속성은 실체의 실재성 또는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1부 정리 10의 주석)

따라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역설적 유물론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서양철학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이 물질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신이 물질적 본성을 지닐 수 있는 조건, 곧 연장이 신의 속성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연장과 동시에 사유가 신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 따라서 신은 또한 정신적이라는 점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질과 정신이 동시에, 그리고 사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한하게 많은 다른 속성들이 항상 함께 신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신 또는 자연은 단지 무한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하며(1부 정의 6), 신 또는 자연의 절대적 무한성으로 인해, 우주는 무한하게 역동적이며 풍부한 것이다. 내가 볼 때 신유물론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오직 연장 내지 물질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에만 주목하면서 사유 속성 내지 정신을 배제하거나 연장 속성보다 폄하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무한하게 풍요롭고 역동적인 자연 또는 우주를 상당히 빈약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뇌에 불과하다는 명제는 인간에게서 뇌라고 하는 물리화학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지만, 동시에 인간의 정신적 풍요로움과 역동성을 빈곤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반면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 정신의 역동적인 창발성은 우리가 아직까지 알지 못한 뇌의 수수께끼를 탐구하기 위한 풍요한 기반을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뒤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신체의 역량은 정신의 역량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테제: 관계론적 유물론으로서 양태의 존재론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실체 없는 유물론 또는 실체로서의 물체 없는 유물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전의 철학에서 실체로 간주되었던 존재자들을 양태로 재정의함으로써 모든 존재자들에게서 가상적인 자립성을 박탈하고 그 대신 물체를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이 지닌 원초적인 관계론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이다.

 

스피노자 철학은 대개 실체의 철학이라고 간주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실체는 가장 완전한 것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이며, 만물의 존재 근거로 제시되기 때문이다(1부 정의 6, 정리 11, 15, 16). 하지만 우리가 본 것처럼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신과 같으며, 또한 신은 자연 내지 우주와 같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피노자의 실체는 사실 (원인으로서 파악된) 우주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실체의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과도하거나 과소한 주장일 것이다. 과도한 이유는, 실체 이외의 다른 존재자들은 실체와 같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을 통해 인식”(1부 정의 3)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과소한 이유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은 사실 실체가 아니라 양태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스피노자 철학이 실체의 철학이라는 주장은 우주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오히려 양태의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며, 이 경우에만 스피노자가 실체를 우주 전체와 동일시하는 이유가 더 정확히 해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 존재론의 진정한 혁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까지, 그리고 데카르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실체라고 간주한 개별적 존재자들을 실체가 아니라 양태라고 규정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물들을 양태로 규정하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고방식이다. “양태의 라틴어 원어인 모두스(modus)는 원래 척도라는 뜻 이외에도 방식이나 태도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실재나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그 사물의 모양이나 존재방식, 행위방식 등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 165항에서 양태들을 그것들이 속해 있는,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실체들 없이는 판명하게 인식될 수 없는”[René Descartes, Charles Adam & Paul Tannery, eds., Oeuvre de Descartes, Paris: Vrin, 1964~1974, vol. VIII-1, p. 30. 원석영 옮김, 󰡔철학의 원리󰡕 (아카넷, 2002), 51. 번역은 약간 수정.] 것들로 정의하며, “이성이나 상상이나 기억이나 의지 같은 사유 양태들, 그리고 부분들의 모양이나 위치나 운동 같이 연장에 속하는 다양한 양태들”[같은 책, 같은 곳. 그 외에 53, 56, 61항 등도 참조.]을 사례로 제시한다. 이 경우 양태들은 실재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의미할 뿐 실재들 자체를 가리키지 않으며, 따라서 실재성도 갖지 않는다.

반면 스피노자에게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들이다. 여기 있는 책상이나 의자, 건물, 나무, 그리고 지구 전체도 양태이며, 더 나아가 관념과 정신 역시 하나의 양태다. 양태들은 그것들이 속해 있는 속성에 따라 분류되는데, 연장 속성에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들이 속해 있으며, 사유 속성에는 심리적인 실재들, 곧 관념들이 속해 있다. 우리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속성인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무한하게 많은 양태들을 지니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처럼 사물을 양태로 규정함으로써, 각각의 사물은 그것들이 실체로 규정되었을 때 지니고 있었던 가상적 자립성을 박탈당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1부 정의 3)이라고 정의되는 실체와 대비하여 󰡔윤리학󰡕 1부 정의 5에서는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대조를 이루는 두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실체가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양태는 기본적으로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는 오직 신 또는 우주 전체만이 실체이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헤겔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용납하기 어려웠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스피노자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하면, 인간은 주체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인간에게는 윤리적 실천의 여지도 자유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아직 주체가 되지 못한 실체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철학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 철학에 미달하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스피노자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없이는 성립할 수도 없고 존속할 수도 없는 존재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양태의 존재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을 오직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고 존속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관계론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관계에 선행하여 미리 각각의 사물들이 실체로서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사물들이 생성되고 존립하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자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1부 정의 1, 정리 11), 곧 우주 전체뿐이다.

스피노자 존재론의 관계론적 특성은,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singular thing)라는 개념을 통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의 7에서 독특한 실재를 이렇게 정의한다. “나는 독특한 실재를,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것은 구절인데, 이는 독특한 실재라는 것이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다수의 개체들이라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이 개체들이 공동의 결과를 산출하는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할 때다. 곧 그것들은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 우리가 보통 개체라고 부르는 것은 다수의 부분들의 연합이라는 점을 뜻한다. 우리말 개체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인디비둠(individuum)인데, 이것은 원래 나눌 수 없는을 의미하는 인디비두스(individuus)에서 나온 말이다. 곧 우리가 보통 개체라고 번역하는 라틴어 인디비둠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 쪼갤 수 없는 것, 따라서 마치 원자와도 같은 것을 뜻하는 단어다.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원자와 같은 나눌 수 없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학󰡕 2부 정리 13의 주석 이하의 자연학 소론에서 제시된 개체에 대한 정의가 잘 보여주듯이,[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물체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물체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물체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별된다.”] 그에게 개체란 그 자체가 복합체이며, 더욱이 아주 많은 부분들의 연합체다. 예컨대 인간의 신체는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체이지만, 그 신체를 이루는 각각의 신체 기관(, , , , , 간 등) 역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체다. 아울러 인간 신체를 이루는 약 31조개의 세포 하나하나 역시 복합체로서의 개체이며, 박테리아나 심지어 바이러스 역시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체가 된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국가도 복합체로서의 개체이며, 지구 전체(또는 지구 시스템)도 그것을 형성하는 부분들 사이에서 동일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보존”(자연학 소론보조정리 5)하는 한에서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체로 존속한다. 태양계나 은하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둘째, 독특한 실재는 원인이라는 점이다. 독특한 실재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할 때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아주 다양한 부분들이 형성하는 고도의 복합체인데, 이 다양한 부분들이 하나의 인간 신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들 모두가 코나투스(conatus)라고 하는 공동의 원인으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틴어 코나투스는 우리말로 하면 노력을 뜻하는 개념으로, 특히 유한한 존재자, 곧 독특한 실재의 자기 보존의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 7에서 코나투스를 모든 독특한 실재의 본질로 제시한다. “각각의 모든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추구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나의 눈과 코, , 손과 발, 몸통, 그리고 내장 기관 등은 각각 인간 신체의 상이한 부분을 형성하지만, 이것들 모두는 나의 신체를 보존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협력하여 수행하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이 다양한 부분들은 모두 하나의 동일한 인간 신체라는 개체 내지 독특한 실재를 형성한다. 국가와 같은 것 역시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코나투스를 자신의 본질로 하기 때문에 독특한 실재를 이룬다. 또한 광장에 모여서 시위나 집회를 하는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나 하나의 학술대회 역시 독특한 실재를 형성한다.

독특한 실재에 관한 제일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는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나 도나 해러웨이가 제시한 바 있는 홀로바이온트(holobiont)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굴리스는 주지하다시피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serial endosymbiosis theory)을 통해 공생발생 또는 공생진화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자연계의 생물종들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공생적 집합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홀로바이온트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다.[Lynn Margulis, “Symbiogenesis and symbionticism”, in Lynn Margulis & René Festereds eds., Symbiosis as a Source of Evolutionary Innovation, MIT Press, 1991; Lynn Margulis, “Symbiogenesis: The holobiont as a unit of evolution“, International Microbiology, September 2013; 린 마굴리스, 이한음 옮김, 󰡔공생자행성󰡕(1998) (사이언스북스, 2007).] ‘전체내지 온전한을 의미하는 홀로라는 접두어가 붙은 이 개념은 경계를 지닌 개체들 사이의 (외재적) 관계가 아닌, 관계를 통한 개체들의 생성, 관계 맺기를 통한 개체들의 공생을 표현하는 데 훨씬 적절하다. 이 때문에 해러웨이는 단위(unit) 혹은 존재(being)”를 대체하기 위한 일반적 명칭으로 홀로언트(holoent) 개념을 제안하면서, 홀로바이온트는 좀 더 넓은 의미의 공생적 집합체로 규정하고, 마굴리스가 게놈 연합체라는 뜻으로 사용한 홀로바이옴(holobiome)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한 바 있다.[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 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마농지, 2021), 109.]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개념들은 원래의 생물학적 맥락보다 훨씬 더 확장될 수 있다. 일정한 생태 지역 전체가 홀로바이옴을 이루기 때문에, 산호초라는 홀로바이옴은 단지 산호초의 게놈과 미생물들의 게놈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중생물들과 어부, 죽어가는 산호초에 응답하는 예술가들이 모두 포함된다.

그렇다면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인과 인간 종에 대한 생각도 바뀔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경계를 지닌 개인주의”(bounded individualism) 모델에 따라 사유하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환경의 관계로 이해된다. 반면 독특한 실재 개념에 따르면 독특한 실재로서의 인간 개인은 그가 관계를 맺는 다른 실재들과 분리해서 사고할 수 없다. 롭 던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및 기타 세균들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롭 던, 장혜인 옮김, 󰡔미래의 자연사󰡕(까치, 2023).] 따라서 화성 이주와 같은 것은,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다른 미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환경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 환경은 독특한 실재로서 인간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인 베넷을 비롯한 신유물론 이론가들이 횡단성”(transversality)이나 배치”(assemblage)를 새로운 유물론의 핵심 범주로 제시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적인 유물론을 위한 철학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은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유물론 이론가들은, 뒤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관계론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개체성 내지 실재의 독특성이라는 측면, 또는 관계 속에서 개체들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거나 또는 그 반대인 측면을 축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새로운 유물론의 규범적실천적 측면에서 애매성 내지 난점들을 낳을 수밖에 없다.

 

3. 세 번째 테제: 관념들의 물리학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물체들 못지않게 관념들 또한 사물들 내지 실재들로 간주한다. 또한 물체들이 원인으로서의 행위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념들도 원인으로서의 행위성을 지닌다. 따라서 물체들에 관한 자연학 내지 물리학(physics)이 존재하는 것처럼 관념들에 관한 자연학 내지 물리학도 존재한다.

 

