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스티븐 런치만 경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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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현장 묘사가 압권이다. 5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CNN 종군기자의 현지 리포트라도 보는 기분이다. 1950년대에 나온 책이지만, 현장감 뛰어난 묘사에 있어서 40여년 후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보다 훌륭하다.

책을 읽다보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보여주는 인간군상의 희비극에 전율한다. 구차한 삶보다는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한 비잔티움인들이 그토록 많았던 것은 우리 인간들이 일정한 상황에서는 대체로 다 용감하여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벽방어를 책임진 제노바인은 수개월 동안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영웅대접을 받았으나  오스만투르크의 마지막 총공격 때 부상을 입자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는지 홀로 방어선을 빠져나가다 전선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피아간의 혈전이 극에 달한 결정적 순간에 수비대장이 자리를 비우자 그토록 충천하던 병사들의 사기는 일순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모두들 수비대장의 뒤를 이어 전선을 이탈하였던 것이다. 비잔티움 황제가 쫒아와 수비대장에게 자리를 지키도록 간청했으나 전의상실한 제노바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그는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동시에 배를 타고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부상이 깊어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전선에서 버텼더라면 그를 위해서도 얼마나 다행스러웠겠는가.

성벽을 돌파한 오스만 병사들은 대량 살륙전을 벌렸다. 저항하는 자는 전멸시켰다. 그러나 한 망루에서는 일군의 병사들이 끝까지 남아 저항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오스만 병사들은 용맹스런 적에게 경의를 표하고 바닷길을 터서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무사히 떠나도록 해주었다.

살고자 하는 자가 죽고, 죽기로 싸운자가 살아남고, 살 수 있는데도 싸우다 죽기를 택하고,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아 살고 운이 나빠 죽고, 생과 사가 다 같이 초개 같아지는 장대한 서사 드라마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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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평전 1 (반양장) -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학고재신서 31
유홍준 지음 / 학고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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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은 넓고 재미있는 일은 너무 너무 많다. 붓글씨가 이토록 재미있는 주제인줄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완당이 당대의 명필일 뿐 아니라 동양삼국의 고금을 통털어 최고의 명필로 꼽을 수 있음을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추사체를 10초 이상 들여다 본 적이 10년도 넘은 것 같다. 추사체라 하여 들여다 봐도 무엇이 명필이라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기억만 있다. 이건 국민학생 글씨 같은데 정말 예술엔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그런데 이번에는 추사체가 너무도 멋들어지게 보였다. 명품 중의 명품, 글씨 중의 최고인 듯 느껴졌다. 저자의 훌륭한 길안내와 더불어 사십고개에 접어든 나이탓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추사체라는 것이 젊은 천재의 작품이 아니라, 평생의 노력 끝에 나이 칠십이 다 되어서야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하니 더욱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서예가로서 타고난 자질도 자질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뛰어난 서예가라 코흘리개 시절부터 좋은 글씨를 보고 배우고 써볼 수 없었더라면, 그의 아버지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가는 길에 따라가 대륙의 붓글씨 발달상을 접하지 못했더라면, 성격이 참으로 별나고 별나서 완벽주의와 집중력으로 자신을 거듭 극하고 극하지 못했더라면, 당쟁의 패배자가 되어 10년 제주도로 귀양으로 좀 더 겸허해지고 시간이 나고 멋대로 글쓸 수 있게 되지 못 했더라면... 아마도 추사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것이 세상이치인 모양이다. 손자는 싸움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요소로, 道 天 地 將 法, 무려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닌, 다섯 개나 되는 오묘하고 골치아픈 절대필수준비사항을 꼽았다. 그러니 천하명품 붓글씨가 나오는 데 어찌 그 이치가 복잡하고 어지럽지 않을 수 있으랴... 항차 자기의 노력만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안달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하늘과 땅과 길과 시스템과,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다 작심하고 달려들어 기를 쓰고 도와야 비로소 큰 일이 이루어질듯 말듯 하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이만큼 충실하고 제대로 된 인물전기가 나온 것은 박수치고 감격할 일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꿀릴 것 없는 훌륭한 작품이다. 앞으로 붓글씨 삼매 좀 해야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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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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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청나라의 옹정제만큼 보고를 철저히 챙기고 잘 활용한 이가 또 있을까. 옹정제는 보고의 달인이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에 조회하고 낮에 접견하고 해지면 전국의 지방관들로부터 올라온 수십통의 보고를 검토한 후 붉은 먹을 붓에 찍어 일일이 답신한다.

일단 지방관들이 보고를 생활화하도록 챙긴다. 부임하자마자 자금성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 들은 교유를 그대로 외워 보고토록하고, 틀리면 직접 글자를 고쳐서 답신한다. 보고를 왜 해야하는지 깨우쳐주면서 수시로 보고를 닥달한다.