신유물론 및 이른바 정동이론’(affect theory)에서는, 물질의 행위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학적 차원에서는 이를 신체의 행위성이나 또는 아펙트의 신체성 내지 물체성으로 확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정신의 행위성이 아니라 신체의 행위성을 주장하는 것이며, 아펙트를 신체적인 것 내지 물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에 대한 신체의 우위, 담론적인 것에 대한 아펙트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유물론적인 것이다.[문규민, 󰡔신유물론 입문󰡕 참조.] 이 점에서 제인 베넷은 전형적인 신유물론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진정한 유물론의 길인지, 그리고 그럴 경우 유물론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규범적 측면에서도 이전의 유물론이나 관념론 철학들에 비해 더 진보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인지, 또한 인류세가 제기하는 쟁점들에 대해 더 효과적인 인식과 대응을 제시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세 번째 테제는 신유물론과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의 차이가 잘 드러나는 지점 중 하나다. 신유물론과 달리 스피노자는 단지 물체들 내지 신체들만 실재로 긍정하고 따라서 물체들/신체들의 행위성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 역시 실재라는 점을 긍정하며, 따라서 관념들에게도 물체들 못지않은(사실은 동등한) 행위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는 물체들이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며 관념들은 사유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라는 점에 존재론적으로 기초를 두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esse formalem idearum)는 사유의 양태다(자명한 것처럼). (1부 정리 25의 따름정리에 의해)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의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며,따라서 (1부 정리 10에 의해) 다른 어떤 신의 속성의 개념도 함축하지 않는다.”(2부 정리 5의 증명) “형상적 존재라는 스콜라철학의 용어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4번째 테제에서 더 부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에 주목해보자. 여기서 관념들이 사유 속성의 양태라는 점에 대한 논거로 제시되는 1부 정리 25의 따름정리는 유한 양태들의 능동성 및 코나투스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명제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1부 정리 34와 더불어) 󰡔윤리학󰡕 1부 마지막 정리인 정리 36(“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의 논거를 이루면서, 또한 3부 정리 6에서 코나투스 개념이 도입될 때 존재론적인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1부 정리 25의 따름정리는 특수한 실재들(res particulares)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 곧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속성, 곧 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구절이다. 들뢰즈가 잘 보여주었듯이,[질 들뢰즈, 권순모현영종 옮김,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그린비, 2019).] 스피노자 철학, 특히 󰡔윤리학󰡕에서 표현”(expression)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경우에서 표현이라는 말은 사실 신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1부 정리 34)이기 때문에, 원인으로서 신의 역량을 표현한다는 것, 다시 말해 신이 지니고 있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나눠 갖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특수한 실재들, 또는 (스피노자가 좀 더 자주, 그리고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대로 하면) 모든 독특한 실재들은 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곧 무한하지 않고 유한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원인으로서의 역량 내지 행위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2부 정리 5의 증명은 이것이 물체들 같은 연장 속성의 양태들만이 아니라 사유 속성의 양태들인 관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관념들은, 한낱 표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또는 스피노자가 적절하게 표현하듯이 도판 위의 침묵하는 그림”(2부 정리 49의 주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다른 관념들을 산출하고, 따라서 다른 관념들과 인과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독자적인 실재다.[Lenn E. Goodman, “An Idea Is Not Something Mute like a Picture on a Pad”, Review of Metaphysics 62 (2009).]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정신을 관념으로 규정한다. “인간 정신의 현행적 존재(actuale mentis humanae esse, actual being of the human mind)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과 다른 것이 아니다.”(2부 정리 11) 사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 철학에 관해 가장 분개한 점 중 하나가 이것인데, 그는 1702년에 쓴 보편 정신 학설에 관한 고찰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G. W. Leibniz, “Considérations sur la doctrine d’un esprit universel”, in C. I. Gerhardt ed., Die philosophischen Schriften, vo. 6, Weidmann, 1885, p. 395.]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우리의 일반적인 견해와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는 사실 대개 정신은 관념들이 담겨 있는 기체(基體, substratum) 내지 용기(容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관념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는 관념은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스피노자처럼 인과적 행위성을 지닌 실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관념을 물체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실재라고 규정하면서 정신을 관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주 일관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신은 다른 독특한 실재들과 마찬가지로 복합적인 관념,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관념들의 연쇄다. 󰡔지성교정론󰡕에서는 사용되었지만 󰡔윤리학󰡕에는 등장하지 않는 정신적 자동장치”(automa spirituale)라는 개념은 스피노자가 정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김은주 옮김, 󰡔지성교정론󰡕 (도서출판 길, 2020), 85.]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인식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관념들의 연쇄가 전개된다는 뜻이다. 물론 인식에는 외부 물체가 인간의 신체를 변용함과 동시에 정신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아주 단순한 감각적 지각에서부터(2부 정리 16~정리 18) 비교와 차이, 동일성을 식별해내는 복합적 지각 작용(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 그리고 추론과 직관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수준의 인지 활동이 존재한다. 스피노자가 상상, 이성, 직관적 인식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인식의 세 가지 유형을 구별할 때(2부 정리 40의 주석 2) 염두에 둔 것이 이러한 상이한 수준의 지적 활동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인식 활동을 염두에 두면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하지만, 원핵세포와 같은 가장 단순한 생명체에게도 지각 작용은 존재한다. 그것이 주변의 환경 및 다른 원핵세포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생명 활동을 수행할 때, 그리고 린 마굴리스가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serial endosymbiosis theory)을 통해 보여주듯이 그것이 원핵세포에 머물지 않고 다른 원핵세포들과 결합하여 진핵세포를 형성하면서 공생발생 또는 공생진화를 이룩할 때,[린 마굴리스, 󰡔공생자행성󰡕, 앞의 책.] 여기에는 모종의 인지 작용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제인 베넷이 인용한 바와 같이 스피노자가 󰡔윤리학󰡕 2부 정리 13의 주석에서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준 것은 완전히 일반적인 것이어서 다른 개체들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할 때 animata라는 아주 번역하기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려고 한 바와 같이, 아마도 비유기적 물체들 역시 모종의 인지 작용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의 자연학 없는 물체의 자연학으로 충분한 것일까?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사유 속성 없이 연장 속성만 지닌 실체를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그럴 경우 실체의 역량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체의 자연학만으로는 양태들의 존재론적 행위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규범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 않다. 4번째 테제와 5번째 테제에서 차례로 보여주겠지만, 사유의 자연학이 없이는 능동적인 역량 또는 능동적 행위성을 설명할 수 없는데, 이는 역량의 증대 및 역량의 능동화는 아펙트의 신체적 차원만이 아니라 관념적 차원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체적 또는 물체적 차원에서만 파악된 아펙트는 강렬한 행위성을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능동적 행위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류세의 문제가 제기하는 실천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데 적절하게 기여할 수 없다. 사실 대개의 신유물론 이론가들은 행위성(agency)과 능동성(activity), 심지어 행위성과 자율성(autonomy)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스피노자에 준거하면서도 능동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유의 자연학을 간과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다.


4. 네 번째 테제: 정신과 신체의 비례적 관계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정신과 신체 사이에 대립이나 위계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관념론 전통에서 말하듯 정신 내지 영혼이 신체에 비해 우월하거나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유물론 전통에서 주장하듯이 신체(또는 뇌)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 유물론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각각 상이한 속성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서로 상이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동일한 독특한 실재 또는 그 코나투스의 두 측면이며, 양자 사이에는 비례관계가 존재한다. 곧 정신이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일수록 신체도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런 측면에서도 스피노자의 유물론은 역설적인 성격을 드러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속성 이론에서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의 동근원성과 동등성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체와 정신 역시 동일한 독특한 실재, 특히 인간의 본질적인 두 측면을 구성하며, 양자 사이에는 위계나 대립 관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이며, 그것은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된다”(2부 정리 21의 주석)고 말하는데, 이는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2부 정리 7의 주석)는 명제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것은 이른바 평행론”(parallelism)과 관련되어 있다. 라이프니츠에서 유래했지만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하여 더 많이 사용되는 이 용어는, 하지만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하다시피 사실 이 용어로 지칭되는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적인 한 측면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여러 모로 부적절한 용어다.[특히 Chantal Jaquet, L'unité du corps et de l'esprit: Affects, actions et passions chez Spinoza, Paris: PUF, 2004 참조. 국내의 좋은 연구로는, 이혁주, 󰡔스피노자의 평행론󰡕 (연세대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5) 참조.] “평행론이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그것은, 들뢰즈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3가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6장 참조. 또한 질 들뢰즈,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1999), 102쪽 이하 참조. 물론 이것을 평행론이라는 용어를 유지하면서 “3중의 평행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우선 그것은 사유 속성에 속하는 관념들과 연장 속성에 속하는 물체들 사이의 상응 관계를 나타낸다. 아마도 평행성이라는 말이 그나마 어울리는 것은 이런 차원이다. 이러한 상응이 가능한 것은 연장 속성 안의 물체들 사이의 인과관계와 사유 속성 안의 관념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동일한 하나의 인과관계의 동등한 두 가지 표현이기 때문이며(“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2부 정리 7의 주석)), 다시 이러한 인과연관의 동일성은, 각각의 속성들이 동일한 하나의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점에 존재론적으로 의거하고 있다(존재의 동일성).

그리고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정신과 신체가 동일한 실재의 두 가지 상이한 표현이라는 인간학적 귀결을 도출해낸다. 실체가 때로는 사유 속성으로 표현되고 때로는 연장 속성으로 표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개인을 비롯한 동일한 양태적 실재 역시 때로는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체로 표현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리 7의 주석에서 원과 원의 관념의 사례를 들고 있다. “예컨대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연장 속성의 양태로서의 원은, 스피노자가 󰡔지성교정론󰡕 96절에서 설명하듯이, 중심과 원주를 가지고 있고 고정된 한 점을 축으로 선분을 회전시킴으로써 산출되는 물리적 실재인 데 반해, 원의 관념은 연장의 양태로서 원이 지니고 있는 형상적 본질”(essentia formalis) 내지 형상적 존재를 관념 안에서 대상으로서 재-현하는 것이다. 곧 원의 관념은 관념 안에서 대상으로 표상되거나 재-현된 원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연장의 한 양태로서의 원의 표상적 본질내지 표상적 존재”(esse objectiva)로서 원의 관념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이 뜻하는 바다. 원과 원의 관념의 관계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관계는 관념과 그 대상의 관계로서, 정신이 신체라는 물리적 양태의 관념이라면, 역으로 신체는 정신이라는 관념의 대상이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2부 정리 13)라고 말하며, 또한 신체의 관념과 신체, (2부 정리 13에 의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2부 정리 21의 주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결합을 스피노자는 합일”(unio)이라고 부른다.[스피노자가 사용하는 unio는 데카르트가 사용한 것과 단어는 동일하지만 의미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상이한 실체들로서의 정신과 신체의 unio 또는 󰡔정념론󰡕의 프랑스어로 하면 union을 말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는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union연합을 의미한다면, 스피노자의 unio합일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좋은 논의는 Chantal Jaquet, “Pourquoi parler d’union corps/esprit chez Spinoza?”, Különbség 21.1 (2021) 참조.]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3부 정리 2의 주석)는 명제도 도출해낸다. 정신과 신체는 서로 상이한 속성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규정할 수 없지만(1부 정의 2, 3부 정리 2), 방금 살펴본 것처럼 양자는 개인이라는 동일한 실재의 관념과 대상으로서 합일을 이루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합일은 정서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실재의 코나투스로 표현되기 때문에, 정신과 신체는 한 개체의 코나투스의 두 측면이며, 동일한 인과연관을 동등하게 표현한다. 이 때문에 정신이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일수록 신체도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69일 코기토 100호 기념 학술대회에서 토론을 맡은 정대훈 교수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평행론논평자에게는 기회원인론이나 예정조화를 넘어서는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논평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평행론이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이나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가 뚜렷한 차이를 지닌다는 점은 이미 스피노자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근대철학 연구 일반에서는 잘 확립되어 있는 주제다. 기회원인론과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말브랑슈의 경우 신의 초월성이 여전히 유지가 될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 같은 유한한 존재자들에게 아무런 인과적 작용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말브랑슈를 비판하면서 그의 기회원인론은 신과 유한한 세계의 관계를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관계로 만든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대안이 예정조화론인데, 이 이론은 기회원인론보다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더 가깝지만(사실 평행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라이프니츠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불평등한 것으로 남아 있으며, 그 때문에 신과 세계의 관계에도 여전히 초월적 간극이 존재한다. 세 사람의 심신이론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Pascal Gillot, L’esprit, figures classiques et contemporaines (Paris: CNRS Éditions, 2007)1부 논의가 유익하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 모두 일정한 방식으로 스피노자주의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인데, 말브랑슈의 경우에는 특히 신과 (물질적) 세계 사이의 내재성이라는 함의를 지닐 수 있는 가지적 연장”(extension intelligible) 개념 때문에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으며, 라이프니츠의 경우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스피노자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어떤 의미에서 라이프니츠 철학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받은 영향을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말브랑슈의 스피노자주의에 관해서는 Jean-Christophe Bardout, Malebranche et la métaphysique (Paris: PUF, 1999) p. 227 이하를 참조하고,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주의에 관해서는 특히 Mogens Laerke, “Leibniz’s Encounter with Spinoza’s Monism, October 1675 to February 1678”, in Michael Della Rocca ed., The Oxford Handbook of Spinoz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8)을 참조.]

능동과 수동에서 정신과 신체 사이에 성립하는 비례성은 신체를 지휘하고 통제하는 정신이라는 사고방식, 플라톤의 󰡔파이돈󰡕에서부터 데카르트까지, 그리고 그 이후 오늘날 포스트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서양 철학의 유구한 관념론적 사고방식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런 점에서 탁월한 유물론적 효과를 산출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에서 이러한 관념론적 사고의 요체를 오직 정신의 끄덕임(nutu, 명령)에 의해 신체가 때로는 운동하고 때로는 정지하며, 정신의 의지 및 사유의 기술에만 의존하는 아주 많은 것을 하게 된다는 믿음,[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워렌 몬탁의 훌륭한 설명을 참조할 수 있다. Warren Montag, “Commanding the Body: The Language of Subjection in Ethics III, P2S”, in A. Kiarina Kordela and Dimitris Vardoulakis eds., Spinoza’s Authority, vol. 1 (New York: Bloomsbury, 2017).] 또는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양자 모두는 정신의 권능(mentis potestate)에 달려 있다는 믿음으로 요약한다. 정신과 신체 사이의 이러한 위계적 불평등은 대개 정신과 신체 간에는 능동과 수동에서 반비례 관계가 성립하다는 믿음과 연결되며(“영혼 안에서 수동인 것은 보통 신체에서는 능동”[René Descartes, ed. & trans., Ferdinand Alquié, Oeuvres philosophiques de Descartes vol.3 (Paris: Garnier, 1973), p. 953; 김선영 옮김, 󰡔정념론󰡕 (문예출판사, 2013), 19. 번역은 수정.]), 또한 정서 내지 욕망과 이성 내지 지성 사이에도 대립 관계 내지 반비례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반면 스피노자는,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정신과 신체를 실체로 이해하지 않고 양태로 파악하며,[어떻게 서로 상이한 본성을 지닌 정신과 신체가 서로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또는 어떻게 양자가 능동과 수동에서 비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정신과 신체를 모종의 실체로 이해하는 발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일단 정신과 신체를 자립적인 실체로 간주한 다음, 어떻게 이 양자가 서로 결합될 수 있는지, 어떻게 비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질문을 하기 때문에, 이 질문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뇌를 정신의 본질 내지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는 관점, 겉보기에는 유물론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관념론적인 관점으로 귀착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Pascale Gillot, “Les neurosciences cognitives: un ‘materialisme cartesien’?”, Cités 65 (2016) 참조. 따라서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스로 믿는 것처럼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라 사실은 데카르트적인 유물론자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 임지원 옮김, 󰡔스피노자의 뇌󰡕 (사이언스북스, 2007). 이 문제는 조만간 더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양태로서의 정신과 신체를 동근원적이고 동등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반비례 관계나 대립 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며, 정서와 이성 내지 지성 역시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부적합한 인식인 상상과 관련되는 정서로서 수동 정서와 적합한 인식인 이성 내지 직관적 지식과 관련된 정서로서 능동 정서 사이의 차이 및 대립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성을 통해 정서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 정서에서 능동 정서로 이행하는 것이 스피노자 윤리의 요체를 이룬다.

여기에서 능동성과 수동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외부 대상에 대해 더 많은 활동을 가하는 것과 외부 대상에게서 더 많은 작용을 겪는 것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적어도 큰 행위성을 지닌 것과 더 작은 행위성을 지닌 것의 차이를 뜻하는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일반적인 능동과 수동 개념과는 매우 다른, 상당히 독창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5. 다섯 번째 테제: 원인의 두 형태로서 능동과 수동

 

스피노자의 능동과 수동 개념은, 통상적인 관점과 달리 행위를 가하는 것과 행위를 겪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개념은 오히려 원인의 두 형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능동과 수동을 원인 개념으로 정의함으로써, 스피노자는 한편으로 변용하기-변용되기와 능동-수동의 차이를 분명히 표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능동화의 과정을 윤리적 활동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능동성은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핵심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자율성은 모종의 타율적 자율성(hetero-autonomy)으로만 성립 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의 5번째 테제는 능동과 수동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대개 능동을 어떤 대상에 대해 작용을 가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반대로 수동은 타자에게서 작용을 겪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는 능동은 우리가 어떤 활동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수동은 우리가 어떤 원인을 통해 이루어진 활동을 결과로서 겪는 것으로 파악한다. 능동과 수동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오래된 생각이며, 데카르트 역시 󰡔정념론󰡕에서 능동과 수동을 이렇게 이해한다.

 

“1. 한 기체(sujet)에 대해 수동인 것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항상 능동이라는 점.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보겠다. 곧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이루어지는 또는 새롭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일어나는 기체는 수동(passion)으로, 그것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능동(action)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능동체와 수동체가 종종 아주 상이하긴 하지만 능동과 수동은 항상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이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관계시킬 수 있는 두 가지 상이한 기체에 따라 두 가지 이름을 갖게 된다.”[René Descartes, Oeuvres philosophiques de Descartes vol.3, p. 952; 󰡔정념론󰡕, 17. 번역은 수정.]

 

반면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의 2에서 능동과 수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앞의 정의 1에 따라)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능동적이다(nos agere)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생겨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수동적이다(nos pati)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능동과 수동을 원인과 결과로 구분하지 않고, 원인의 두 가지 종류 내지 두 가지 양상으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우리는 능동적이며, 반대로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causa partialis)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우리는 수동적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의는 수동을 하나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차이를 보여준다. 수동을 결과로 간주하는 데카르트의 관점에서는 수동은 어떤 운동을 받아들이는 것 또는 어떤 운동을 겪는 것이 되지만,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이는 수동이 아니라 변용되기(affici, being affected)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능동 역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능동이 아니라 변용하기(afficere, affecting)일 뿐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에게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구별은 수동과 능동의 구별과 일치하는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두 가지의 구별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곧 우리가 어떤 타자에 대하여 작용을 가한다고 해서, 그를 일정하게 변용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능동적인 것은 아니며, 그러한 변용하기가 반드시 규범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역으로 우리가 타자에게 일정한 변용을 겪는다고 해서 그것이 규범적으로 나쁜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왕성하고 아주 강렬하게 활동을 하고 타자들을 변용시키면서도 수동적일 수가 있으며, 반대로 우리가 타자의 활동에 의해 많이 변용되고 영향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능동적일 수 있다.

이러한 범주 구별은 윤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결과를 산출하는데, 이를 이해하려면 바로 뒤에 나오는 3부 정의 3의 아펙투스에 대한 정의를 살펴봐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서(affectus),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affectiones, affections)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인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 변용들 중 어떤 것의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고, 그렇지 않으면 수동으로 이해한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정서 또는 아펙투스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인데, 제인 베넷을 비롯한 대개의 신유물론자들은 아펙투스를 신체적인 것, 더 나아가 물체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유물론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이라는 요소를 빼버려도 무방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것을 빼게 되면 어떤 아펙투스가 능동적인 것이고 수동적인 것인지, 더 나아가 어떻게 수동적인 아펙투스에서 능동적인 아펙투스로 이행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들뢰즈 자신이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에서 잘 설명한 바 있듯이, 2종과 3종의 인식이라는 적합한 인식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을 조직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수동에서 능동으로 이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스피노자가 기술하는 조작 전체는 네 가지 계기를 보여준다. (1)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 수동적 기쁨. 이로부터는 아직은 부적합한 관념에 따라 욕망들 또는 정념들/수동들이 따라 나온다. (2) 이러한 기쁜 정념들에 유리한 어떤 공통 통념(적합한 관념)의 형성 (3) 이러한 공통 통념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우리의 행위 역량에 의해 설명되는 능동적 기쁨 (4) 이러한 능동적 기쁨은 수동적 기쁨에 덧붙여지지만, 수동적 기쁨에서 생겨나는 정념들/수동들로서의 욕망들을, 이성에 속하며 진정한 능동들인 욕망들로 대체한다.”[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Éditions du Minuit, 1969, p. 264;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323.]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것은 2종의 인식인 공통 통념(notiones communes, common notions)이다. 예컨대 채집과 수렵 생활을 하던 원시인이 산 속에서 우연히 맛보게 된 맛있는 산딸기는 그에게 기쁨의 정서를 경험하게 할 것이며, 그의 존재 역량을 증대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 뒤 다른 곳에서 마주친 비슷한 모양의 산딸기, 하지만 이번에는 독을 품고 있는 산딸기는 그에게 꽤 큰 슬픔의 정서를 안겨주고 따라서 그의 존재 역량을 감소시킬 것이다(3부 정리 11의 주석). 이 원시인은 전자처럼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후자처럼 슬픔을 주는 대상은 미워하게 될 것이다(3부 정리 13의 주석). 이런 경험들을 통해 원시인은 어떤 산딸기가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맛좋고 영양가 있는 것이고 어떤 산딸기가 독이 들어 있는 해로운 산딸기인지 식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원시인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식별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자신의 적합한 지식의 범위를 늘려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원시인이 더 많은 기쁨을 경험하고 반대로 슬픔은 덜 경험하도록 해줄 것이다. 이는 원시인이 더 이상 외부 대상에 의해 우발적으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을 식별하고 더 나아가 그 대상들을 배치하거나 조직할 수 있는 역량을 획득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량이 곧 원인으로서의 역량이며, 이것이 원시인을 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적인 상태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정서 내지 아펙투스라는 것이 단지 신체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 특히 우리가 실천적인 대응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제인 베넷이 스피노자의 아펙투스 개념을 신유물론적으로 전유하면서 우연성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1부 정리 29와 정리 33 및 그 주석들에서 자연 안에는 우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필연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주장할 때 염두에 둔 것은, 양태들 사이의 질서와 연관이 일정한 규칙성 내지 법칙성을 갖고 있다는 점, 따라서 그것은 원칙적으로 인식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자연 안에는 불가해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베넷처럼 양태의 존재론의 기본 양상을 우연이라고만 규정한다면, 여기에는 합리적 인식의 가능성이 매우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 현상들만이 아니라 공중의 형성 및 소멸과 재형성 같은 사회 현상들도 그저 예측 불가능한 우연적인 마주침과 교호 작용의 결과들로 간주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인지적 경험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더욱이 이것은 규범적인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낳는다. 베넷은 2장에서 2003년의 대규모 정전 사태를 우발적인 배치들의 행위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베넷은 배치의 행위성과 정치적 책임을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양한 인간들과 비인간들이 함께 작용하는 배치의 행위성에 주목할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5천만 명에게 영향을 미친 대규모 정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어떤 특정한 개체들이나 집단 또는 특정한 배치에 귀속시킬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력 관리를 민영화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한 의회 및 행정부와 이러한 개혁의 수혜를 받고 최대한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 전력 관리의 안전성을 소홀히 한 전력 회사들은 배치의 행위성의 여러 행위소(actant)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들에게 이 결과의 책임 대부분을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 베넷의 주장이다. 더 나아가 그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체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행위적 능력들의 망을 정교하게 식별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책임 공방을 일삼을 뿐인 도덕주의 정치”[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111.]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단일한 인간 행위자들에 관한 가정에 입각하여 사건을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베넷의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이것을 근거로 정치적 책임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단순한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제안한 바 있는 구조적 부정의와 그것에 대한 정치적 책임(“집단적 책임”)을 묻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아이리스 매리언 영, 허라금 외 옮김,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이화여대 출판문화원, 2017).] 흥미롭게도 매리언 영은 개별 행위자의 잘못된 행위나 국가의 억압적 정책과 구별되는 도덕적 잘못”[아이리스 매리언 영,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115.]으로 구조적 부정의를 정의하면서, 이러한 부정의는 보통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범위, 곧 허용된 규칙과 규범의 범위 안에서 수많은 개인들과 집단 및 제도가 각자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추구하면서 비의도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 발생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베넷이 우발적인 배치의 행위성을 말하면서 분산된 책임을 말하는 반면, 영은 우발적인 상호작용들의 결과로 산출되는 구조적 부정의 및 집단적 책임에 관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베넷의 신유물론이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를 신체적인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결국 우연성이라는 범주를 양태적 세계의 기본적인 존재론적 양상으로 간주하는 것의 귀결이다.

마지막으로 인류세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논점을 더 제기해보자.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기후변화의 정치학의 자본주의 정치학 그 이상이다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학자들이 행성의 관리인으로서 인간들에 대해 쓸 때 제기되는 진정으로 어려운 문제는, 개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박테리아 및 바이러스 중 다수가 인간의 삶의 형식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을 때(많은 것은 우호적이기도 하지만), 그것들과 맺는 관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 행성에서 인간 종의 자연사는 박테리아 및 바이러스의 역사 및 활동을 함축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Dipesh Chakrabarty, “The Politics of Climate Change Is More Than the Politics of Capitalism”, Theory, Culture & Society, 34. 2-3 (2017), p. 32; 기후변화의 정치학은 자본주의 정치학 그 이상이다, 󰡔문화과학󰡕 97 (2019), 155. 번역은 수정.] 차크라바르티의 질문은 인류세에 대한 실천적 대응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논점을 제기하는데, 이는 스피노자 능동성 개념의 또 다른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능동성으로서의 강인함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해하는 한에서의 정신과 관련을 맺고 있는 정서들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능동(능동적인 작용, actiones)을 나는 강인함(Fortitudo)과 관련시키며, 강인함은 굳건함(一以貫之, Animositas)과 관대함(Generositas)으로 나누겠다. 왜냐하면 나는 굳건함, 각자가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대함, 각자가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우정으로 연결되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오직 행위하는 이의 유익(utile)을 목표로 하는 능동적인 작용을 나는 굳건함과 관련시키며, 다른 이의 유익함도 목표로 하는 능동적인 작용은 관대함과 관련시킨다. 따라서 절제, 절도 및 위험에 직면하여 마음을 다잡는 것(animi praesentia) 등은 굳건함의 일종이며, 겸손함(Modestia)이나 너그러움(Clementia) 등은 관대함의 일종이다.”(󰡔윤리학󰡕 3부 정리 59의 주석)

 

이 정의에 따르면 강인함은 굳건함과 관대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자가 이성의 인도에 따르는 욕망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타자들과 이성의 인도에 따라 우정을 맺으려는 욕망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아마도 인간 행위자를 염두에 두고 강인함을 정의했겠지만, 이러한 정의를 인간 종 바깥으로 확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첫째, 타자와의 우정을 맺으려는 욕망이 능동성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점이며, 둘째, 하지만 타자들은 나 또는 우리에게 항상 우호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 심지어 그 타자는 우리의 존립을 위협하는 힘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해러웨이는 인간 대 비인간, 생명 대 무생명,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대립을 탈구축하면서 -산적”(sym-poietic) 지구를 상상하기 위해 인류세 대신 쑬루세(Chthulucene)라는 명칭을 제안한 바 있다.[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 앞의 책.] 이것은 스피노자의 강인함 개념이 함축하는 타자와의 우정 어린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을 인류세 시대에 적합하게 확장하고 번역하려는 돋보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정을 맺고 공생하기를 실천하려는 타자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심지어 우리에게 적대적인 타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나 에볼라 바이러스 등과 우정 어린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또한 쓰나미나 지진, 화산폭발이나 산불 등과 공생할 수 있을까? 이것들은, 신유물론의 행위성범주를 빌려서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따라서 강력한 행위성을 지닌 물질적 존재자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행위자들이 능동적인 행위자들일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금 거론한 것들을 될 수 있는 한 피하거나 방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인간들의 코나투스에 기반을 둔 것일 터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강인함의 첫 번째 측면, 곧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의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초석을 제시해준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이와 관련하여 스피노자 윤리학을 표현하기 위해 이기적-이타주의”[알렉상드르 마트롱, 김문수김은주 옮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린비, 2008), 266.]라는 역설적인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사실 스피노자 윤리학이 코나투스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그것은 모종의 이기주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적합한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냐 아니면 상상적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냐에 따라 능동적 이기주의냐 수동적 이기주의냐로 구별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일수록 자기 보존이 적합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전자의 경우일수록 이기주의는 그것의 대립항인 이타주의와 결합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독특한 실재들이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고 실존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보존의 이기주의는 타자의 보존을 포함할 수밖에 없고, 자기의 보존을 적합하게 또는 능동적으로 추구할수록 타자와의 관계 역시 더욱 우정 어린 환대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타자들에 대하여 우정 어린 환대를 베푸는 것이 쉽지 않지만, 타자가 비인간, 특히 지질학적 타자를 포함한 비유기적 물체들까지 확장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환대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적합한 환대이고 부적합한 환대인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 우리의 환대를 확장해야 하는 것은 인류세 시대의 시대적 요청이지만 우리는 아직 그 환대의 역량을 가질 만큼 능동적이지 못한데, 그것은 우리가 환대해야 하는 대상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인류세 시대에 어떤 범주들로, 어떤 개념들로 우리 자신을 사유해야 할지 이제 막 배움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이다.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이러한 배움에서 중요한 동반자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IV. 결론을 대신하여

 