보고에는 공식보고와 비공식정보보고가 있다. 이 가운데 후자를 더욱 중시한다. 비공식보고는 황제만 본다. 보고를 잘못했다고 질책은 해도 벌을 내리진 않는다. 보고를 잘못하면 호되게 질책한다. `바보는 고칠 수 없다는 말은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수라도 너보다는 낫다` `양심을 뭉개버리고 수치를 모르는 소인배` `목석처럼 무감각해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녀석` `눈가림만 하는 사기꾼` `은혜도 의리도 모르는 잘못 둔갑한 늙은 너구리`... `이걸 보고라고 했냐.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일을 왜 이제사 보고하느냐`...`이렇게 하찮은 것만 보고하는 걸 보니, 반드시 보고해야할 중대한 사안을 감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반면에 충실하고 진실한 보고가 올라오면 칭찬하고 격려한다. `경의 보고는 길지만 이처럼 유익한 보고라면 읽는 것이 즐거워서 괴로움을 잊어버린다`

옹정제는 철저한 보고 챙기기로 그 넓은 중국 천하의 지방관들의 능력과 활동을 꿰고 앉아 그들이 백성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전심전력하도록 부단히 채근하였다.

옹정제는 13년의 재위기간 동안 여행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하루종일 너무 바빴다. 그리고 검소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사치스레 낭비하지 않도록 하고 치수나 빈민구제에 재정을 집중했다. 풍작이 오면 성군이 난 탓이 아니라 하늘의 가호이니 감사하다 했고, 홍수가 나면 제대로 대비 못한 너희 지방관들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짐의 책임이 더 크다고 자책하였다.

옹정제의 거실 입구에는 `爲君難`, 즉 군주 하기는 지극히 어렵다`는 액자를 걸어놓고, 기둥에는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이며, 나 하나로 인하여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액자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천명의 자각은 지도자의 필수요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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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2004-09-23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행시 하나 지었습니다.
주 마다
간 떨어진다.
보고가 없다면
고통도 없으리

sunnyside 2004-09-24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그래서 주간보고 안하시는군요
 
강희제 이산의 책 1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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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에 대한 자각과 탁월한 통치능력을 겸비한 강희제는 맹자가 꿈꿨던 왕도나  플라톤이 꿈꿨던 철인왕(philosopher king)에 근접했던 현실의 위인이다. 특이하게도 저자는 이 책을 강희제의 1인칭 서술시점으로 풀어나간다. 중앙일보의 조우석 기자가 썼듯이, 이 책을 읽으면 강희제와 독대하는 느낌이다.

얼마전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을 읽고나서부터 동아시아의 18세기에 관심이 가게 되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일단 당대의 사실을 풍부하게 접해야 하는 내 관심사에 딱 부합하는 책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훌륭하며 특히 강희제의 개인전기로서 좋다. 18세기를 순례한다면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여정이다.

천하의 근심을 짊어진 CEO 군주로서의 애환과 괴로움을 털어놓는 강희제의 글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대략 이런 글이다. 현실을 모르는 선비들이 옛 황제 중에 일찍 죽은 이들에 대해 지나치게 쾌락을 추구하고 무절제하여 그리 되었다고 하나 이는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들은 아마도 과로사했을 것이다. 군주로서 천하를 제대로 다스리려면 혹독하고 과중한 스트레스와 업무를 견뎌내야 한다. 너희가 어찌 그 괴로움을 알겠느냐. 너희 신하들은 벼슬 살고 싶으면 살고, 늙어서 떠나고 싶으면 떠나 고향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면서 말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군주는 늙고 힘들어도 떠날 곳이 없다. 죽는 날까지 천하를 근심하며 최선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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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2004-09-23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밧드님
괴로움이 2배고 애환이 2배이면, 기쁨이 2배이고, 보람도 2배이겠거늘,
어째서 툴툴대신답니까? 이 뻔한 세상이치를 모른체 하시는 것은,
혹시 유세를 한번 해보시겠다는 뜻...?

남들은 하이파이브 한번으로 날려버릴 기쁨을 평생 안고 가실 수 있으신 주제에,
엄살이 도를 넘으시는군요. 수준미달, 설득력 "0"의 하급 엄살, 실패한 농담...

비로그인 2004-09-23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류수도사님!
나도 사장님한테 이만큼 싸가지없지는 않았소.
사람의 경계를 넘어선 이 무념무상무싸가지!
무슨 특별한 수행이라도 하신게요?

배바위 2004-09-2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글은 강희제가 유언으로 남긴 글중 일부입니다. 유언의 분위기는 자기 인생에 대한 장엄한 총결산이며, 몇 군데 이와 같은 애잔한 소리가 섞여 있습니다. 떠나는 마당에 몇 마디 한 것이니 누가 뭐라할 것이며, 또 한들 어떠랴는 배포일지 모르죠. 그런데 오늘이 주간보고 날이죠, 아마? 우두둑(주먹 꺾어두는 소리)!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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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에 대한 관심을 울컥 불러일으키는 책. 아울러 그 시절의 지극히 uniq 했던 인물 박지원의 가치를 깨우쳐 주는 책. 정민이 쓴 박지원은 읽어보지 못했으나, 일단 고미숙이 박지원의 지음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박지원의 독특한 가치를 이처럼 예리 오묘하게 짚어낸 글을 아직 보지 못했다.

`웃음과 역설`로 함축된 박지원의 매력이 이 책으로 인하여 빛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유교국가에서 메인스트림의 천재로 태어났으면서도 끝내 정치적 정신적 문화적 아웃사이더를 자임하고 유쾌하게 자기 역할을 다한 그의 매력은 대단하다.

동양이 서양과 병립한 마지막 세기, 18세기 동아시아의 역동성을 살짝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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