결국 스피노자 철학을 유물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역설적인 특성의 유물론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 글에서 말해보고자 했던 핵심이며, 그러한 역설적 유물론이 인류세 문제를 사고하는 데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이 글의 또 다른 핵심이다. 알튀세르는 유고로 발표된 유물론의 유일한 전통에서 자신이 이해하고 활용했던 스피노자주의를 해명하면서 스피노자의 철학적인 전략을 게릴라 전략이라고 말한 바 있다.[루이 알튀세르, 권은미 옮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매진, 2008).] 그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가 신에서 시작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곧 스피노자는 스스로 무신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신론을 있는 그대로 주장하기보다는 자기 적수의 최고 요새를 포위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자신이 자기 자신의 적수 자체인 것처럼적들의 요새 중심에 자리를 잡고서 요새의 점령자들 자신을 향해 대포를 돌려놓는일을 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스피노자는 스콜라철학자들과 당대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담론을 거부하지 않고, 또한 그러한 담론들 바깥에서 자신의 무신론 요새를 만들어놓고 외재적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적들의 요새인 형이상학적신학적 담론 내부로 들어가서 그 요새 내부의 무기들이 형이상학자들과 신학자들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더욱 큰 철학적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으며,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입장의 주류 철학 담론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유일신에 대한 기독교 신학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형이상학적신학적 담론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도발적인 해석(‘자기원인개념 및 신 즉 자연개념으로 집약되는)의 진정한 의미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주장을 우리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은 왜 스피노자의 유물론은 역설적인 형태를 띤 것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역설적인 성격으로 인해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인지 이해하는 데 한 가지 실마리를 제시해준다. 스피노자 당대에는 유물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스피노자 역시 자신의 철학을 유물론 철학이라고 이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은 정신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주장하지 않고, 정신이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고 간주하는 대개의 유물론보다 훨씬 더 일관되고 강력한 유물론적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가 서양의 지배적인 관념론 철학 전통이 발휘하는 지배 효과, 곧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누구보다 민감했고, 그것을 그 내부에서 철저하게 분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는 유물론이라는 용어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자기 철학을 일관된 학설(doctrine)로서의 유물론으로 전개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단지 이론적 담론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 지배의 담론이기도 한 당대의 철학신학 담론들에 대한 내재적인 탈구축 작업을 통해 여느 유물론 철학들보다 더 강력한 유물론적 효과를 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세 문제 및 신유물론 담론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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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6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23-07-0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그렇네요. ˝공진성˝이라고 해야 할 것을 ˝공성진˝이라고 했네요. 저런 실수를 ㅠㅠ 공진성 선생님이 섭섭해하시겠네요. ㅠㅠ 벌써 인쇄 끝났을 텐데

겨울산 2023-07-2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감사합니다. 정말 많이, 새로운 이야기 배우고 갑니다. 건강하시길!

balmas 2023-07-25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산님 오랜만이시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사회운동 활동가들 단체인 플랫폼 C 활동가들이 펴낸 [활동가들] 북토크 행사가 7월 3일 월요일 저녁 7시에 서울 


마포구 망원동 현대정치철학연구회 공방에서 열립니다. 


저도 패널 토론자로 북토크 행사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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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행사에 참여를 원하는 분들은 아래 주소에서 신청하시면 됩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1b7_a9dNxhif4daTnyLmkf3LyRaMWYQQkkrPMrNVi1yY/viewform?pli=1&pli=1&edit_requested=true#set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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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 5.18연구소에서 내는 학술지 [민주주의와 인권] 23권 2호에 실리는 논문을 올립니다. 


이 논문에 관해 토론하거나 비평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학술지에 게재된 판본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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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과 불화하기

[이 글은 2022616~17일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주관으로 진행된 “518, 역사와 기억의 불화학술대회의 기조강연으로 처음 발표되었으며, 20229235.18 기념재단의 오월기억포럼에서 다시 발표된 바 있다. 두 차례의 강연에서 유익한 조언과 토론을 통해 수정과 보완의 기회를 마련해준 청중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이 글의 심사위원 두 분의 세심하고 유익한 조언에도 감사드린다. 앞으로 다른 연구에서 조언에 부응하는 주제를 다뤄보고 싶다. 다른 심사위원 한 사람의 비평에 대해서는 각주 7)에서 답변을 제시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국문초록

이 논문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불화’(mésentante, disagreement)라는 개념을 빌려와서 5.18 광주항쟁의 의의와 한계, 과제를 새롭게 고찰해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5.18과 불화하기라는 제목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첫째, ‘5.18의 정신에 입각하여 X와 불화하기를 의미하며, 여기에서 5.18은 무엇보다 불화의 정신, 불화의 힘을 의미한다. 하지만 둘째, 이 제목은 또한 ‘5.18에 맞서 5.18과 불화하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5.18의 핵심인 불화의 정신으로 성역화되고 물신화된 5.18을 문제 삼아야 함을 가리킨다. 결국 이 논문은 5.185.18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5.18이 맞서 싸운 국가폭력의 성격을 해명해야 하는데, 우리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극단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것을 극단적 국가폭력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폭력은 비인간적 야만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며, 폭력의 피해자를 동일한 폭력에 오염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5.18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최후의 항쟁 투사들이 대항적 폭력의 유혹을 이겨내고 극단적 국가폭력에 맞서 반폭력적인 투쟁(에티엔 발리바르) 내지 비폭력적인 저항(주디스 버틀러)을 실행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반면 5.18은 한국 사회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중심에 빨갱이를 배제하는 극단적 폭력이 존재한다는 통찰에 이르지 못했으며, 그것에 대한 저항을 5.18 자신의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삼지 못했다. 이는 5.18의 리프리젠테이션에 관한 불화가 5.18과 불화하기의 장래를 규정함을 의미한다.

 

 

 

주제어

5.18, 국가폭력, 극단적 폭력, 리프리젠테이션, 불화, 에티엔 발리바르, 주디스 버틀러, 자크 랑시에르

 

 

 

I. 머리말

 

내가 이 글에서 말해보고 싶은 것은 ‘5.18과 불화하기라는 주제다. 뒤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주제다.


첫째, 이 제목은 ‘5.18과 함께 불화하기를 가리키며, 이 경우 5.18의 정신, 5.18의 핵심은 불화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5.18은 무엇보다 불화의 정신이다. 군사독재와 타협하지 않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지배와 차별, 배제에 저항하는 불화의 힘이 바로 5.18을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로 만들고 그칠 줄 모르는 민주화의 동력으로 만들고 있다. 따라서 5.18은 불화의 정신, 불화의 힘으로서 타오를 때 5.18로서 살아남을 수 있고 5.185.18로 살아 움직일 때 한국 민주주의도 생생한 현재의 운동으로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5.18과 불화하기의 첫 번째 의미는, 불화의 힘, 불화의 정신으로서 5.18과 함께 하기이다.


둘째, 하지만 또한 ‘5.18과 불화하기불화의 정신으로서의 5.18에 입각하여 5.18 자신과 불화하기,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궁극적인 권위로서, 성역으로서의 5.18에 맞서기이다. 따라서 이 글의 제목이 뜻하는 두 번째 의미는 무엇보다, 1980518일 이후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5.18의 현재는 어떤 것인지, 그것은 여전히 불화의 정신, 불화의 힘으로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혹시 그것은 이미 불화의 불씨가 수그러든 채 일체의 비판과 교정, 변화 및 개조의 요구에 대해 면제되어 있는 모종의 성역이 된 것은 아닌지, 그럼으로써 한국 민주화의 지속적인 동력보다는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가권력의 보호에 의탁하고 있는 박제된 골동품이 된 것은 아닌지, 또는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글의 제목인 ‘5.18과 불화하기5.18과 함께 5.18에 맞서 불화하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늘 그리고 내일 5.185.18로서 남아 있기 위해 또는 영속적인 불화의 힘으로서 작용하기 위해 우리가 5.18에서 배우고 교훈을 이끌어내고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확장해가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해보는 일이다. 요컨대 5.185.18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해보려는 것이 이 글의 궁극적인 목표다.

 

II. 불화에 대하여

 

그럼 먼저 이 글의 모티브를 이루고 있는 불화라는 개념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보겠다. 이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불화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하고 있는 󰡔불화: 정치와 철학󰡕이라는 책에서 유래하는 것이다(Rancière, 2015). 내가 불화로 옮기고 있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메장땅뜨(mésentante)이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듣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메장땅뜨의 어근을 이루는 앙땅뜨(entente)듣기이해하기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 동사형인 앙땅드르(entendre) 역시 듣다이해하다라는 중의적인 뜻을 지닌다. 따라서 앙땅뜨의 반대말인 메장땅뜨는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 단어는 다른 한편으로 논쟁이나 갈등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프랑스어에서 고부간의 갈등이나 고용주나 피고용인 사이의 갈등을 가리킬 때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메장땅뜨, 곧 불화는 한 편이 말하는 것을 다른 한 편이 듣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갈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실제로 랑시에르 자신이 불화의 기본적인 의미를 이렇게 제시한다.

 

대화자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 불화는 희다고 말하는 사람과 검다고 말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희다고 말하는 사람과 희다고 말하는 사람 사이의, 하지만 같은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또는 상대방이 흼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다(Rancière, 2015: 17).

 

예컨대 오늘날 민주주의는 누구나 사용하고 누구나 원용하는, 말 그대로 보편적인 단어 내지 이념이 되었다.[또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만약 누군가가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가치나 이념에서의 불일치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 및 인간적인 삶의 양식 자체에 관한 전혀 상이한 기준을 채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이슬람이나 중국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조선일보󰡕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와 국내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해하는 민주주의, 이주노동자나 성적 소수자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또한 신군부가 이해하는 5.18과 당시의 광주 시민들이 이해하는 5.18, 광주 시민들 가운데서도 무기 반환을 주장했던 이들이 이해하는 5.18과 도청을 사수하려고 했던 이들이, 또한 나중에 유공자가 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이해하는 5.18이 같은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불화라는 용어를 자신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하고 있는 책[내가 집대성이라는 말을 두 차례에 걸쳐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이 책이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 이후 랑시에르는 정치철학 대신 미학 연구에 몰두하는데, 그의 미학 연구의 근간이 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 개념이 󰡔불화󰡕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불화󰡕는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서나 미학을 해명하는 데서 공리(axiom)와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의 제목으로 사용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랑시에르에게 불화라는 개념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가 보기에 어떤 주장에 대한 토론이 토론 대상에 대한 계쟁(係爭, litige; dispute) 및 그 대상을 대상으로 만드는 이들의 자격에 대한 계쟁에 준거하게 되는 것이 바로 불화의 구조(Rancière, 2015: 20)이기 때문이다. 만약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불화 또는 계쟁이 발생한다면, 그리하여 자유가 중요하냐 평등이 중요하냐, 형식적 절차가 중요하냐 아니면 실질적 ()분배가 중요하냐, 다수결이 중요하냐 소수의 권리가 중요하냐 등과 같은 논쟁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논쟁의 상대방들이 민주주의라는 말로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주장에서의 불화는 대상 자체에 대한 불화를 이미 함축하고 있다. 더 나아가 대상에서의 불화는, 민주주의라는 대상을 그 대상으로 제시하는 이들의 자격(qualité)에 대한 계쟁을 함축한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것이야또는 “5.18의 본질은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이들의 주장에는 이미 그 대상에 걸맞은 주체가 누구인지, 어떤 자격을 가진 이들이 민주주의나 5.18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드러나지 않은 암묵적인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전제는 그냥 관념들 내지 믿음들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의 나눔”(partage du sensible)이라고 부르는 사회의 기본적인 짜임(configurations)에 터하고 있다. 곧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Rancière, 2015: 63)을 의미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둘러싼 또는 5.18을 둘러싼 불화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가에 관한 불화(민주주의 또는 5.18이라는 대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누가 그것을 말할 자격이 있고 자격이 없는지에 관한 불화(누가 민주주의의 주체인가, 누가 5.18의 진정한 주역인가, 누가 유공자가 될 만한가, 누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만한가, 곧 누가 애도할 만하고 애도할 만하지 않은가 등) 이전에, 어떤 행위 양식과 존재 양식, 말하기 양식이 올바른 것인지, 어떤 행위가 수행될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존재 양식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떤 말하기가 가능한 것인지를 둘러싼 불화다.


따라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불화는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럴 만한 것이, 행위 양식, 존재 양식, 말하기 양식의 나눔과 같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은 정상적인 사회적 질서의 기본 조건을 이루는 것이며, 우리가 아는 대개의 사회적 갈등은 이러한 조건 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매년 수많은 노동 쟁의가 일어나지만 이 쟁의들 가운데 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부르는 것을 문제 삼는 일은 매우 드물다. 4년에 한 번씩, 또는 5년에 한 번씩 우리 사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들 말하는 주기적인 권력 투쟁이 발생하지만, 이러한 권력 투쟁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둘러싼 불화를 촉발하는 경우 역시 매우 드물다. 그러한 투쟁은 대개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기초를 둔 치안 질서를 전제한 가운데,[잘 알려져 있다시피 랑시에르는 우리가 보통 정치라고 부르는, “집단들의 결집과 동의,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 이러한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Rancière, 2015: 61)치안”(police)이라고 재규정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말하는 치안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평상시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졌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내부에서의 몫을 둘러싼 투쟁의 성격을 지닌다. 이 투쟁이 사소하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랑시에르 자신이 지적하다시피 모든 정치 질서는 기본적으로 치안의 질서에 불과하다는 허무주의적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더 좋은 치안과 덜 좋은 치안이 존재하며, 치안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더 좋은 치안 역시 치안의 본성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Rancière, 2015: 64, 65)한다. 그것은 어쨌든 치안으로 남아 있다.


랑시에르에게 진정한 의미의 정치란, (그에게는 정치는 곧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와 다른 정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란, “부분들 및 부분들의 몫이나 몫의 부재가 정의되는 [치안이라는] 짜임과 단절하는 것(Rancière, 2015: 63). 감각적인 것의 나눔과 불화를 일으키고 그것과 단절할 때 정치가 발생한다. 그런데 만약 치안이라는 것이 단순히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지배에 의거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의 나눔,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 및 치안의 질서와 단절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가 랑시에르의 치안에 대한 정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진정한 의미의 정치 또는 민주주의가 발생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것은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또는 총선에서 압도적인 의석수를 확보한다고 해서 또는 대통령을 탄핵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혁명들조차도 랑시에르적인 정치 내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충족시키는 데는 불충분해 보인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혁명들조차 기존의 행위 양식, 존재 양식, 말하기 양식과 단절하고 그것을 개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불충분함 때문에 역사적인 혁명들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레닌주의로 대표되는 20세기 마르크스주의 혁명 전략을 “2단계 전략”(stratégie en deux temps, two steps strategy)으로 규정한 바 있다(Wallerstein, 2017: 또한 김정한, 2020도 참조). 혁명의 첫 번째 단계는 부르주아 계급에게서 국가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사회 체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착취와 억압을 행사하는 체계를 더 평등하고 더 민주주의적인 체계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의 장악이 필수적인 과제가 된다. 이것은 비단 마르크스주의 또는 레닌주의에 고유한 전략은 아니다. 아마도 민주당 정부(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 역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전략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특히 사회적 약소자들 또는 을들에게) 이러한 전략이 가능하고 또한 바람직할까? 월러스틴 자신은 1968년의 세계 혁명이래 이러한 전략은 더 이상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혁명을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및 제3세계의 민족해방혁명)에서 구현된 2단계 전략은, 첫 번째 단계에서 성공했다 하더라도 두 번째 단계에서는 거듭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은 장악했지만 지배 계급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체계는 이전 체계보다 더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딱히 더 평등하다고, 그리고 더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2단계 전략에 전제되어 있는 생각은, 국가란 중립적인 통치의 도구이며, 정의로운 목적을 지닌 선량하고 유능한 엘리트들(레닌이나 마오, 또는 김대중이나 노무현 등)이 국가권력을 갖게 된다면, 이러한 통치 도구를 정의로운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2단계 전략을 고수하는 한, 늘 약소자들, 을들에게는 대의를 위해 희생할 것이 요구될 것이다. 지금 당장 각각의 영역에서, 각각의 조직에서, 각각의 실천에서 을들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대신, 먼저 갑의 권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단결하고 통일해야 하고, 선차적인 목표와 부차적인 목표를 구별해야 하며, 전자를 위해 후자는 포기되거나 지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는 먼저 적폐 세력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누가 압도적인 여당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소수 정당 대신 특정한 야당이나 여당에게 표를 몰아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소수 정당에게 투표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나타나지 않으며, 약소자들, 을들의 몫을 위한 정치의 시간은 도래하지 않는다. 랑시에르와 월러스틴이 각자의 방식대로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생각이다.


다시 앞의 논의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과 단절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행위 양식, 존재 양식, 말하기 양식과 단절하고 그것을 개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랑시에르는 단절은 이러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짜임에서 아무런 자리도 갖지 못한 어떤 전제, 곧 몫 없는 이들의 몫(part des sans part)이라는 전제를 통해 이루어진다(Rancière, 2015: 63)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말하는 단절로서의 정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러한 단절은 부분들과 몫들, 몫들의 부재가 정의되는 공간을 다시 짜는 일련의 행위들에 의해 명시된다. 정치적 활동은 어떤 신체를 그것에 배정된 장소로부터 이동시키거나 그 장소의 용도를 변경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보일만한 장소를 갖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고,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만들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것이다(Rancière, 2015: 63).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정치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질서, 그 짜임을 재편하거나 개조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전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들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조리 있는 말 내지 담론으로 들리게 만드는 행위, 이것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의 핵심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혁명들보다 훨씬 더 사소할 수 있지만(실제로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정치의 사례들 가운데는 민중 권력의 획득이나 새로운 헌법의 제정과 관련되어 있는 혁명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혁명들이 변화시키지 못한, 정치적 관계 및 사회적 관계의 기본적인 짜임을 문제 삼고 개조하려는 활동이다.

 

III. 5.185.18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1. 불화로서의 5.18

 

이제 내가 왜 이 글의 제목을 ‘5.18과 불화하기라고 붙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조금 더 분명히 드러났으리라 생각한다. 5.18과 불화하기는, 현대 철학에서 널리 쓰이는 또 다른 용어법으로 말한다면, ‘5.18을 탈구축하기’(deconstructing 5.18)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 유명한 이 개념을 이 글의 제목으로 삼을까 하는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는 ‘5.18과 불화하기가 제 논점을 더 잘 전달해주는 것 같다. 더욱이 이 제목은 이미 제목의 뉘앙스 자체에서 5.18 또는 5.18 연구를 탈구축하기라는 의도를 품고 있다.


5.18과 불화하기는,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5.18을 불화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내 생각에 5.18은 불화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성립할 수도 없는 것이다. 5.18불화 그 자체. 우선 5.18은 국가폭력과의 불화일 것이다. 5.18의 배경을 이룬 것이 계엄령의 전국 확대라는 국가폭력이었으며, 5.18을 직접 촉발한 것이 공수부대의 폭력이었고, 5.18을 비극적인 사건으로 종결되게 만든 것 역시 국가폭력이었다. 5.18은 국가폭력과의 불화 없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점점 더 강렬해지는 국가폭력에 대한 대담한 저항이 없었다면, 그리고 도청 사수의 최후의 순간까지 국가폭력의 야만성을 드러내려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결단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5.18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저항과 결단을 통해 5.18은 한국 현대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 속에 극단적 폭력이 내재해 있음을 드러내주었다. 우리는 5.18 덕분에 우리 사회의 저변에는, 우리의 행위 양식과 존재 양식, 말하기 양식을 규정하는 극단적 폭력이 존재해왔으며,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5.18은 공동체와의 불화다. 뒤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5.18은 죽음을 각오한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공동체가 사실은 불화의 대상임을 보여주었다. 국민 공동체와 그것을 상징하는 것, 태극기, 애국가 등은 자명한 어떤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갈등 및 폭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임을 5.18은 드러내주었다. 더욱이 5.18은 이른바 절대공동체항쟁공동체내부에도 또 다른 갈등이나 적대가 내재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좀 더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절대공동체항쟁공동체같은 개념들은 그것에 내재하는 갈등을 (정신분석 용어를 사용한다면) 상상적으로 봉합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5.18은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과의 불화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서 리프리젠테이션이라는 용어를 최대한 넓게 사용하고 있다(이런 의미의 리프리젠테이션에 관해서는 (Fraser, 2007; 진태원, 2019). 그것은 표상이나 재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기억이나 서사를 포함하고, 더 나아가 정치적 의미의 대표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5.18은 우리가 국가폭력을 재현하고 공동체를 표상하고 대표와 주권을 사고하는 방식, 더 나아가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와 삶을 서사화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끼치고 있다. 5.18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국가폭력과 공동체, 역사에 대해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표상하고 기억하고 서사화할 수 없으며, 주권과 대표에 관해, 따라서 정치적 실천에 관해 동일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위할 수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 5.18에 대한 리프리젠테이션 자체가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과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 5.18광주사태광주의거”, “광주학살로 재현되었다가 다시 “5.18 광주민중봉기내지 민중항쟁또는 민주화운동으로 재현되었고, “5.18”이라는 숫자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명칭이 함축하는 5.18 리프리젠테이션의 불화는 아마도, 재현과 기억, 서사의 공식화에도 불구하고, 또는 어쩌면 바로 그것으로 인해,[최정기(최정기, 2020)1997년 대법원 판결에 의한 5.18 기억의 공식화가 2000년대 5.18에 대한 왜곡과 조작을 촉발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바 있다. 그것은 5.18에 대한 공식적인 진상규명보고서가 나온다고 해서, 또는 실증적인 진실 규명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종결될 수 없을 기억전쟁이다. 그러한 기억전쟁은 민주화 운동 내부에서도 역시 종결될 수 없이 전개될 것이다.] 종결되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민주화운동에 맞서, 그리고 민주화운동 내부에서도.

 

2. 국가폭력과의 불화

 

따라서 내가 불화라는 개념을 화두로 삼아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는 5.185.18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인데, 이 주제는 새로운 주제라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주제는 지난 40여 년 동안 5.18 연구 및 5.18에 관심 있는 이들이 거듭해서 묻고 또 물었던 주제, 5.18에 관한 고찰의 근본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이다. 예컨대 5.18연구의 대표작 중 한 권인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최정운은 절대공동체라는 유명한 개념을 제시한다. 5.185.18로 만드는 것, 5.18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며, 아울러 우리 모두에게 각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만드는 사건(최정운, 1999: 26)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절대공동체라는 주장이다. 반면 김정한은 이러한 관점을 비판하면서 5.18대안 국가도 계급도 없는 항쟁이었으며, “공수부대와 맞서는 극한의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은 국민 그 이상의 국민을 지향했으며, 자유민주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내재해 있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적 보편성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저항했다고 주장한다. 5.18이 보여준 것은 대중 봉기의 가능성과 힘”(김정한, 2021: 73~75)이었다.


다른 한편 최정기는 5.18공수부대에 의한 국가폭력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졌다”(최정기, 2021: 217쪽 주 1))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대개의 5.18 연구들이 저항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국민들의 저항을 강조하기에 앞서서 더 절실한 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유 없이 정부의 총에 맞아 죽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을 수 없는 나라에서 어느 누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가? ...... 최소한도의 관점을 취해도 쟁점은 국민이 함부로 살해돼서는 안 된다는 보장에 관한 것이다. 이 보장은 국가가 국민의 국가로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조건이다.”(최정기, 2001: 405) 그에 따르면, 5.18이 지닌 이 측면은 폭력의 세기로서 20세기에 이루어진 수많은 대학살 사건들, 곧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일제의 난징대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보스니아의 민족청소’(ethnic cleaning) 등과의 연관성을 살피기 위해서도 주목해야 하는 지점이다.


나는 최정기의 이러한 견해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5.185.18로 만든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5.18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의 성격을 정확히 밝히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5.18의 시초에 국가폭력이 존재했다는 것, 이러한 폭력이 5.18의 비극을 산출했고 또한 그 경이와 숭고함을 산출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어떤 국가폭력이었는지, 왜 그것이 광주 시민들을 그토록 충격에 빠뜨렸고, 또한 이후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충격을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정운은 5.18 초기 공수부대가 자행했던 국가폭력의 성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서술한 바 있다.

 

5.18 광주는 폭력극장이었다. 죽거나 살거나가 문제가 아니라 처참하고 눈 뜨고 볼 수 없게 패고 찌르고 자르는 등 엽기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진압의 기본 원칙이었고, 이를 위해 이미 4월에 특수 진압봉을 주문했고 처음부터 대검을 사용했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우리 사회의 특이한 국가권력의 폭력 사용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악용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는 발포는 용서하지 않지만 통상적 폭력, 예를 들어 구타 등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면을 악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총을 쏘면 안 된다는 윤리적 기준, 더 정확히는 정치적 정통성의 기준을 군부는 총만 안 쏘면 된다로 뒤집어 실행한 것이었다.


이러한 폭력은 시위 진압이라 할 수 없으며 통상적 폭력도 아니었다. 이는 시각적 언어였고 명쾌한 뜻을 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며, 악귀다그리고 우리에게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폭력, 특히 전설처럼 남아 있는 엽기적 행위는 결코 인간의 공격적 본능이나 분노의 표현이나 환각제의 효과가 아니라 고도로 훈련되고 오랜 연습을 통해 익힌 전문 기술이며 주로 월남전에서 갈고닦은 것이었다. 5.18의 공수부대는 문명이 이성으로 만들어낸 야만이었다(최정운, 2012: 90~91).

 

최정운의 묘사는 5.18을 촉발한 국가폭력이 세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첫째, 그것은 폭력극장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의도적으로 자행된 것이었다. 의도적으로 엽기적인 폭력을 연출함으로써 이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공포를 자극하여 시위를 무력화하려는 것이 그 국가폭력의 목적이었다. 둘째, 그것은 민간인에 대한 군인의 총기 사격이라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 금기가 된 폭력 이하의 수준에서 허용된 최대치의 폭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이것은 합법성의 틀 안에서도 국가폭력은 얼마든지 잔인하게 실행될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셋째, 최정운 선생은 공수부대의 엽기적 폭력, 주로 월남전에서 갈고닦은 이 폭력은 고도로 훈련되고 오랜 연습을 통해 익힌 전문 기술”, “문명이 이성으로 만들어낸 야만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반인간적 폭력, 또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단적 폭력(violence extême)의 형태를 띠고 있다(Balibar, 2010; Balibar, 2012).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며, 악귀다그리고 우리에게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최정운의 표현은, 이러한 국가폭력의 반인간성 내지 야만성을 섬뜩하게 드러내고 있다.


내가 최정운의 인용문을 소개하면서 국가폭력이라는 말에 작은따옴표를 사용한 이유는, 이 개념이 외양에도 불구하고 자명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5.18의 중심에 국가폭력이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5.18 이후, 5.18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루어진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 또는 간첩 조작과 고문, 의문사 등의 행위들에 대해 이제 광범위하게 국가폭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국가폭력이라는, 자명해 보이는 이 개념은, 사실 적지 않은 애매성(ambiguity)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국가폭력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자. 직관적으로 그것은 ‘state violence’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글학술검색을 사용해보면 ‘state violence’라는 표현은 상당히 드물게 사용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말의 국가폭력에 상응하는 말로 영어에서 더 폭넓게 사용되는 것은 ‘state terror’라는 표현이다. 실제로 과거청산이나 이행기 정의 등과 관련된 연구에서는 많은 경우 ‘state terror’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컨대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는 프리실라 헤이너의 󰡔국가폭력과 세계의 진실위원회󰡕의 영어판 제목은 “Unspeakable Truths: Confronting State Terror and Atrocity”이다(Hayner 2002; Hayner 2008).


이와 관련하여 서승은 한 글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테러와 구별되는 국가테러에 대해 이렇게 규정한 적이 있다.

 

[국가테러는] 소수파에 의해 행사되는 테러가 아니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에 의한 테러를 말한다. 통상적으로 권력의 행사는 법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다수의 지지에 의거하지 않고 권력을 장악한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국가권력의 경우는, 소수 집권자의 의지를 강요하거나, 합법성을 위장하기 위하여 열등한 아웃사이더집단을 희생양으로 삼거나 하여 대중에 대한 테러를 가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계엄령, 히틀러의 비상대권, 유신시기의 긴급조치 같이 법으로 위장한 초법적인 수단으로 민중에 대하여 압도적인 공포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적나라한 폭력을 동원하여 민중을 지배 혹은 말살하기도 한다(서승, 2001: 922, 4)).

 

서승은 국가 테러의 특징을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국가 권력에 의해, 소수 집권자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대중에 대한 테러라고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5.18 당시 신군부의 명령에 따라 자행된 광주 시민들에 대한 공수부대의 폭력과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 또는 간첩 조작과 고문, 의문사 등의 행위들을 지칭하기 위해서도 국가테러라는 용어가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국가테러와 국가폭력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가테러가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다수의 지지에 의거하지 않고 권력을 장악한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이라면, 국가폭력은 정치적 정통성을 지닌 국가권력에 의해 (우발적이든 고의든 간에) 행해지는 폭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일반적인 의미의 국가권력이 행사하는 공권력과 국가폭력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전자가 합법성의 틀 속에서 적법한 절차를 거쳐 행사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적법하지 않은 절차에 따라 행사되는 불법적인 공권력이라고 정의하면 될까? 하지만 형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라고 해도 그것이 바로 국가폭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권력의 행사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국가폭력이 되려면 공권력의 행사가 그 자체 형법적인 의미에서 불법이 되어야 한다. 즉 국가공권력이 합법의 틀을 벗어나 형벌권의 청구대상인 국가폭력이 되기 위한 일차적 조건은 그것이 형법의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해야 하는 것이다.”(김성돈, 2018: 12) 이러한 형법적인 규정을 뒤집어서 생각해본다면, 범죄구성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법적인 측면에서 국가폭력으로 규정되지 않고 따라서 처벌의 대상이 되지도 않지만, 사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행사될 수 있는 국가폭력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합법성의 틀 내에서 시민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피해를 주고, 심지어 상해나 사망을 낳을 수도 있는 국가 공권력의 행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공권력과 국가폭력의 차이를 규정하기에는 합법성이라는 기준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국가권력이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하는 애매성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가 보여주었듯이, 게발트(Gewalt)라는 독일어 단어는 이러한 애매성을 잘 드러내준다(Benjamin, 2004; Derrida, 2004). 왜냐하면 게발트는 한편으로 국가권력’(Staatsgewalt)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면서 동시에 불법적인 폭력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한 단어가 적법한 공권력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불법적인 폭력을 함축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폭력을 정의하려고 할 때 “‘국가를 주어로 하고 폭력을 술어로 하는 합성어인 국가폭력은 국가권력 내지 국가공권력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김성돈, 2018: 11)거나 “‘국가폭력이라는 말은 사실 동어반복일 수 있는데 모든 국가는 폭력 수단을 독점한다는 전제 위에서 유지되고, 법과 사회계약 질서라는 것도 폭력 사용의 위협 아래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김동춘, 2013: 115) 같은 유보 조건을 달아놓고 시작하는 경우들이 나오게 된다.


이처럼 국가권력과 국가폭력의 관계가 우리가 보통 가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하다는 것이 드러나면, 국가폭력의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5.185.18로 만든 국가폭력의 정체의 문제도 더 미묘해진다. 김동춘은 위와 같은 유보 조건 속에서 국가폭력을 이렇게 규정한다.

 

이러한 폭력이 국가의 공식 정책과 방침, 제도와 법, 이데올로기에 의해 저질러질 때 우리는 국가폭력이라 말할 수 있다. ...... 국가가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드물기는 하지만 국가는 언제나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고, 사실 근대 국가의 건설과 운영이 전쟁 혹은 폭력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국가폭력의 주요 주체는 주로 군대와 경찰 및 민간 정보기관, 그리고 양 조직 내의 사찰기관이나 정보기관이다. 이들은 전쟁 혹은 평화 시에도 안보와 질서의 이름으로 주로 폭력을 지휘 명령한다.(김동춘, 2013: 115)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민주화 이행 이후 국가폭력의 양상은 달라지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체로 직접 폭력을 행사하던 국가는 민주화 이후 문화적 폭력, 상징 폭력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 이 두 폭력의 효과는 동일하다.”(김동춘, 2013: 114) 이제 국가폭력은 물리적 폭력 이외에 문화적 폭력, 상징 폭력을 아우르는 것이 되고, 국가의 공식 정책과 방침, 제도와 법, 이데올로기에 의해 행사되는 것이며, 평화 시에도 안보와 질서의 이름으로행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김영희는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화하는 국가의 활동 자체가 이미 국가폭력을 함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국가 폭력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기, 5.18에 관한 기억을 독점하기,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기준을 정하고 피해자들에 대해 자신이 그 기준에 부합하는 존재자인지 스스로 입증하도록 요구하기 등으로 나타난다.

 

40년이 흘러간 ‘5·18 광장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목격한 것은 국가가 폭력을 자행했을 뿐 아니라 그 폭력을 은폐하고 정당화했다는 사실, 그리고 국가가 왜곡한 기억들을 국가가 바로잡을 터이니 나머지 기억들은 이제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말하는 현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광장에 있었는지 그 참여와 피해 정도에 따라 국가가 갈라서 정해줄 터이니 국가를 상대로 이를 입증해 보라는 식의 요구, 국가폭력을 자행하고 은폐했던 시스템 안에서 국가가 정한 기준과 방식에 따라 폭력의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현실 등이다.(김영희, 2020: 120)

 

이것은 국가폭력의 문제, 그리고 국가폭력이라는 용어 자체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5.18은 국가폭력 자체 및 국가폭력이라는 개념과 불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불화의 심층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봐야 한다. 만약 5.185.18로 만드는 것이 국가폭력이라면, 그리고 지금까지 논의했던 것이 얼마간 일리가 있다면, ‘국가폭력이라는 단순한 용어만으로는 왜 그것이 5.18을 예외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것인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5.18이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와 불화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5.18을 촉발했던 국가폭력이 어떤 국가폭력이었는지 좀 더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를 더 해보는 것이 좋겠다. 국가권력과 국가폭력은 사실 동어반복이라는 점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이들은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자들(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다. 일례로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국가는 특수한 권력조직이며 어떤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폭력조직”(레닌, 2015: 55)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 사회과학의 또 다른 창시자 중 한 명인 막스 베버 역시 국가의 본질을 폭력에서 찾는다. 베버는 생애 말년에 했던 유명한 강연 직업과 소명으로서의 정치(1919)에서 국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국가란 일정한 영토 이것 즉 영토[국가라는 개념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만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폭력의 독점(Monopol legitimer physischer Gewaltsamkeit)을 자신에게 (성공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입니다.”(Weber, 1992: 158~59; Weber, 1994: 63)[강조는 원문에 의한 것이며 폭력이라는 표현은 인용자가 추가한 것이다. 독일어 Beruf가 갖고 있는 중의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베버의 강연 제목을 직업과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번역했다.]이 정의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폭력의 독점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하는 것인데, 이 정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자주 오해되는 점이지만, 베버의 말은 근대 국가의 본질이 강권국가 내지 무력국가(Machtstaat)라는 뜻이 아니다. 베버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정반대되는 논점을 전달하고 있다. 국가가 물리적 강제력 내지 폭력을 독점한다는 것의 반대말은, 국가와 다른 집단이나 개인들이 물리적 폭력을 나눠 갖는다는 것, 곧 사적인 군대나 경찰 조직을 영주나 기사 등이 거느리고, 또한 정식 군대와 다른 용병 부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베버가 이해하는 봉건제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적인 폭력을 금지하고 국가가 정당하게물리적 폭력을 독점할 때 근대 국가가 형성된다. 이러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의 효과 중 하나는, 인권 내지 주관적 권리(subjective rights)가 실효성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Colliot-Thélène, 2003; Anter, 2014 1).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국가의 폭력 독점이 없다면 인권도 가능하지 않거나 실효성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가 물리적 폭력을 정당하게 독점함으로써, 개인들이 사적인 신분관계들에 종속되지 않고, 국가와의 시민적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정치사회학적인 용어법으로 하면, 국가와의 이차적인 관계가 공동체와의 일차적인 관계에 선행하는 것으로 전제될 때,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런저런 공동체적인 관계(가족, 지역, 종교, 직업 등)를 맺기 위한 전제로 간주될 때, 근대 국가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루이 알튀세르가 유명한 호명(interpellation) 개념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과 그리 멀지 않은 발상이다.

 

3. 극단적 폭력

 

이러한 우회를 통해 국가폭력은 국가에 대해 외재적이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이고 본질적이라는 점이 더 분명해졌다. 하지만 5.18에서 시민들이 맞닥뜨린 국가폭력은 이러한 정상적인국가폭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외적이고 보기 드문 국가폭력이었다. 최정운이 이를 반인간적이고 야만적인 국가폭력으로 묘사한 것이나 최정기가 5.18의 본질은 민간인 학살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아주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5.18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 어떤 성격의 국가폭력인지 좀 더 정확히 특정해야 한다. 5.18 국가폭력의 반인간성, 야만성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나는 앞에서 발리바르의 극단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공수부대의 시민 학살을 규정한 바 있는데, 이 개념은 우리가 5.18 국가폭력의 특성을 좀 더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은 인간화의 형식과 제도 자체에 인간에 의한(곧 사회문화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생산인간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파괴가 공존한다는 점, 극한적으로는 서로 식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Balibar, 2012: 130. 강조는 원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의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인간에게 고유한 저항 가능성이 소멸되고 인간이 사물화되는 현상이다. 그는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에 대한 주석에 의거하여 이를 설명한다. 베유에 따르면 극단적 폭력은

 

죽이지 않는 힘, 곧 아직은 죽이지 않는 힘 ...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권력[이다]. ... 죽지도 않는 가운데 생애 내내 사물이 되어버리는 가장 불운한 존재들도 있다. 그들의 나날에는 어떤 놀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을 위한 어떤 여지도, 어떤 빈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다른 이들보다 사회적으로 더 아래쪽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인간, 인간과 시체의 타협물이다. ... 죽음이 끝장내기 이전에 이미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삶인 것이다.”(Balibar, 2012: 105)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처럼 만드는 폭력의 기저에 존재하는 두 번째 측면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서의 삶이라는 측면이다. 이것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지만, 발리바르가 세네갈 출신의 철학자 아쉴 음벰베(Achille Mbembe)를 원용하여 지적하듯이 식민지나 포스트식민지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폭력의 상황에서 존속하는 삶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의 세 번째 측면은 목적 합리성, 효용성을 초과하는 것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측면이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는 아무런 사회적 효용성도 없고 경제적 합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익한 낭비에 불과함에도 대대적인 비용을 들여서 유대인 대학살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대표적이거니와(Arendt, 2006: 218 이하), 합리적인 효용과 무관하게 심지어 자기 손해나 자기 파괴를 무릅쓰면서 감행되는 폭력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바로 극단적 폭력의 이 세 번째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극단적 폭력이 자양분으로 삼고 재생산하는 전능함의 환상, 극단적 폭력이 그 희생자들을 무기력으로 환원하는 것(극단적 폭력의 내재적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사이에 상호연관성이 존재”(Balibar, 2012: 112)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상호연관성에는 폭력의 대상을 이루는 희생자들이 폭력에 감염되는 차원”(Balibar, 2012: 112)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은 우리 시대에 자살폭탄테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을 통해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그에 맞선 절망적인 대항폭력 사이의 악순환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프리모 레비가 회고록에서 묘사한 바 있고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조르조 아감벤이 나치즘에 관한 자신들의 분석에서 각자 분석한 바 있는, 도살자와 희생자 사이의 구별 불가능성이라는 문제 또는 희생자 자신을 도구로 삼아(이른바 특수부대’) 희생자를 도살하는 잔혹한 폭력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극단적 폭력이 합리성을 초과하는 폭력이라면, 이는 극단적 폭력에 의해 개인의 삶과 인간의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규범들이 애매해지거나 식별 불가능해진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으며, 역사적 진보는 고사하고 목적 합리성과도 무관한, 따라서 경제적 효용이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자행되는 폭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극단적 폭력이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의식의 차원, 특히 환상의 차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 때문에 극단적 폭력에 대한 분석에서는 정신분석(여기에는 자캉 라캉과 앙드레 그린 같은 정신분석가만이 아니라 조르주 바타이유,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자크 데리다 같이 정신분석에 관한 탐구를 수행하는 철학자이론가들의 작업도 포함된다)에 대한 준거가 본질적이다(Balibar, 1007; Balibar 2007; Balibar 2010 1부 두 번째 강연).


5.18에서 놀라운 것은, 발리바르가 극단적 폭력의 특징으로 제시하는 세 측면이 모두 나타나지만, 동시에 그것과 길항하는 힘도 같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공수부대의 폭력은 광주 시민들을 사물화하는 폭력, 시민들을 사람이 아니라 심지어 개나 돼지도 아니라,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상관없는 사물처럼 다루는 폭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이 시민들을 경악하게 만들고 공포에 젖게 했지만 그들을 사물로 환원하는 데는, 곧 그들이 순순히 굴종해서 물러나게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그것은 가혹한 고문을 수반하는 폭력, 삶을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 만드는 폭력의 성격도 띠고 있었지만, 시민들은 때로는 비극적이게도 내면이 파괴되어버리거나 자살을 택했지만,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가장 놀라운 것은 세 번째 측면일 것이다. 광주 시민들, 특히 무장한 시민군들은 공수부대의 극단적 폭력에 용감하게 저항했고 동료 시민들의 피의 값을 되찾고자 했지만, 거기에 맞서 극단적인 대항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으며, 그 대신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박호재임낙평, 2007: 407)는 말을 남긴 채 죽음을 택했다. 또한 한 여성 노동자가 증언하듯이, “그 애리디애린 것들이 여자를 보호한다고 우리한테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이 소중한 역사에 대해 증언을 해야 되지 않겄냐”(윤청자 씨의 증언.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2012: 116)고 무슨 선지자 같은 얘기를 하면서 여성 동료들을 죽음에서 구하고 스스로는 역사가 되었다.[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이러한 비극적 저항에 관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여기에는 군사력의 절대적인 차이가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시민군이 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들의 항쟁이 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까? 그것은 더 파괴적이고 더 많은 살상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내전으로 귀결되었을까? 아무튼 5.18은 극단적 국가폭력에 맞서 저항하면서도, 그러한 저항이 또 다른 극단적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에도 저항할 줄 알았으며, 자신들의 저항을 윤리적정치적 행위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 이것은 발리바르가 정의했던 의미의 반()폭력(또는 시민다움)의 정치 내지 주디스 버틀러가 정의했던 의미에서의 비폭력의 두드러진 사례 중 하나다. 버틀러는 비폭력을 이렇게 정의한다.

 

폭력을 가하는 것이 극히 정당해보이고 당연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의무적 선택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가능한 선택지로 주어지는 저항적 실천이 비폭력이라는 것이 비폭력을 묘사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자면, 비폭력이라는 실천은 폭력적인 행동이나 폭력적인 과정을 막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 형태의 행위를 때로 공격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내가 할 논의 중 하나는, 비폭력을 생각할 때 단순히 폭력이 없는 상태 또는 폭력을 삼가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긍정하기 위한 지속적 참여라고, 나아가 공격성의 경로를 바꾸는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Butler, 2021: 43)

 

나에게는 이 대목이 아주 의미심장해 보인다. 왜냐하면 비폭력을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면, 도청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민군들의 저항이야말로, 탁월한 비폭력의 행위였다고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가 말하는 비폭력은 폭력을 방관하거나 폭력에 대해 체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세상의 폭력성에 대하여 나 혼자만의 도덕적 비폭력을 고수하려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1) 폭력에 대한 도구주의적 관점을 타파하고 그것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2) 그러면서 동시에 세상의 폭력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3) 더 나아가 폭력 자체를 반대하는 지속적이고 심지어 완강한 저항의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불화로서, 불화의 정신으로서의 5.18은 바로 이러한 비폭력의 정신이 아니었을까?[이 논문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은 이 논문에 관해 다음과 같은 심사의견을 제시했다. “5·18 민주항쟁을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을 추가 투입하며 진압한 신군부 세력의 야만적 폭력 행위는 국가의 물리력 행사가 아닌 일부 군사 쿠데타 세력의 헌정질서 파괴행위, 반란 및 내란 행위이다. 이에 대해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등법원(1996) 및 대법원 판결문(1997)을 참조 바란다. 따라서 5·18 민주항쟁은 오히려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는 것이 사법부의 최종 판결이다. 즉 법률적으로 폭도는 시민이 아니라 신군부이다. 따라서 5·18 민주항쟁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 혹은 불화가 결코 아니다. 5·18 민주항쟁을 필자와 같이(혹은 필자가 인용한 일부 저자와 같이) 이해할 경우, 5·18 항쟁에서 희생된 시민들을 관점에 따라 폭도로 규정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릴 뿐 아니라, 필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이는 미안하게도 필자가 국가와 정부의 차이, 그리고 공동체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따른 것으로 사료 된다) ‘5·18 민주항쟁을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보는 관점은 심각한 사실적 오해라는 점에서, 이는 더 이상 이론적 논란의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법원의 판결과 대한민국 공동체의 합의된 정서에 반하는 관계로, 안타깝게도 심사자로서는 이에 대한 양보나 추가적인 협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울러 심사평의 다른 대목에서는 위헌적 사고운운하면서 겁박을 하고 있다. 이 심사위원의 황당하고 착란적인 궤변에 대해 일일이 답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리라 본다. 이것은 심사를 가장한 지적 테러리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이 심사위원의 견해의 적합성 여부는 독자들 스스로 32~3절의 논의를 참고하여 충분히 판단할 수 있으리라 본다. 여기에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2~3절의 논의의 요점을 간단하게 요약해보겠다. 첫째, 나는 최정기의 연구를 원용하면서 5.185.18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국가폭력 개념을 정확히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시했다. 둘째, 그 이유는 막스 베버의 유명한 국가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폭력의 독점체이며,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가 게발트라는 독일어에 대한 성찰에서 잘 보여준 바 있듯이, 공권력과 폭력은 뗄 수 없이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수부대 및 그 배후의 신군부가 5.18 당시에 자행한 폭력은 통상적인 국가폭력이라는 용어만으로는 제대로 규정되기 어려우며, 별도의 특수한 규정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나는 한편으로 최정운의 󰡔오월의 사회과학󰡕과 서승의 연구에 입각하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폭력론을 원용하여 공수부대 및 그 배후의 신군부가 자행한 폭력은 야만적이고 반인간적인 국가폭력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국가테러 내지 극단적 국가폭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제시했다. 셋째, 나는 5.18 당시 신군부가 행사한 국가폭력을 이처럼 극단적 국가폭력으로 정의함으로써, 5.18의 민주주의적 탁월함의 특성을 좀 더 정확히 해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극단적 폭력의 특성 중 하나가 폭력을 감염시킴으로써 폭력의 피해자로 하여금 동일한 극단적 폭력을 행사하도록 유혹하는 것인데, 광주항쟁의 투사들은 극단적 대항폭력으로 응전하기보다는 주디스 버틀러가 정의한 의미에서 비폭력 저항으로 맞섬으로써 유례없는 반폭력 내지 비폭력의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4. 공동체와의 불화: 공통적인 것의 나눔 대 빨갱이

 

그렇다면, 5.18은 최정운이 말하듯 절대공동체에 도달했던 것일까? 아니면 구체적 이념 이전의 순수한 인간 본성의 발로이자 응답하는 주체들의 공동체로서 “5.18 항쟁공동체”(김상봉, 2015)를 이루었던 것일까? 나는 기본적으로 이들을 비판하는 김정한의 견해에 찬동하는 편이다. 그의 비판에 따르면, “절대공동체항쟁공동체라는 발상은 기본적으로 반()정치적 발상이며, 이는 그것이 이런저런 이념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 내지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주의로의 회귀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광주 시민들이 극단적 폭력에 맞서 보여주었던 그 저항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그것이 어떤 것에 기반을 둔 것인지 설명해야 할 책무를 느낀다. 광주 시민들은 어떻게 그런 저항을 전개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점에서는 박경섭의 공동체 논의가 의미 있는 통찰을 제시해준다고 본다. 그는 한편으로는 장-뤽 낭시의 공통적인 것의 나눔개념에서 영감을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르조 아감벤의 공통적인 어떤 것”(whatever the common)이라는 개념을 실마리로 삼아, 극단적 폭력에 맞서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공동체의 성격을 해명하려고 한다. 그는 광주 시민들에게 공수부대의 야만적 폭력, 짐승 같은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눈높이에서가 아니라 마을의 법, 인륜도덕으로 용납이 안 되는 것이었으며, 항쟁의 참여자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시민이 아니라 인륜도덕을 중요시하고 사람의 됨됨이를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박경섭, 2015: 41)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인륜도덕이나 마음이 호혜성의 의무나 공동체의 윤리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 그것은 오히려 마치 의례 때 제상에 올렸던 하나의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과 유사”(같은 글, 같은 곳)하다는 점이다. 본능적인 충동과 이성적인 판단 사이에 존재하는 이 공통적인 것의 나눔이 극단적인 폭력에 맞서 광주 및 전라도 시민들이 저항의 연대를 펼칠 수 있었던 마음의 힘이었다. 박경섭이 정당하게 지적하듯이, 이것은 군부 엘리트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이며, 또한 애국주의나 국가주의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절대공동체항쟁공동체로 신화화하거나 절대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반증하는 명백한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빨갱이가 궁극적인 배제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빨갱이는 절대공동체라고 칭송받는 광주 코뮌 내에서도 그 자리가 허용되지 않는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었다. “빨갱이에 대한 이러한 터부화는 한편으로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는 자기 결백성에 대한 강조로 표현된다. 예컨대 당시 21세였던 김준봉 씨는 526일 한 고등학생을 도청에서 내보내며 이렇게 말한다. “항상 마지막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지금 사태를 정확히 후세에 전해주라.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해 주라. 정확하게 역사에 전달된다면 내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꼭 살아남아서 전해 주라.”(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1990: 233; 김정한, 2021: 100에서 재인용) 또한 이런 증언도 있다. “사람들은 6.25 때 빨갱이들도 이렇게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이지는 않았다면서 같은 민족, 한 형제인 대한민국 군인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분노를 토했다.”(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1990: 1354; 김정한, 2021: 101에서 재인용)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빨갱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거부 반응은 운동 주체들 사이에서도 나타나서, 수습파는 강경파를 향해 빨갱이 아니냐고 몰아붙여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5.18의 영웅 중 한 명인 전옥주 씨의 사례는 당시 광주 시민들이 빨갱이에 대한 거부 반응을 폭넓게 공유하고 있었음을 잘 드러내준다. 그는 가두방송을 하는 도중에 두 차례나 간첩으로 지목되어 결국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에게 더 가혹했던 것은 징역살이 끝에 사면을 받아 출감한 뒤 가해진 2차 가해였다. 출감해서 나오는 길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저 여자, 간첩이었는데 안 죽었네라고 수군거리고, 고향에 내려가서도 고향 사람들은 그를 향해 어머, 간첩이었대. 근데 어떻게 석방됐대.” 하고 손가락질을 해댔다고 한다(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2012: 163~64). 전옥주 씨는 자신에게 진짜 고문은 이런 것이었다면서 울분을 토로한 바 있다.


광주 시민들 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빨갱이에 대한 이러한 터부화는 아주 역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5.18이 한국 현대사에서 지닌 중요한 의미는, 무엇보다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국가폭력이 극단적 폭력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극단적 폭력에 대한 반()폭력적인 저항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며,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를 구성한다는 것을 놀라운 저항의 연대, 마음의 공동체를 통해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5.18은 빨갱이를 이러한 마음의 공동체에서 배제했으며, 그는 극단적 폭력의 대상이 되어도 무방하다고 간주했다. 한국 현대사, 적어도 남한의 현대사의 극단적 폭력은 무엇보다도 빨갱이에 대한 폭력이었으며, 국민을 빨갱이와 빨갱이 아닌 자로 분류하는 것의 폭력이었다(김득중에 따르면 그것은 여순사건에서 기원한 것이다. 김득중, 2009). 이것이 해방 이후 남한의 치안 공동체(랑시에르적인 의미의)의 기저에 놓여 있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였다. 남한에서 공동체의 정당한 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빨갱이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고, 빨갱이처럼 존재해서는 안 되며, 마치 빨갱이처럼 보이게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이러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위반하는 자는 공동체로부터 배제되고 극단적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남한에서 국민이 되기 위한 조건은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점을, 행동과 존재, 말을 통해 끊임없이 입증하는 것이다. 5.18이 공수부대의 폭력을 통해 보여준 것은, 이러한 극단적 국가폭력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내재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5.18은 이러한 빨갱이에 대한 거부 반응,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했어야 했지만, 오히려 5.18의 저항의 연대는 빨갱이에 대한 배제를 전제로 하여 형성되었고 자신을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5.18은 치안의 질서와 단절하지 못한 채, 치안 내에서의 저항으로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물론 5.18 항쟁을 간첩 및 불순분자들에 의한 폭동으로 몰아가려는 신군부의 언론 통제와 조작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항쟁 공동체 내부에서 이미 빨갱이에 대한 배제가 존재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심사위원 중 한 분은 항쟁 당시 시민들이 함께 모여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으며, 이는 광주항쟁을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적대로 작동하는 분단의 논리와의 관계 속에서 인지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광주항쟁은 현상적으로는 레드콤플렉스를 직접적으로 타파하지는 못했지만, 레드콤플렉스라는 견고한 지형에 균열을 내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견해를 제시해주었다. 앞으로 더 다뤄볼 만한 유익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5. 민주주의와의 불화, 리프리젠테이션의 불화

 

이런 시각에서 보면 5.18이 국가의 공식적인 기념일이 된 이후, 국가 및 지방정부의 관료주의와 특권화된 당사자주의의 결합을 통해 신성화와 상품화의 이중구속에 빠져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박경섭, 2021). 5.18의 국가화는 “19805월에 그곳있었던이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애국시민으로 정체화하게 만들었던 폭력’”(김영희, 2020: 131)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더욱 공고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5.18의 명예회복은 5.18 민중항쟁 당사자들의 염원이었고 5월 운동의 참여자들이 추구했던 바이지만, 그것은 불가피하게 국가권력을 요구하고 그 권력을 통한 인정 및 승인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5.18의 명예회복은 국가권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권력의 인정과 승인이 없는 명예회복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국가폭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국가권력을 통한 인정과 승인의 전제는 국가폭력의 수용이다. 그러한 폭력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국가 폭력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기, 5.18에 관한 기억을 독점하기,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기준을 정하고 피해자들에 대해 자신이 그 기준에 부합하는 존재자인지 스스로 입증하도록 요구하기 같은 방식으로 수행된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당사자와 비당사자, 애도할 만한 이들과 애도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Butler, 2021)을 나누게 되며, 전자를 통합하고 후자는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518의 기억투쟁은 국가의 공식적인 기억과 민중의 기억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국가의 자리를 대리한 당사자들의 공식 기억이 비당사자들의 침묵과 망각을 생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당사자들에 의한 518의 신성화, 기억의 기념비화는 기억의 현재화, 활성화에 힘쓰기보다 시간을 거슬러 ‘80년 항쟁 당시라는 시점으로의 회귀 경향을 보인다(박경섭, 2021: 63).

 

이것은 또한 여성들을 5.18의 당사자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성들은 항쟁의 주요 당사자였던 시민군이 아니었으며, 도청 사수의 영웅들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그들은 정성껏 시체를 닦아서 시민장을 치르게 하고 밥을 만들고 여러 가지 돌봄 노동을 수행했지만, 그것은 항쟁의 당사자 자격으로 표상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5.18 운동의 초기 국면에서 여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재현되었다. 한편으로 여성은 훼손된 신체 이미지를 통해 공수부대가 자행한 극단적 폭력을 입증하는 증거의 기능을 수행했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은 또한 저항 공동체 내부에서 특정한 젠더 역할(어머니나 누이)로 고착되거나 파편화된 존재자로 나타났다(김영희, 2018).


5.18의 기억과 서사의 문제와 관련하여 또 하나 중요한 쟁점은 포스트 5.18’의 문제다. 5.18을 직접 체험하거나 자기와 동시대, 동세대의 일로 경험하지 않은 세대, “비체험세대”(배주연, 2020: 8)에게는 5.18이 그 이전 세대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될 수 없고, 동일한 의미로 재현될 수 없다. 비체험세대에게 5.18리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사건, 곧 교과서에서 배우고 영화 󰡔택시운전사󰡕나 웹툰 󰡔26󰡕 또는 소설 󰡔소년이 온다󰡕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사건, 끔찍한 국가폭력이 자행되었고 여기에 맞선 용감한 광주 시민들의 투쟁 덕분에 민주화를 이룩하게 된 사건, 하지만 자신의 일상과 큰 관련성이 없는 사건”, 그러면서도 특히 전라도나 광주 출신의 젊은 세대에게는 때로는 홍어라는 비하 명칭을 받게 되는 사건으로 나타난다(김꽃비 외, 2021: 167). 또한 비체험세대에 속한 어떤 젊은이들에게 5.18은 트라우마로 경험된다. 어린 시절 아빠 손을 잡고 망월동 묘역을 방문하여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그는 5월에 관한 다큐멘터리나 사진들, 관련 자료들을 접할 때마다 벗어나고 싶은 공포를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광주에서 살아가는 그에게 5월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다가오고, 그의 현재는 늘 19805월로 환원된다. “2000년대를 살아가며 광주도 지금을 살고 있지만, 광주를 호명하는 이들은 지금이 아닌 19805월의 그때만을 호명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화가 났다. 나의 이 선연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나도 2000년대를 살고 싶은데 자꾸 19805월만을 부른다.”(김유빈, 2021: 128) 그리하여 나의 모든 생활권이 오월이었고, 이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을 배우며 광주 사람이 되도록 교육받았다.”(김유빈, 2021: 125) 태국과 캄보디아 NGO 단체에서 인턴 생활을 경험한 그는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인해 다시 깊은 충격을 받는데, 미얀마 군경의 무차별 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게 된 사건들이 그에게 다시 오월의 죽음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체험 세대에게 5.18은 아무래도 자신들의 삶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경험하기 어려운 사건이지만 커다란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사건으로 재현될 것이다.


리프리젠테이션을 둘러싼 이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질문들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보기에 이 문제들은 앞에서 논의했던 국가폭력, 그것도 극단적 국가폭력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5.18은 극단적 국가폭력에 직면하여 그것에 대해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 적어도 대항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저항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기초에 내장되어 있는 극단적 국가폭력을 드러내주었다. 이러한 폭력의 경험은 많은 사상자를 낳았고 또 살아남은 이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그것이 한국 현대사가 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라는 점을 파악하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5.18은 극단적 국가폭력을 정치의 쟁점, 민주주의의 쟁점으로 끄집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러한 폭력에 직면하여 애국국민이라는 기표들에 매달렸고, 그 타자로서의 빨갱이를 배제했으며, 지금까지 5.18에서 이러한 쟁점이 제대로 제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빨갱이는 치안의 질서에 어긋나는 이들에 대한 일반적 명칭일 것이다. 여기에는 간첩, 좌익용공 분자도 포함되겠지만, 또한 이상하게 너무 말 잘하는 여자도 포함될 것이고, ‘퀴어라 불리는 성적 소수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5.18의 고통을 경험한 광주 및 전라도 시민들은 극우파 집단에게 홍어라든가 전라민국또는 ‘7같은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고, 이것은 그들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의 원천이 되고 있다.

 

IV. 결론을 대신하여

 

5.18의 명칭을 둘러싼 논란, 따라서 5.18의 리프리젠테이션에 관한 또 하나의 불화 속에서 광주민주화운동내지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한편으로 그것이 국가의 공식적인 법적제도적 명칭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5.18의 진정한 주체였던 민중을 포함하지 않는 명칭이라는 점에서, 다소 기피되거나 외면 받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이 상당히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명칭이 더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이라는 개념을 좀 더 심층적으로 개조할 필요가 있다. 공식적인 법적 의미로 이해하면 민주화운동은 이미 종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군사독재에서 문민정부로 이행하고,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5.18이 국가의 공식적인 기념의 대상이 됨으로써 5.18 민주화운동은 더 이상 시빗거리의 대상이 아니지만(알다시피 2022~235.18 기념식에는 윤석열 정부 및 여당의 지도부들이 대거 참석했다), 또한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진보운동을 위한 동력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요컨대 5.18은 민주주의와의 불화를 중지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우리가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을 ()폭력의 정치(발리바르) 내지 비폭력적 저항(버틀러)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곧 극단적인 폭력을 감축하고 퇴치하기 위한 운동으로, 폭력 그 자체에 맞서기 위한 지속적인 돌봄의 연대의 구성과 전개라고 이해한다면, 사실 민주화운동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운동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 현대사의 토대에, 또는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이라는 치안 공동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질서에 극단적 국가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국민 개개인이 행동하고 존재하고 말하는 방식 자체가 극단적 국가폭력에 의해 규정되고 있음을 함축한다. 만약 민주주의가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운동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면,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극단적 국가폭력을 감축하고 퇴치하기 위한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은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일 뿐만 아니라 평화운동이기도 하고, 여성운동이자 성소수자 인권운동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를 내부로부터 민주화하고 문명화하려는 운동일 것이다. 김영희를 비롯한 여성주의 연구자들은 “5.18을 국가폭력으로 재사유한다는 것은 ...... 국가라는 경계를 벗어난 기억과 애도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질문”(김영희, 2020: 121)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충분히 의미가 있고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않게 국가를 내부로부터 민주화하고 문명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국가를 경유하지 않는 보편성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알튀세르가 말했듯이 호명과 다른 방식으로 보편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는 폭력적인 본성의 기계임과 동시에 시민들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동체라는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국가가 폭력적이라면, 그만큼 더 국가를 민주화하고 문명화하려고 해야 한다. 5.18이 이러한 운동에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 그것이 계속적인 불화의 원천이 될 수 있을지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보기에 확실한 것은, 그러한 운동이 5.18의 리프리젠테이션에 관한 불화, 5.18의 정체성에 관한 불화의 핵심을 이루며, 그것이 5.18과 불화하기의 장래를 규정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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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120호 기념 심포지엄이 오는 7월 8일 토요일 개최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아래 주소로 가셔서 신청서를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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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다중재난 시대의 새로운 길 찾기 (google.com)









이번 심포지엄의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황해문화 통권 120호 발간기념 심포지엄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다중재난 시대의 새로운 길 찾기

 


기획 취지


1. [황해문화] 30주년을 맞이하며

 

[황해문화]가 어느덧 통권 120호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1993년 인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 계간지로 출발했던 [황해문화]는 이제 명실상부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을 대표하는 잡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평범한 시민들과 약소자들, 곧 우리 사회 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동안 양적, 질적으로 성장해오면서 [황해문화]전 지구적 시각, 지역적 실천이라는 창간 당시의 초심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황해문화]가 첫 발을 내디뎠던 1993년은 전 지구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당시는 100년 넘게 세계를 분할해온 주요 세력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당시는 민주화 이행의 기쁨이 민주화 운동 내부의 분열과 패퇴, 수구 보수 세력의 연이은 집권에 따른 좌절감으로 퇴색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탈냉전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세계 문명의 창도는 인천을 비롯한 각 지역의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은 지난 30여 년 동안 [황해문화]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전진해올 수 있었던 길잡이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650호를 발간하면서 [황해문화]이제 성장도 정리도 끝난 포스트 모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세간의 시대인식에 거슬러, 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근원적 난제들은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명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적인 혼돈의 와중에 섣부른 판단과 명령을 내리기보다 그 혼돈의 상황을 직시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불행과 고통과 갈등과 비명의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가능하다는 [황해문화]의 자세였습니다.


몇 년 전 100호 출간을 기념하여 열린 심포지엄에서 [황해문화]통일과 평화 사이에서 황해의 위상에 대해 질문한 바 있습니다. 이 질문은 지난 70여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질곡에 빠뜨려온 분단과 전쟁의 엄중함을 기억하면서도 섣부른 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대를 경계하기 위함이었으며, 진정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서는 그 주체와 장소, 방법에 관해 좀 더 깊이 숙고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황해라고 하는 주체’, 곧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난 근현대를 살아온 주변부의 작은 지역의 시민들이, 황해라고 하는 장소’, 곧 분단과 냉전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섬과 섬, 항구와 항구, 지역과 지역을 잇는,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교류하고 어울리는 곳에서, 황해라고 하는 방법’, 곧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자율적인 변방성, 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성, 선형적이지 않은 횡단성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통일-평화의 기획을 모색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선언이었습니다.

 

2. 복합위기에서 다중재난으로

 

이제 다시 120호를 맞이하여 [황해문화]는 새로운 30년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전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자는 창간사의 다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우리는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위기라는 말로는 제대로 형용하기 어려운, 절박하고 다면적인 재난의 먹구름이 현재와 미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이다.


요즘 언론과 정치권에서 복합위기라는 말이 자주 거론되고 있습니다.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와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급격하게 금리 인상을 함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도 연쇄적인 금리인상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환율 인상, 금융 불안정, 부동산 가격 하락, 가계부채 문제 등과 같은 다면적인 위험 요인들이 누적되고 있는 것이 곧 복합위기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합위기로 표현되는 이 문제들이 한국 경제와 사회에 적지 않은 부담과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치안’(police)의 관점에서 이해된 위기일 뿐입니다. 치안에게는 기존 지배 질서의 안정적인 재생산이 최고의 목표이기 때문에, 이를 위협하는 요인들은 모두 무차별적으로 위기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치안에게는 인플레이션이나 금융 불안정도 위기이지만 민주화 시위도 위기이고 세월호 참사도 위기입니다.


더욱이 치안이 위기라고 부르는 것들은 많은 경우 진정한 위기들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실제로 언론과 정치권에서 복합위기라고 부르는 것에는 인류세(anthropocene) 내지 자본세(capitalocene)라는 명칭으로 표현되는 생태적 재난이나 3년여의 시간 동안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보건 재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서로 맞물려 있는 이러한 생태적보건적 재난은 인류 문명의 토대 자체를 잠식하는 문명적 위기이며 민중의 삶에 심각한 피해를 낳을 수밖에 없지만, 복합위기론에서 이 문제는 방치되거나 배제되고 있습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래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세월호 참사 및 이태원 참사로 대표되는 사회적 재난들과 더불어, 비정규직 노동자들, 여성과 성적 소수자들, 장애인들, 이주자, 탈북민, 난민 등과 같은 사회적 약소자들이 직장에서, 일상에서 직면해 있는 불안전 재난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변동과 그것이 특히 동아시아의 정세에 미칠 파장 역시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냉전으로 명명되고 있는 이러한 재편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질서의 전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 사이의 대결구도로 가시화되고 있는데, 이는 군사적 긴장만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전망은 점차 멀어지고 적대적인 대결 구도가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이는 다시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의 경로가 고착되지 않을지 우려스럽습니다.


이러한 재난들의 중심에는,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듯 식인 자본주의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의 식인 자본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제국적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는, 글로벌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의 구조적 불평등의 간극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산출함으로써 문명의 기초를 잠식하고, 인공지능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이용하여 대중들의 사고와 감정, 행동에 대한 정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따라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에서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위기는 치안이 명명하는 복합위기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고 배제하는 다중적 재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재난들은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들을 서로 중첩된 다중적 재난들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하는 민중들, 곧 을()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사고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의로운 전환은, 다중재난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것에 맞서고 있는 민중의 관점에서 이러한 재난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진보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다중적이고 다면적인 노력의 방향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명칭입니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우리는 먼저 돌봄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돌봄은 흔히 생각하듯이 어린아이나 노인 또는 환자나 장애인에게만 필요한 서비스 활동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활동이며 더 나아가 자연 생태계가 온전하게 재생산되기 위해 필수적인 활동입니다. 우리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또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합니다. 그것이 생태적사회적 연관망 속에 존재하는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고 돌봄을 받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입니다.


자연과 인간, 주체와 객체, 공공성과 사유성, 국민 대 비국민, 남성과 여성 등과 같이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범주들에 의거하여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을 전환하기 위해 돌봄 개념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요? 생태적보건적 재난과 불안전 재난, 신냉전의 전개, 디지털 자본주의의 심화는 사회의 공동 이익 및 인류의 공동 생존을 추구해야 할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를 해체하여 그들을 서로 상이한 이익 추구를 위해 끝없이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적인 행위자들로 변모시키고 있습니다. 더욱이 트럼프 시기의 미국에서,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그리고 동아시아 등에서 부상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통치는 강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약소자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고 외면함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날 을들 간의, 민중 간의 새로운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결국 자본주의에 관한 질문과 연결됩니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된 이후 자본주의는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적 사회경제 체제로 존립해 왔고 정당화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재난이 직간접적으로 자본주의의 비이성적인 광기와 연결되어 있다면, 정의로운 전환의 시도는 자본주의 이후라는 문제, 자본주의를 넘어서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전의 사회주의의 시도가 실패로 귀결된 이후,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들을 어떻게 사고하고 실천해볼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세계 문명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심포지엄에 참여하는 선생님들께 저희는 이런 질문들을 제기해보고자 합니다. 이번 심포지엄이 앞으로 [황해문화]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데서나 우리 사회의 진보적인 전환을 추구하는 데서나 중요한 한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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